'메모리 반도체 고점론'이 불거지면서 논란이 커지고 있다. 사실이라면 반도체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에 먹구름이 드리운 셈이기 때문이다.
고점론의 진원지는 글로벌 투자은행(IB) 모건스탠리다. 모건스탠리는 최근 메모리 수요가 눈에 띄게 감소했고, 창고에 재고가 쌓여 가격 하락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투자자들에겐 '배가 곧 잠길 테니, 서둘러 메모리 호(號)를 떠나라'는 경고로 읽혔다.
이 전망에 대해 관련업체들은 정면 반박하고 있다. 데이터센터·인공지능(AI)·자율차 등 산업 전반에서 수요가 넘쳐 고점 논란은 아직 시기상조라는 것. 특히 글로벌 3대 메모리 제조사 중 2개사(삼성전자·SK하이닉스)를 거느린 국내 업계에선 이런 주장에 큰 힘을 싣고 있다. 공급 확대를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여전히 수요를 쫓아가기 힘든 상황이라는 설명이다.
12일 김기남 삼성전자 디바이스솔루션(DS·부품)부문 사장은 서울 삼성전자 서초사옥에서 열린 '삼성 AI 포럼'에서 "몇 개월 후의 시장 상황은 예측이 어렵다"면서도 "4분기(연말)까지 메모리 시장에 큰 변화는 없을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업계 일각의 고점론을 일축한 셈이다.
김 사장의 이날 발언은 삼성과 SK하이닉스가 수개월 전부터 밝힌 내용과 거의 같은 입장이다
삼성전자는 지난 7월 31일 올해 2분기 실적발표를 통해 "수급 전망을 구체적으로 예상하긴 어렵지만, 중장기적으로 안정적인 업황이 계속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SK하이닉스도 같은 달 26일 진행된 실적발표를 통해 "공급 부족 현상이 이어질 것으로 예상한다"고 밝혔으니, 두 회사 입장은 같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들의 주장은 '업계 전체가 공급 확대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수요를 따라잡긴 역부족인 상황'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특히 서버 중심의 수요가 견고하다는 것이다. 삼성전자는 "계절적 비수기인 지난 상반기를 제외하고는 연간으로 서버 중심의 수요가 이어질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런 주장이 과연 사실일까. 이를 확인하려면 2분기 실적발표 이후의 메모리 수요 동향을 살펴보면 된다. 메모리 호황을 주도하는 D램의 가격 변화를 분석한 결과, 2분기에서 3분기로 넘어가는 시점인 7월 초 서버·PC D램 고정거래가격(ASP)은 전월 대비 각각 0.8%, 0.7% 상승했다. 통상 매 분기 초 대량으로 계약하는 메모리 시장 특성상 8월과 9월 가격도 비슷한 수준을 유지했다.
다만, 소비자들이 직접 물건을 사고파는 현물 시장 거래가격은 7월과 8월에 소폭 하락세를 보였다는 점이 눈에 띈다. 현물가는 ASP보다 비중은 작은 대신 변동 주기가 짧아 가격 변화가 크다. D램익스체인지는 지난달 말 D램 범용제품인 DDR4 8기가비트(Gb) 2400MHz 제품의 최저가가 전월(7.6달러) 대비 1달러 가량 떨어진 6.4달러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업계 한 관계자는 "제조사들은 현물가를 업체들의 대규모 계약 가격의 추세를 미리 가늠해 볼 수 있는 지표 정도로 활용한다"며 "B2C(기업-소비자간 거래) 시장에서 반도체 가격이 소폭 하락한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날 김기남 사장도 비슷한 의견을 제시하며 시장 가격과 도매가의 차이를 들어 업황 우려에 선을 그었다. 그는 "현재 고객들에게 제공되는 D램 계약가격(도매가)엔 큰 변화가 없다"고 강조했다.
다수의 업계 관계자들은 이른바 '고점론'이 이 지점에서 출발했다고 말한다. 모건스탠리 등 주요 투자은행(IB)과 증권업계가 메모리 현물가격과 각 기업의 출하 계획 등에 따른 일부 비관적인 현상을 전체인 양 확대해석했다는 것이다.
앞서 6일(현지시간) 모건스탠리는 투자자들에게 보내는 보고서를 통해 "메모리 수요가 감소해 반도체 업황이 나빠지고 있다"며 "3분기엔 메모리 가격이 더 하락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면서 모건스탠리는 호황의 주된 이유인 데이터 센터도 수요가 줄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전망은 반도체 업계 관계자들과의 이야기 끝에 도출된 것이라는 게 모건스탠리 측의 설명이다. 메모리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는데, 제조사가 고객들의 가격 부담을 외면하기 때문에 시황이 악화할 수밖에 없다는 것. 이는 사이클(Cycle·주기)이 있는 반도체 시장 특성상 하락세로 돌아설 원인이 될 것이라는 점. 또 이 점이 메모리 산업에 종사하는 자들의 공통된 시각이라는 것이다.
모건스탠리의 말대로라면 메모리 산업은 머지않아 수요자들이 제조업체들을 외면해 큰 타격을 입게 될 전망이다. 우선 지난 수십 년간의 메모리 산업을 보면 몇 년간의 사이클을 통해 호황과 불황이 교차했다. 지난해부터 이어진 호황이 꺼질 줄 모르고 지속한 터라 머지않아 고점에 이른다는 전망이 어쩌면 합리적인 추측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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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고점론에 대해 너무 우려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모건스탠리의 예측이 매 때마다 사실을 비껴갔다는 점이다.
모건스탠리는 지난해 말과 그 이전에도 제조사의 출하량 계획이 줄었다며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그러나 1분기와 2분기 메모리 업체들이 잇따라 최고 실적을 경신하면서 예측은 빗나갔다. 당시 서버용 D램 등의 수요가 급증할 것을 예상하지 못한 게 실수였다. 4차산업의 중심에 있는 메모리 분야의 밝은 전망을 모건스탠리가 대강 보아 넘기면 안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