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선구자' 앨런 튜링과 영국의 의미 있는 화해

[김익현의 미디어 읽기] '50파운드' 초상인물 선정이 갖는 의미

데스크 칼럼입력 :2019/07/17 09:37    수정: 2019/07/18 09:07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 기자 페이지 구독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을 보셨나요? 수학 천재이자 전쟁 영웅이었던 앨런 튜링을 다룬 작품입니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았던 튜링의 삶을 잘 묘사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영화 속 주인공인 앨런 튜링이 2020년 발행될 영국 50파운드 지폐 초상인물로 선정됐습니다. 스티븐 호킹을 비롯한 쟁쟁한 후보들을 제쳤습니다.

저는 영국 중앙은행의 이 선택이 여러 가지로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공지능(AI)과 컴퓨터 과학 뿐 아니라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배려가 담겨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영국 중앙은행이 50파운드 신권 화폐 초상인물로 앨런 튜링을 선정했다.

■ 전쟁영웅이었던 튜링, 동성애자 '주홍글씨' 때문에 비극적인 삶

앨런 튜링은 인공지능(AI) 컴퓨터의 기초를 닦은 인물입니다. 1940년대에 이미 ‘사람처럼 생각하는 컴퓨터’에 대한 꿈을 키웠습니다. 그가 1950년 발표한 논문 ‘컴퓨팅 기기와 지능(Computing Machine and Intelligence)’ 속엔 현대 AI 컴퓨터의 기본 개념이 담겨 있습니다.

그는 이 논문에서 흥미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모방게임을 한 뒤 기계인지, 인간인지 구분할 수 없는 기계를 만들 수 있을까?”란 질문이지요.

이 질문 뒤에 흥미로운 전망을 덧붙였습니다.

“50년 뒤에는 보통사람으로 구성된 질문자들이 5분 동안 대화를 한 뒤 (컴퓨터의) 진짜 정체를 알아낼 수 있는 확률이 70%를 넘지 않도록 프로그래밍 하는 것이 가능해질 것이다.”

‘튜링 테스트’로 널리 알려진 부분입니다. 이후 수 많은 컴퓨터 제작자들이 튜링 테스트를 통과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앨런 튜링

앨런 튜링은 또 2차대전의 전쟁영웅입니다. 해독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독일군의 ‘애니그마’ 암호를 풀어내는데 성공한 겁니다. 덕분에 독일 잠수함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지상최대 작전으로 불린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성공하는 데 튜링의 공은 절대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전쟁 영웅이자 수학 천재였던 튜링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남들과 달랐던 성적 취향 때문이었습니다. 튜링은 1951년 동성애 혐의로 맨체스터 경찰에 체포됐습니다. 이후 화학적 거세를 당하는 수모까지 겪었습니다.

튜링은 3년 뒤인 1954년 6월7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자살 도구는 청산가리를 주입한 사과였습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한 입 베어문 사과가 매킨토시 종이었다는 얘기도 널리 회자되고 있습니다.)

영국인들에게 앨런 튜링은 ‘만지면 만질수록 덧나는 상처’ 같은 존재였습니다. 제 아무리 전쟁 영웅이더라도, 대다수 사람들과 다른 성적인 취향을 가질 경우엔 절대 용납하지 않았던 사회적 폭력을 보여주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 영국 총리 "50파운드 신권 화폐 통해 LGBT들의 기여 기억해야"

영국은 튜링 사후 50년인 2013년에야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습니다. 당시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이 튜링을 사면하면서 많은 관심을 모았습니다.

4년 뒤인 2017년엔 좀 더 의미 있는 조치가 단행됐습니다. 과거 외설죄로 처벌됐던 동성애자들을 사후 방면하는 법이 시행된 겁니다. 영국은 이 법에 ‘튜링법’이란 명칭을 붙이는 것으로 또 다시 그와의 화해를 시도했습니다.

영국 중앙은행이 50파운드 화폐에 튜링의 얼굴을 새기기로 한 건 이런 맥락을 그대로 이어받은 조치입니다. 테레사 메이 영국 총리가 15일(현지시간) 트위터에 올린 글에 그 의미가 잘 담겨 있습니다.

그는 “앨런 튜링이 수학과 컴퓨터 과학 분야에서 해낸 선구적인 작업은 2차 대전을 끝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적었습니다.

더 관심을 끄는 건 바로 뒤에 이어진 부분입니다.

“50파운드 신권을 통해 튜링의 유산과 LGBT들이 우리나라에 기여한 빛나는 업적들을 기억하는 것은 아주 적절한 일이다.”

[덧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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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만지면 만질수록 덧나는 상처’라는 표현은 김윤식 교수의 ‘이광수와 그의 시대’에서 빌어 왔습니다.

2. LGBT는 성소수자 중 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트랜스젠더를 합쳐서 부르는 단어입니다.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sini@zdne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