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렛팩커드(HP)는 영혼을 잃었다.
경쟁사의 근거 없는 비방이 아니다. 레오 아포테커 HP 최고경영자(CEO)가 블룸버그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직접 한 말이다.
지난 9일 보도에 따르면 아포테커 CEO는 내가 HP에 합류하면서 맨 처음 하려던 것은 사람들의 말을 경청하는 것이었다며 보통 일선 직원들은 (기업의) 약점들을 모두 꿰고 있다고 말했다.
HP가 잃었다는 영혼, 아포테커 CEO가 직원들에게 듣고자 했던 '약점'은 뭘까? 그가 HP에 합류하기 직전 회장으로 있었던 SAP의 주특기 '소프트웨어(SW)' 역량을 가리킨다.
기업용 SW 전문업체 SAP에서 20년을 넘게 일해온 아포테커 CEO에게 SW가 약한 HP는 영혼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소프트웨어(SW)에 소홀했던 HP 역량이 시장의 요구와 동떨어지고 있다는 진단에 힘이 실리는 모양새다. 최근 SW관련 매출 성장율을 비교하면 그 윤곽이 드러난다.
HP는 지난 회계연도 SW판매가 35억9천만달러였는데, 지난해 IBM이 거둔 225억달러에 크게 못 미치는 수준이다. 또 지난해 10월말 기준으로 HP 서비스 매출은 전년대비 1% 오른 349억달러였다. 경쟁사 IBM의 서비스 매출은 2.6% 오른 564억달러였다.
3년 전인 지난 2008년 HP는 130억달러가 넘는 자금을 투입해 IT서비스업체 일렉트로닉데이터시스템(EDS)을 사들였지만 EDS 인수는 별 효과가 없다는 평가다.
HP가 SW를 강조하는 까닭은 클라우드 시대를 대비하기 위함이다. 블룸버그는 아포테커 CEO가 클라우드 컴퓨팅 부문에서 경쟁을 가속화하고 주춤거리는 매출 성장에 맞서기 위해 전열을 가다듬고 있다고 묘사했다.
HP는 지난달 중순 데이터 분석업체 '버티카'를 인수했다. 버티카는 물리적 또는 가상화 환경에서 돌아가는 데이터웨어하우징(DW) 솔루션을 제공할 수 있는 기술을 갖춘 것으로 평가된다.
당시 아포테커 CEO는 향후 더 많은 전문 SW 업체를 사들일 계획이라고 언급했다. 그는 HP가 보안을 강화하고 고객사들이 대용량 데이터를 분석할 수 있도록 도움이 될만한 인수 대상을 물색중이라고 밝혔다.
HP가 관심을 기울일만한 SW업체는 어디일까.
미국 재무관리업체 로버트W.베어드 소속 애널리스트인 제이슨 놀란드는 HP가 데이터 통합 솔루션 업체 '인포매티카', 시스템 관리 솔루션 업체 'BMC소프트웨어', 분석업체 'SAS', 보안업체 '시만텍', 데이터 관리 업체 '컴볼트' 등을 잠재적 인수 대상으로 주시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각자의 영역에서 확고한 입지를 갖고 있는 기업들이다.
어찌 보면 SW업계에 잔뼈가 굵은 아포테커 CEO가 HP로 자리를 옮긴 뒤 SW 부문에 힘을 쏟을 것이라는 게 지극히 예상 가능한 시나리오다. 그러나 HP가 아포테커 CEO의 '친정' SAP나 SaaS 업체 세일즈포스닷컴을 사들이는 일은 없을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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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P와 세일즈포스닷컴은 기업의 지출명세, 재무보고서, 고객관계관리(CRM) 등과 같은 업무를 지원하는 기업용 애플리케이션에 특화돼 있다. 아포테커 CEO는 HP가 이런 분야 솔루션에 관심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아포테커 CEO의 비전과 세부 전략은 오는 14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리는 행사를 통해 구체화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