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커뮤니케이션하는가?

"위계 없는 온라인 커뮤니케이션 필요하다”

전문가 칼럼입력 :2020/11/03 14:25

채희태 (주)모티링크 경영과학연구실 실장
채희태 (주)모티링크 경영과학연구실 실장

누구나 커뮤니케이션을 이야기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인간의 역사 속에서 커뮤니케이션 자체를 부정했던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과거의 독재자도, 현실 세계의 꼰대도 모두 커뮤니케이션을 이야기한다.

미국 UCLA의 심리학자 ‘알버트 메라비언’ 교수는 커뮤니케이션의 3요소를 ‘word’, ‘tone of voice’, ‘body language’라고 이야기했다. “사람은 현란한 말솜씨보다 다정함에 끌린다”는 소위 메라비언의 법칙은 커뮤니케이션의 표면인 기술에 관해 이야기했을 뿐이다.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 있지 않다면 위 세 가지 요소는 무용지물이 된다.

필자는 커뮤니케이션의 내면, 즉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 환경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나는 커뮤니케이션을 하기 위해 필요한 3요소를 ‘대상’, ‘목적’, 그리고 ‘불완전성’이라고 생각한다. 커뮤니케이션을 하기 위해 기본적으로 커뮤니케이션을 할 대상이 있어야 함은 너무나 당연하다. 다음으로 모든 커뮤니케이션은 상대를 굴복시키거나, 동정을 구하거나, 아니면 협력을 끌어내기 위한 목적을 내재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완전한 커뮤니케이션은 존재하지 않는다. 세 번째 요소와 관련해서는 독일의 새로운 철학 병기로 떠 오르고 있는 ‘니클라스 루만’의 주장을 근거로 제시한다.

너는 생각한 것들 중 극히 일부만을 말할 뿐이다. 그리고 네가 말한 것들 중 극히 일부만을 나는 이해한다. 여기서 너의 의도(정보)와 너의 말(통지)을 구별하는 나의 이해가 너의 의식 속에 있는 것과 일치하는지 확인할 길은 없다. 나는 그런 이해에 기초해 다시 너에게 내가 생각한 것들 중 극히 일부만을 말하며, 앞서와 같은 과정이 반복된다. 이 과정은 서로가 말한 것을 추리(이해)하면서 그 말속에 들어 있는 기대에 맞춰 나감(기대 구조 형성)을 통해서만 지속할 수 있다(정성훈. 2009. “루만(N. Luhmann)과 하버마스(J. Habermas)의 대립구도에 관한 하나의 이해”).

칼럼 자료사진(제공=모티링크)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커뮤니케이션을 가장 방해하는 것은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과한 기대다. 루만은 커뮤니케이션의 세 번째 요소인 불완전성 중 커뮤니케이션이 갖고 있는 근본적 한계에 관해 이야기했다. 나는 그 불완전성 안에 불평등 또한 포함돼 있다고 생각한다. 혹시 관계가 동등한 친구 간의 소통은 평등하다고 생각하는가? 인류에게 있어 평등은 자유와 더불어 과정으로 지향해야 할 가치일 뿐, 과거 그 어떤 시대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완전한 평등이란 불가능하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인간의 가장 중요한 두 가지 특징은 모두 다르게 존재한다는 것과, 그 누구도 완벽하지 않다는 것이다. 인류의 완벽하지 않은 다름은 시대가 요구하는 기준에 따라 언제나 위계와 질서를 부여받아 왔다. 원시시대의 기준은 생존을 위한 근육과 종족 번식을 위한 출산 능력이었을 것이다. 언젠가는 혈통에 의한 지위가 불평등의 기준이 되었고, 현재 청년 세대가 대한민국을 헬조선이라고 부르는 가장 큰 이유는 제도적으로 폐지된 계급이 경제적으로 부활해 더 단단한 유리벽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불평등의 간극을 줄이기 위한 노력은 매우 의미가 있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이 완벽하게 평등하다거나, 그래야 한다는 주장은 오히려 평등을 방해하는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커뮤니케이션 또한 마찬가지다. 커뮤니케이션의 평등에 대한 기계적 주장은 오히려 평등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커뮤니케이션을 방해한다.

우리는 왜 커뮤니케이션하는가?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오자. 우리는 왜 커뮤니케이션하는가? 불평등한 사회적 구조에서 우월한 지위를 점하고 있는 사람은 주로 현재의 구조를 고착시키거나 은폐시키기 위해 커뮤니케이션을 사용한다. 만약 ‘노오력’을 통해 열등한 지위를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불평등한 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커뮤니케이션할 것이다. 방법은 두 가지다. 혁명 아니면 요행이다.

여전히 유효할 지는 모르겠지만, 과거에는 주로 불평등의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방법으로 혁명을 이야기했다. 그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무리 명분에 동의한다고 하더라도 지금은 혁명을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혁명이 사라진 시대… 불평등을 해소할 수 없다면 그 안에서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래서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불평등한 세상을 견디기 위해 요행에 의지한다. 그리고 이 사회의 시스템은 모순적으로 그 요행을 적극 지원한다.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부동산에 투자하고, 주식이나 암호화폐를 통해 일확천금을 노린다. 평등을 강제할 수 없는 국가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리라.

물리학의 에너지 보존 법칙을 적용하면 내가 부동산이나 주식을 통해 부(에너지)를 얻게 된다면 누군가는 그만큼의 부(에너지)를 잃을 수밖에 없다. 부동산과 주식이 이 사회의 경제적 파이를 키워 모두가 행복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행복(에너지)의 대가는 미래의 구조적 불행(에너지)으로 이어질 수 있다.

영화 “빅쇼트”와 “국가 부도의 날”은 그런 현실을 개연성 있는 스토리에 담은 문화 콘텐츠라고 할 수 있다. 혁명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현실 가능한 요행은 사회 구조를 악화시켜 미래를 더욱 고통스럽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제3의 대안으로 “보완의 커뮤니케이션”을 주장하고자 한다.

‘불완전성’과 함께 커뮤니케이션의 3요소를 구성하고 있는 ‘대상'과 ‘목적’에 주목을 해 보자. 커뮤니케이션의 대상은 가정, 지역 사회, 직장 등 내가 소속된 다양한 사회의 구성원이며, 커뮤니케이션의 목적은 기본적으로 나의 이익을 지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익이 개입돼 있어 자칫 대상과 목적을 갈등 관계로 인식할 수도 있지만, 같이 존재해야 의미가 있는 것은 모두 ‘보완의 역할 관계’로 보아야 한다. 극단적인 예로 하다못해 계급사회가 존재하기 위해서도 지배의 역할과 피지배의 역할이 모두 필요하다. 회사 또한 마찬가지다. 직원 없이 대표 혼자 이윤을 창출할 수 있다면 굳이 직원을 채용할 이유가 없다. 직원 또한 경제적, 심리적 안정이 필요하기 때문에 영혼을 팔아가며 회사에 다닌다. 대표와 직원의 관계는 마치 악어와 악어새처럼 서로의 역할이 필요한 공존 관계다. 그러나 우리는 안타깝게도 ‘목적’을 이루기 위해 ‘대상’과 경쟁하거나, ‘대상’을 위해 ‘목적’을 희생하는 반쪽짜리 커뮤니케이션에 몰입한다.

데이터 커뮤니케이션

온라인은 커뮤니케이션이 모든 커뮤니케이션을 대체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오프라인 커뮤니케이션이 갖고 있었던 축적된 문제점들을 빠르게 해체해 나가고 있는 것 같기는 하다. 얼마 전 한 임시 조직에서 다양한 세대들과 함께 일을 한 적이 있다. 필자와 동갑내기인 한 친구는 스무 살도 더 어린 여자 ‘아이’가 이름 뒤에 님을 붙여 부른다며 분해서 잠도 오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오프라인 커뮤니티에서는 나이나 학벌 등으로 인한 위계에서 벗어나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특정한 목적을 갖고 운영되고 있는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나이나 학벌이 주는 위계에서 벗어난 지 오래다. 기타 커뮤니티에서는 기타를 잘 치는 것이, 카메라 커뮤니티에선 사진에 대한 지식이 나이나 학벌보다 더 중요하다. 이미 온라인 커뮤니케이션에 익숙해진 세대들은 목적과 무관한 과거의 산물이 구질구질하게 엉켜있는 오프라인 커뮤니케이션보다 필요한 데이터를 효과적으로 주고받을 수 있는 온라인 커뮤니케이션을 더 선호한다.

필자는 기성세대로서 코로나로 인해 초등학교도, 중고등학교도, 그리고 대학교 캠퍼스도 경험하지 못한 새내기들에 대한 측은함과 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 한 대학 신입생과 이야기할 기회가 있어 온라인 수업이 불편하지 않으냐고 물었더니 자신은 온라인 수업이 오히려 더 편하다고 대답했다. 필자도 대학원 수업을 온라인으로 청강하고 있는데, 어느새 그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익숙해졌는지 얼마 전엔 주차해 놓은 차 안에서 편하게 수업을 듣기도 했었다. 온라인이 모든 오프라인 커뮤니케이션을 대체할 수는 없겠지만, 분명 커뮤니케이션의 순도를 높일 수 있는 장점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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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계를 커뮤니케이션할 목적이 아니라면, 온라인 커뮤니케이션이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 상기하자. 커뮤니케이션의 3요소는 대상, 목적, 불완전성이다. 오프라인 커뮤니케이션에 익숙해 온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커뮤니케이션에 위계를 탑재함으로써 커뮤니케이션의 목적으로부터 멀어진다. 뿐만 아니라 오프라인 커뮤니케이션이 온라인에 비해 더 완전하다는 착각에 빠진다.

물에 불순물이 섞여 먹을 수 없다면 물을 버리고 새 물을 받아야 한다. 만약 오프라인 커뮤니케이션에 위계라는 불순물이 더 많이 포함돼 있다면, 당분간은 목적 의식적으로 온라인 커뮤니케이션을 지향할 필요가 있다. 물론 필자도 온라인 커뮤니케이션이 오프라인 커뮤니케이션을 완벽하게 대체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하지만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효율적으로 보완하기 위해서라도 우리가 무시해 왔던 한 축, 즉 온라인 커뮤니케이션을 더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노력이 필요하다. 오프라인에 길든 사람이 온라인에 익숙해진 사람과 커뮤니케이션을 할 때, 자신에게 익숙한 커뮤니케이션 방식만 고집한다면 커뮤니케이션은 불완전에 그치지 않고 아예 불가능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지금 우리 사회의 괴롭히고 있는 세대 갈등처럼…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채희태 (주)모티링크 경영과학연구실 실장

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한 후 25년 이상 예술과 실무, 온라인과 오프라인, 민과 관을 넘나들며 콘텐츠 및 정책 기획자로 활동했다. 서강대학교 공공정책대학원 사회학 석사이며 “백수가 과로에 시달리는 이유” 의 저자이다. 경영의 과학화를 위한 사회학적 연구와 더불어 디지털 워크스페이스를 기반으로 하는 커넥티드 리모트워크(Connected Remote Work) 업무 환경의 구현을 위한 기획업무를 수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