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익현의 미디어 읽기] 유럽의 AI 규제, 미국은 왜 '목적' 거론할까

AI 시대를 이끄는 '놈.놈.놈'

데스크 칼럼입력 :2020/02/19 09:27    수정: 2020/10/05 13:50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 기자 페이지 구독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미국은 돈이 있고, 중국은 데이터가 있다. 그런데 유럽은 목적이 있다.”

블룸버그 기사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유럽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그대로 녹였다. 그 다음 문장은 더 노골적이다. “수요일(19일) 그(그녀)가 보여주려는 게 바로 그 메시지다.”

미국 통신사 블룸버그는 왜 이렇게 썼을까? 물론 유럽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중심엔 그(그녀)가 있다.

마르그레테 베스타게르. 2014년부터 5년 동안 유럽연합집행위원회(EC) 반독점 감독관을 역임했다. 그 시절 그는 찬바람을 몰고 다녔다. 내로라 하는 기업들이 그에게 호되게 당했다.

유럽연합

이런 그를 사람들은 ‘부유한 나라의 가장 강력한 반독점 사냥꾼’이라 불렀다. 경제 전문잡지 ‘이코노미스트’가 붙여준 별명이다.

반독점 감독관 베스타게르는 등장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전임자가 남긴 쓰레기를 말끔히 치워버렸다.

■ 구글 떨게 만들었던 저승사자, 더 강력한 무기들고 등장

2014년 10월 반독점 감독관이 된 베스타게르는 구글 조사에 착수했다. 정확하게는 재조사였다. 조사 혐의는 검색 시장의 독점적 지위 남용. 구글 검색 엔진에서 자사 콘텐츠를 우대했다는 혐의였다.

퇴임을 앞둔 전임자 호아킨 알무니아는 구글과 부드럽게 마무리했다. 여행, 레스토랑 검색 결과에서 구글 콘텐츠를 노출할 때는 반드시 명시하겠다는 타협안에 합의했다. 호된 비판이 쏟아졌다. 결국 알무니아는 불명예 퇴진했다.

베스타게르는 달랐다. 천하의 구글도 벌벌 떨게 만들었다. 4조원 가량의 천문학적 벌금을 부과했다. 그뒤 몇 년 동안 구글에 매긴 과징금만 10조원에 이른다.

마르그레테 베스타게르 EC부위원장. (사진=씨넷)

애플은 세금 때문에 홍역을 치뤘다. 아일랜드에 유럽 본사를 두는 방식으로 탈세를 했다는 혐의. 그 유명한 조세 피난처 혐의다. 결국 애플도 굴복했다. 베스타게르다웠다.

아마존과 페이스북도 지금 떨고 있다. 개인 정보 남용 때문이다. 실리콘밸리 대표 기업들에게 베스타게르는 저승 사자다. ‘가장 강력한 반독점 사냥꾼(most powerful trustbuster)’이란 별명이 괜히 생긴 게 아니다.

미국 기업이나 미디어가 그(그녀)에 대한 감정이 좋을 리 없다. 그런데 왜 블룸버그는 ‘목적이 있다’고 묘사했을까? 그 얘길 좀 더 파고 들어보자.

유럽연합(EU)은 19일(현지시간) 중요한 물건을 내놓을 예정이다. ‘인공지능(AI) 백서’다. 그냥 AI 산업 동향이나 읊조리는 한가한 보고서가 아니다. AI 규제의 기본 틀을 보여줄 중요한 문건이다.

지난 해 11월 취임한 우르졸라 폰데어라이엔 EU집행위원장의 지침에 따른 것이다. 폰데라이엔은 100일 이내에 AI 정책안을 내놓으라고 주문했다.

우르졸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 (사진=EU)

이런 작업에 베스타게르가 빠질 리 없다. 그가 주도했다. 5년 간의 반독점 감독관 임무를 무사히 끝내고 유럽연합집행위원회(EC) 부위원장으로 승진했다. 칼날이 더 매서워졌다.

AI에 대한 규제는 꼭 필요하다. 규제 실종 상태는 과한 규제보다 더 나쁘다. 기업들도 오히려 더 불안하기 때문이다. 선다 피차이(구글 CEO), 마크 저커버그(페이스북 CEO) 같은 사람들도 'AI 규제'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규제 면에선 늘 유럽이 한 발 앞서 갔다. 다른 나라들이 신기술에 열광할 때, 유럽은 그 기술이 몰고 올 사회 변화를 걱정해 왔다. 늘 그랬다. 그래서 AI 규제가 특별할 건 없다.

■ 뛰는 놈, 쫓는 놈, 잡는 놈…미국, 중국, 유럽의 묘한 3파전

문제는 시장 상황이다. AI 분야도 미국과 중국 양강이 주도하고 있다. 실리콘밸리가 있는 미국은 최근 들어 AI 쪽에 엄청나게 투자하고 있다. 트럼프 정부는 최근 AI 연구에만 11억 달러 예산을 배정했다. 가뜩이나 앞서가는 미국은 투자 면에서도 세계 최고다. 블룸버그 표현 그대로다.

후발 주자 중국은 요즘 더 매섭다. 중앙 정부의 강력한 리더십이 엄청나다. 그런데 더 큰 강점은 ‘느슨한 규제’다. 유럽 같은 엄격한 개인정보 보호 규정이 없다. 그래서 방대한 데이터를 비교적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다. 알고리즘과 함께 AI 경쟁력의 양대축인 데이터 활용 면에서 큰 강점을 갖고 있다.

유럽은 다르다. 미국 같은 강력한 산업적, 물적 토대가 없다. 중국처럼 개인정보를 자유롭게 활용하기도 힘들다. 일반개인정보보호규정(GDPR) 때문이다. 이미 뒤져 있는 상황에서, 따라갈 묘책이 없다.

이런 배경을 깔고 보면 EU의 AI 규제를 다른 관점에서 볼 수도 있다. 살짝 기울어져 있는 운동장을 평평하게 만들겠다는 의도도 있다고 봐야 한다. '빠른 발전'보다는 '안정적인 진보'를 선호하는 EU 방식이다. 그래서 블룸버그는 '목적이 있다'고 서술했다.

AI 규제 정책 발표를 이틀 앞두고 베스타게르가 기자 간담회를 했다. 그런데 여기서 쏟아낸 말들이 예사롭지 않다.

그는 “이번에 발표될 전략은 유럽에서 좀 더 많은 AI를 생산하고 또 배치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하지만 (유럽의 AI 전략은) 미국이나 중국과 같진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유럽연합집행위원들.

베스타게르는 “중국의 AI는 유럽의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할 것이다”고 강조했다. 강한 규제를 시사했다. 특히 생체인증이나 자율주행차량처럼 위험하거나 인권침해 소지가 있는 부분이 주 타깃이다.

외신들은 EU의 새로운 AI 정책에선 '얼굴인식 기술'이 중요한 쟁점이 될 것으로 예상한다. 얼굴인식 기술 사용을 엄격하게 제한하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베스타게르는 아예 “얼굴인식이나 다른 위험한 기술들이 EU의 가치에 적합하지 않게 개발되었을 경우엔 시스템을 새롭게 훈련시켜야 할 것이다”고 엄포를 놓았다. 그는 또 "AI 백서를 계기로 어떤 상황에서 얼굴인식 기술 사용을 정당화할 지에 대한 토론이 시작됐으면 좋겠다"는 말도 했다.

■ 모두가 AI 규제를 외치고 있지만…

표현을 점잖게 했지만, 꽤 무서운 말이다. 미국 기업들은 2년 전 일반개인정보보호법(GDPR) 때의 악몽이 떠오름직하다. 그래서일까? 마크 저커버거가 서둘러 브뤼셀로 날아갔다. 베르타게르를 비롯한 EU 핵심 관계자들과 만났다.

저커버그도 그 동안 AI 규제가 필요하다는 말을 해 왔다. 명확하고 구체적인 규제를 강조해 왔다. 물론 저커버그가 생각하는 규제는 EU가 생각하는 규제와는 다르다. 저커버그가 생각하는 규제는 '마음 놓고 기업 활동을 할 수 있는, 예측 가능한 상황'을 만들어달라'는 의미에 더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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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저커버그의 요구에 EU 쪽에선 코방귀를 뀌었다. 유럽에서 돈을 벌려면 유럽 기준을 따르라. 일견 간단한 말처럼 들린다. 하지만 2년 전 GDPR이 도입된 뒤 페이스북은 유럽에서 엄청난 시련을 겪고 있다.

이번에 나올 AI 규제 역시 비슷한 상황을 연출할 가능성이 많다. 블룸버그가 '목적이 있다'는 한 건 이런 점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sini@zdne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