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문제를 놓고 삼성과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정면으로 맞붙었다. 삼성그룹 오너 일가의 경영승계를 위해 삼성물산의 주주이익을 훼손하려 한다는 엘리엇의 주장과 빈 틈을 노려 기업을 위협하는 외국계 '먹튀 펀드'의 주도면밀한 공격이라는 논리가 맞서고 있다. 양측은 합병 결의를 위한 주주총회를 앞두고 각각의 논리로 주주를 설득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또 엘리엇의 가처분 신청으로 법정 다툼을 벌이고 있다. 이번 사태는 특히 다양한 구조개편을 시도하고 있는 한국 기업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디넷코리아는 삼성물산과 엘리엇 공방의 배경과 우려 사항을 3회에 걸쳐 긴급진단한다.[편집자주] --------글 싣는 순서--------
①삼성 흔드는 엘리엇, '정의의 사도'인가 ②공격 받은 삼성, 무엇을 준비하나 ③엘리엇 사태 장기화…우려되는 악재들
6월 4일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의 전격적인 삼성물산 지분 보유 공시와 합병 반대 의견 표명, 그리고 이어진 주총결의 금지 가처분 신청까지.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간 합병에 제동을 걸고 나선 엘리엇의 기습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던 삼성물산은 자사주 전량(5.75%)를 ‘백기사’ KCC에 매각하며 첫 반격에 나섰다. 동시에 우호 지분을 최대한 늘려 합병을 성사시키겠다는 의지도 피력했다.
이후 양측은 전면전 태세를 갖추고 연일 맞대응에 나서고 있다. 엘리엇은 합병비율의 불공정성을 내세우는 여론전을 진행하며 법원에 두 건의 가처분 소송을 내고 합병 작업에 제동을 거는 동시에 현물 배당을 할 수 있도록 정관을 개정할 것을 요구하는 등 전방위적으로 삼성을 흔들고 있다. 사전에 치밀한 준비작업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시나리오다.
엘리엇이라는 암초를 만나 초비상이 걸린 삼성물산은 합병의 당위성을 설명하며 우호주주 확보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한편으로는 영국 런던증권거래소에 상장된 주식예탁증서(DR)를 상장 폐지하면서 해외 소송 가능성을 차단하는 동시에, 철저한 논리로 법적 대응에 나서면서 해외 투기 자본의 ‘먹튀’ 시도라는 엘리엇의 의도를 공격하는 등 냉정과 열정 사이를 오가며 전면 대응에 나서고 있다.
■주총 앞두고 표심(票心) 결집 총력
일단 발등에 떨어진 불은 내달 17일로 예정된 주주총회다. 합병안을 통과시키려면 주주총회 참석 주주의 2/3 이상, 전체 의결권의 1/3 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한다. 주주 참석율을 약 70%로 가정하면 최소 47%의 찬성표를 얻어야 승산이 있다. 현재 삼성그룹은 이건희 회장(1.37%)를 비롯해 삼성SDI(7.18%), 삼성화재(4.65%), 삼성복지재단(0.14%) 등이 13.59%의 삼성물산 지분을 보유하고 있고 여기에 삼성물산 자사주를 매입한 백기사 KCC 지분 5.96%를 합치면 우호지분은 19.55%다.
주주명부가 폐쇄된 11일을 기준으로 외국인 지분율은 33.61%다. 이 중 엘리엇이 7.12%를 보유하고 있고 주주명부 폐쇄 전 삼성물산 지분 2.2%를 확보한 것으로 확인된 미국계 헤지펀드 메이슨캐피털 등도 엘리엇의 편에 설 가능성이 높은 상태다. 국내 투자자 가운데 삼성물산 지분 2.11%를 보유한 일성신약은 합병에 부정적인 견해를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엘리엇과 의견을 같이 하는 소액주주들의 반대도 만만치 않은 상태다. 인터넷카페 삼성물산 소액주주연대 회원들은 두 회사의 합병부결을 촉구하는 탄원서를 작성해 지난 23일부터 서울중앙지방법원에 대거 제출하고 있다.
지분 10.15%를 보유한 최대주주인 국민연금이 캐스팅보트를 쥘 수밖에 없는 구도다. 국민연금으로 하여금 찬성 의견을 이끌어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해졌다. 국민연금은 앞서 SK C&C와 SK 합병에 대해 합병 반대 의견을 낸 터라 특히 관심이 모아진다. SK의 경우 최대주주 지분율이 높아 합병안이 통과됐지만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에는 큰 변수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국민연금은 최근 삼성물산 경영진에게 합병 시너지 효과와 주주가치 제고 방안 등을 검토해 찬반 의사를 결정하겠다는 뜻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삼성물산이 표심을 찬성으로 돌리기 위해서는 주주들과 만나 합병의 당위성을 최대한 설득하는 방법 밖에는 없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통합 삼성물산의 비전을 투자자들과 공유하고 주주가치를 끌어올릴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이미 최치훈 건설부문 사장과 김신 상사부문 사장이 싱가포르와 홍콩 등을 돌며 해외 주주들과 접촉해 합병의 정당성을 설명하고 있다. 이번주 초부터 주총일 전까지 주주들과 개별 접촉하며 공식적인 위임장 확보에 돌입하게 된다.
이와 함께 제일모직은 30일 애널리스트 등을 대상으로 여는 기업설명회(IR)에서 합병 후 시너지 설명과 함께 종합적인 주주친화 정책을 내놓을 것으로 보인다. 업계에서는 합병 이후 자사주 매입, 배당성향 제고, 거버넌스 위원회(주주권익보호 위원회) 설치 등 다양한 방안이 언급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날 IR에는 윤주화 제일모직 패션부문 사장과 김봉영 에버랜드 사장이 참석해 합병 취지와 당위성 등을 직접 설명한다.
외국인 투자자 설득에는 세계 최대 의결권 자문회사인 ISS 설득이 관건이 될 전망이다. 주요 기관투자자들이 주주총회 안건에 대한 결정을 내리기 전에 ISS 보고서를 활용하는 만큼 ISS가 외국인 주주들의 의결권 행사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미 지난 19일 최치훈 삼성물산 건설부문 사장과 김신 상사부문 사장이 참석한 가운데 ISS와 컨퍼런스콜(전화회의)를 진행하며 합병 시너지 효과를 설명했다.
국내에서는 한국기업지배구조원이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에 대한 자문서비스를 제공한다. 한국기업지배구조원은 합병 안건을 분석해 내달 초까지 의안분석 보고서를 발송한다는 계획이다. 국민연금의 결정은 국내 다른 기관투자자들의 결정에도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
윤태호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이 실패할 시 재추진이 쉽지 않고 모든 지배구조 개편에 제동이 걸리기 때문에 삼성 입장에서는 반드시 통과시켜야 하는 사안으로 기존 주주의 절대적인 지지가 필요한 상황”이라면서 “갈피를 잡기 어려웠던 삼성지배구조개편의 방향성을 공유해 기업의 가치와 주주의 가치가 같은 선상에 있음을 설명하고 장기적이고 구체적인 주주친화정책을 통해 적극적인 설득에 나서야 할 시기로 보인다”고 말했다.
■'냉정'과 '열정' 오가는 삼성물산
엘리엇은 전격적인 지분보유 공시 이후 전방위적인 여론전을 펼쳐왔다. 국내 홍보대행사를 통해 현재까지 총 5건의 보도자료를 배포했고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 반대 관련 정보를 제공하는 홈페이지를 개설해 자신들의 주장을 알리는데 집중하고 있다. ‘주주 권익 보호’라는 명분을 내세워 우호 세력을 최대한 확보하겠다는 의지다. 지난 19일 엘리엇이 삼성물산을 상대로 낸 가처분 소송 심문기일에서도 엘리엇은 합병 추진 과정의 위법성을 지적하기보다 “합병은 삼성물산 자체의 이익이 아닌 소위 오너일가의 지배권 승계를 원활히 하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 이뤄지고 있다”며 여론에 호소하는 변론에 집중했다.
이에 맞서는 삼성물산의 대응은 차분하면서도 논리적이다. ‘삼성물산은 “자본시장법 시행령에 따라 1:3501의 합병비율을 산정했으며 외부 전문가 평가를 거친 후 이사회를 통해 합병을 승인받았다”면서 “리서치 애널리스트들이 분석한 목표주가가 합병비율의 적정성을 뒷받침 한다”면서 합병 과정에 문제가 없었다는 점을 줄곧 강조하고 있다.
합병 이후 장밋빛 미래를 주주들에게 설파하는데는 적극적이다. 삼성물산은 홈페이지에 게재한 합병 설명 자료를 통해 통합 삼성물산은 2020년 매출 60조원을 청사진으로 내세우고 있다고 밝혔다. 이 중에서 합병을 통한 시너지 창출 매출이 6조원에 달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건설 1조원, 상사부문 5천억원, 패션부문 2조원, 식음·레저부문 4천억원 등이다. 특히 삼성그룹의 신수종사업인 바이오부문은 가장 큰 시너지 창출이 기대되는 사업부문으로 1조8천억원에 시너지를 낼 수 있다고 내다봤다.
삼성은 설명 자료를 통해 “삼성물산은 최근 수익성 정체와 성장 지연으로 주가가 하락세에 있으며, 합병을 통해 삼성물산 주주들은 보유주식을 더 안정적이로 성장성 높은 회사의 주식으로 전환할 수 있게 됐다”면서 “삼성물산은 제일모직과의 합병으로 전자, 금융서비스와 더불어 삼성그룹의 제3의 사업 축으로서의 위상을 강화하고 신성장 동력 확보를 위한 토대를 마련할 수 있다”고 말했다.
간접적인 방법을 통해서도 시장에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윤용암 삼성증권 사장은 매주 수요일 열리는 사장단 회의에 앞서 기자들과 만나 “시장반응이 가장 중요하다”면서 “합병 공시 후 양사 주가가 급등했으나 엘리엇 공격 후 주가가 하락세로 돌아섰고, 일부 증권사가 합병 무산 가능성을 거론하자 급락 양상을 보인 것은 시장이 어떤 것을 원하는지 분명해 진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19일 변론 과정에서 삼성물산 측 변호인은 또 “엘리엇은 지난 3일 주주제안서를 내 주식자산 일부 등 전부를 현 주주에 현물배당하자고 했는데 이는 주식자산을 다 빼서 삼성물산을 껍데기로 만들자는 것과 다름없다”면서 “엘리엇은 회사의 지속적 성장이나 발전은 고려하지 않고 당장 자산을 처분해서 단기 이익을 취하자는 것”이라고 엘리엇의 의도를 '먹튀 자본론'으로 공격하기도 했다.
국내 학계와 금융투자업계에서도 지원사격에 나섰다. 특히 엘리엇의 행보가 썩은 고기를 뜯어 먹는 대머리 독수리에서 나온 벌처(vulture) 펀드들과 다를게 없다는 점을 경계하면서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을 국익(國益) 관점에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 교수는 "국민연금은 합병안에 대한 찬반 여부를 고려할 때 어느 편의 손을 들어주는 것이 국가 경제에 바람직하겠냐는 고민을 해야하고 국내 기관투자자들도 벌처펀드에 편승해서 수익을 올리는 것이 바람직한가에 대한 고려를 해야한다"면서 “이번 삼성과 엘리엇 간의 분쟁을 국익이라는 관점에서 봐야하며 세계 경제 상황과 한국경제의 실제를 반영한 현실적인 기업관에 기반을 두고 재벌정책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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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금융투자업계를 대표하는 한국금융투자협회 황영기 회장 역시 최근 국내 언론과 인터뷰에서 이번 합병이 무산되거나 삼성그룹 경영권이 위협을 받는다면 삼성과 대한민국의 평판에 먹칠을 하고 한국 기업의 지배구조가 지닌 취약성을 전세계에 노출하게 된다는 점을 경계하기도 했다.
김동양 NH투자증권 연구원은 “삼성물산은 지배주주 지분율이 낮고 외국인 지분이 30%가 넘는 만큼 이같은 변수를 염두에 두지 않았을리 없는 만큼 주주들을 달랠 준비도 했을 것”이라면서 “투자자 설명회를 통해 밝힌 내용 처럼 조만간 대형 수주가 이뤄지고 이에 따라 실적과 주가도 제고된다면 반대하던 주주들 결국 찬성쪽으로 돌아서 합병 작업이 공고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