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에 제동을 걸고 나선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의 공격에 대해 국내 경제학계 주요 인사들이 비판적인 입장을 내놨다.
엘리엇이 포퓰리즘을 활용해 사익을 추구하는 극단적인 ‘알박기’ 업자들과 다를 바 없다는 지적이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외국 투기자본으로부터 국내 기업들의 경영권을 보호하기 위한 다양한 제도 도입이 시급하다는 주장도 함께 제기됐다.
24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교육회관에서 열린 ‘행동주의 펀드의 실상과 재벌정책’ 토론회에서 발제를 맡은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 교수는 “엘리엇은 부동산 개발사업 전체를 볼모로 삼아 고수익을 추구하는 알박기와 다름없다”고 규정했다.
엘리엇과 같은 헤지펀드들은 초기 핵심자산 매각 등을 통해 단기 차익을 극대화하는 ‘기업 사냥꾼’이라고 불렸지만 최근 장기적 관점에서 기업가치를 제고하는 것을 목표로 사업 구조조정 등을 제안하고 미디어를 통해 적극적으로 여론을 형성해 주주 이익을 대변하고 나서면서 '행동주의 펀드'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이에 신 교수는 “행동주의 펀드들의 모태는 기업사냥꾼 출신으로 다수의 주식을 매입해서 회사를 쪼개파는 식으로 수익을 올렸지만 최근에는 큰 기업을 사냥하려다 보니까 자본이 부족하게 됐다”면서 “그래서 찾은 방법이 바로 포퓰리즘”이라고 지적했다.
행동주의 펀드들은 이사회 발언권을 확보할 수 있을 정도의 소액주주로 참여해서 자신들이 이익을 낼 수 있는 방안을 설명하면서 다수표를 끌어들이는 방식을 활용한다. 엘리엇 역시 국내 반(反)재벌 정서에 호소하며 적극적인 여론전을 펼치고 있다.
그는 “포퓰리즘은 겉으로는 다수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포장해서 대중의 정서를 파고들어 지지를 이끌어내지만 실제로는 특정 집단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에 불과하다”면서 “엘리엇은 그 중에서도 가장 극단적인 집단으로 일반인들이 상상치 못하는 방법을 동원해 '국제 알박기 펀드'라는 말을 붙일 수 있을 정도”라고 했다.
행동주의 펀드들의 공격으로 기업들이 받는 가장 큰 피해는 바로 투자 위축이다.
해외투자자들에게 높은 배당을 요구받고 경영권 방어에만 온 신경을 집중하다보니 투자여력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이에 따라 기업의 미래 성장성이 불투명해지고 주식투자자들도 장기적으로 손해를 볼 가능성이 커졌다.
신 교수는 “다른 행동주의 펀드들과 마찬가지로 엘리엇도 가장 먼저 현금 자산의 배당을 요구하고 있지만 배당을 통해 반짝 주가를 끌어올릴 수는 있어도 장기적으로 지속적인 가치 상승을 가져오는 사례는 없다”면서 "프랑스 미디어 그룹 비벤디(Vivendi)에 현금성 자산 60%에 해당하는 90억유로 배당을 요구했던 미국 행동주의 펀드 PSAM의 사례가 대표적"이라고 소개했다.
이날 토론회 참석자들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차등의결권 제도나 포이즌필 도입 등 정책적인 보완도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특히 상법에서 강행법규로 규정하고 있는 '1주 1의결권' 제도에 대한 불합리성을 한 목소리로 지적했다. 프랑스, 네덜란드, 스웨덴 등 유럽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국가가 복수의결권을 채택하고 있고 미국 역시 차등의결권과 복수의결권을 모두 인정하고 있다.
신 교수는 "금융투기자본이 외치는 스탠다드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투기자본들이 마음껏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된 반면, 한국 기업들의 손발은 묶여있다”면서 “갑자기 들어와서 주식을 산 사람들 보다는 장기간 회사 주식을 보유한 주주들에게 의결권을 더 많이 부여하는 차등의결권 제도처럼 기본적인 경영권을 방어할 수 있는 제도가 있어야 이를 기반으로 장기 투자를 할 수 있는 여력이 생긴다"고 했다.
세계 최대 인터넷 업체인 구글의 경우 창업자인 세르게인 브린과 래리 페이지의 지분율은 21.5%에 불과하지만 의결권 비율은 73.3%에 이른다. 래리페이지는 이를 비판하는 투자자들에게 “차등의결권은 단기 이익을 쫓는 월스트리트식 경영간섭에 제한받지 않고 장기적인 기업전략의 수립 및 경영을 가능하게 한다. 이것이 싫다면 구글에 투자하지 말라”고 얘기하기도 했다. 뉴욕타임즈의 경우 슐츠버그재단이 0.6%의 지분으로 100%의 의결권을 행사하는 이른바 ‘황금주’를 인정해주고 있다.
그는 “한국은 전세계에서도 가장 강력한 재벌정책과 공정거래법을 시행하고 있는 나라”라면서 “또 OECD 국가에서 상속세가 두 번째로 높고 재단을 통한 승계도 거의 불가능한, 경영승계에도 가장 적대적인 제도를 가지고 있다"고 평했다.
이어 "엘리엇의 삼성물산 공격 같은 사건들이 계속 벌어지면 기업들이 투자 의지가 꺾인다”면서 “재벌정책도 전반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며 이상적인 잣대를 버리고 전 세계 기업들의 운영사례를 참고 삼아 현실적인 기업관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날 참석한 토론자 대다수도 발제자인 신 교수와 같은 맥락의 의견을 제시했다. 글로벌 자본주의 환경 하에서 국내 기업들이 엘리엇과 같은 투기자본에 노출된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국부 유출의 우려도 커졌지만 이에 대응하는 제도적 방안은 아직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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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근 건국대 금융IT학과 특임교수는 “소버린, 헤르메스, 아이칸의 예처럼 투기자본은 대주주의 전횡에 대한 소액주주의 이익보호를 내세우지만 종국에는 막대한 이익을 챙겨서 떠났다”면서 “만연해있는 반기업·반재벌 정서에 편승해 소액주주 보호를 명분으로 지배구조 개선이 아닌 투기자본의 힘을 빌리다가는 국부유출과 기업투자 위축을 불러올 것”이라고 말했다.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엘리엇이 주주제안을 통해 배당이 가능하도록 요구한 현물이란 8조원이 넘는 가치를 가진 삼성전자 주식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엘리엇의 목적은 먹튀, 그 이상일 것”이라면서 “다수의 헤지펀드가 한국 기업을 난타해오고 있음에도 우리 법률은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지 않는 규정을 고집하고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