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신이 본 삼성 신경영 20년 명암

일반입력 :2013/06/07 10:30

출발은 1938년 이병철 회장이 세운 '삼성상회'였다. 전국에서 소비되는 건어물, 곡물 매매와 국수 장사부터 시작했다. 당시 사업이 잘 풀려 1948년 차린 '삼성물산공사'는 북한 공산군 남침으로 단명했다. 서울에 있던 이 회장의 재산과 삼성물산 창고의 설탕, 면사가 모두 사라졌다. 그는 부산에서 무역업을 재개했다. 오히려 전시상황에 탄력을 받아 손실을 회복하고 삼성물산같은 규모도 되찾았다. 재벌 삼성 시대의 서막이었다.

삼성전자가 휴대폰시장 이익 점유율과 스마트폰 플랫폼 시장 지분을 애플과 양분하며 세계 IT업계 이목을 집중시키자 그 업력에 대한 관심도 고조됐다. 75년전 '삼성상회'에서 해산물을 팔던 시절부터 반도체를 비롯한 부품과 스마트기기 중심의 IT기업으로의 확장, 그간의 경영권 승계 과정, 성장의 이면에 있었던 위법, 탈법행위 일부가 외국서 주목을 받았다.

지난 1일 온라인 IT미디어 테크크런치는 스마트폰, TV, 냉장고, 전자레인지같은 소비자가전들이 삼성으로하여금 세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만들었지만 이런 것들은 삼성이 밟아온 성공가도의 단면만을 보여준다며 삼성전자의 역사를 소개했다. 올해 20년을 맞은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 선언' 일화가 함께 언급됐다.

신경영 선언에 따른 자성을 통해서일까. 오늘날 삼성전자와 삼성그룹은 진정한 대규모 조직으로 성장했다. 외국 미디어들이 보기에 삼성전자가 모바일과 소비자가전업계 선두로 치고 올라온 전제조건으로 경영성과와 사업활동 자체에 대한 것이 충분한지 의문이 따르는 모양새다.

테크크런치는 막대한 생산력과 속도 및 효율에 대한 집념, 경영자에게서 언뜻 비치는 광기, 삼성이 관여한 거의 모든 산업을 독점하기 위해 기꺼이 발휘하는 의지라며 삼성에게 이는 거물이 되기 위한 근력을 키워주는 일들이었고, 결국 삼성은 무자비함과 실리를 추구하는 것 사이의 적정선을 통달한 듯하다고 표현했다.

■소비자가전 수요 예견-대외 의존도 줄이기

외신의 눈에 우리나라의 재벌이라는 관습적 기업지배구조는 '흥미로운 것'으로 비친다. 제너럴일렉트릭(GE)이나 듀퐁(Dupont)과 완전히 다르진 않지만, 회장 일가의 구성원이란 경계에 경영권과 관련 이익을 집중시킨 점이 크게 다르다는 지적이다. 이는 삼성이 '록펠러그룹'같은 단순 혈연중심 지배구조 이상으로 광범위한 사회경제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권력은 회사 이전에 그 수장에게 모였다. 이건희 현 삼성전자 회장이 이병철 선대 회장의 4남6녀 가운데 그 '왕좌'를 물려받은 두드러진 인재로 묘사됐다. 그는 일본 명문 와세다대학 경제학과, 미국 조지워싱턴 MBA과정을 마치고 1968년 공식적으로 삼성 재벌가에 합류했다. 이듬해인 1969년 삼성전자가 설립됐다.

삼성전자 초기 제품은 저가형 소비자가전이었다. 일본 산요와의 합작사 조립공장에서 흑백TV를 처음 생산했다. 냉장고, 에어컨, 선풍기 등도 만들었다. 이병철 회장은 소비자가전 시장 수요를 직감하고 생산에 필요한 대부분의 부품을 소니가 있는 일본 등 외국서 수입에 의존하는 상황을 해결해야 했다. 부품제조업과 소비자가전이 주춤했던 1974년 한국반도체를 사들인 배경이다. 이 때 경영진의 의견이 단결되지 않아 당시 이건희 삼성 이사의 사재를 동원했다.

이에 대해 로이터가 삼성이 훗날 세계 최고 메모리칩 제조사업으로 성장하는 한국반도체를 인수했다고 쓰는 등 외신들은 인수후 삼성반도체로 바뀐 회사에 투자했던 이병철-이건희 부자의 선택이 향후 수십년간 반도체사업의 성과를 톡톡히 회수했음을 높이 샀다. 하지만 이후에도 삼성은 값싼 수출용 흑백과 컬러TV 등 소비자가전 종류를 늘리며 몸집을 키웠다. 1980년대 한국에서 삼성그룹이 유력한 재벌로 성장했지만 세계시장에선 품질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이병철 회장에겐 이를 해결할 시간이 충분치 않았다.

■유교 가부장제 덕본 이건희 회장

1987년 11월 20일, 이병철 회장이 타계했다. 2년전 진단받은 폐암이 원인이었다. 2주 뒤, 가장 젊은 아들 이건희가 삼성그룹의 2대 회장 자리를 물려받았다. 이 회장의 맏딸 이인희가 상속자로 지목되지 않은 이유는 그가 아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묘사하는 외신의 시각이 흥미롭다.

테크크런치는 이병철 회장은 그의 맏딸 이인희를 총애했고 그의 측근에게 이인희가 아들로 태어났다면 그가 상속자의 지위를 물려받았을 것이라 말한걸로 알려졌다며 유교중심의 가부장제는 재벌체제 권력구조의 특징이었고 결과적으로 이건희가 이병철 회장의 최종 상속자가 될 것이란 뜻이었다고 썼다.

이건희 신임 회장은 취임후 그룹의 번영에 주력했다. 1992년 DRAM메모리칩 수요 확장으로 이병철-이건희 부자가 사들인 삼성반도체가 업계 선두로 뛰어올랐다. 외신들은 이 타이밍에 삼성전자가 반도체 생산라인을 늘려야 했지만, 세계 가전업계의 삼성에 대한 저가제품업체란 인식이 문제였다고 표현했다. 소니같은 업체와 가전시장에서 제대로 붙으려면 반도체 역량부터 다져야 했으나 경험이 일천했다는 지적이다.

이후 이건희 회장은 199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임원들을 불러놓고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며 질적성장을 강조한 '신경영 선언' 이래 제품 '불량'에 완고한 입장을 취하기 시작했다. 연구개발 투자를 2배로 늘렸고 1996년말 윤종용 총괄대표이사를 당시 삼성전자 최고경영자(CEO)로 앉혔다. 이익 창출과 사업적 야망을 강력하게 밀어붙이는 행보로 비쳤다.

비즈니스위크는 이에 대해 이건희 회장이 프랑크푸르트 호텔방에 임원들을 불러놓고 주문한 것은, 매출을 희생하는 한이 있어도 대규모 저가제품 제조사에서 고품질의 생산물을 내놓는 기업으로의 변화였다고 썼다.

■윤종용 체제의 상징 '속도'와 '산탄총'

윤 CEO는 삼성전자의 위기때 방향을 바로잡는데 도움을 준 주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1997년 한국의 재벌들은 외환위기로 막대한 손실에 당면했다. 삼성은 대부분의 채무를 부담하는 것보다 당장의 위기를 피하고 보는 게 낫다고 판단했지만 윤 CEO는 그에 정면으로 맞선 사람이었다. 그는 기업 20억달러치 자산을 매각하며 경영을 정상화시켰다. 물량을 확보할 수 있을 때까지 공장 가동을 일시 중단했다. 비용을 줄이기 위해 자부심을 갖고 일했던 삼성 직원가운데 2만4천명을 해고했다.

윤종용 총괄대표이사는 1966년 사원으로 입사해 1997년 대표이사 부회장까지 올라온 입지전적 인물이다. 외신들은 그의 핵심 경영혁신기조가 '속도'였다고 평가했다. 향후 10년을 내다보고 국면을 타개하려는 노력과 병행해 빠른 성과를 내고 이를 재투자로 연결시키는 체계를 확립했다는 뜻이다. 검증되지 않은 반도체 분야 이전에 타사가 진출한 분야를 파고들어 경쟁자를 제치는 전략을 취했다. 1990년대 중반 첫 생산을 시작하고 몇년만에 선명도, 화면크기, 선명도와 고른 평면 등 품질 요구에 맞춰 막대한 투자를 감행한 TFT-LCD사업이 그 대표 사례로 언급됐다.

그리고 피처폰 시절부터 안드로이드 스마트폰에 이르기까지, 모바일사업부문 전략은 '산탄총'으로 비유되곤 한다. 취향이 다양한 소비자들에게 어느건 하나쯤은 선택될 수 있을 것처럼 다양한 모델을 생산해내는 방식이었다. 이는 유행이 빨리 지나가는 모바일 시장에서 회사가 만드는 제품이 일시적으로 인기를 끌었다가 몇개월 이내에 사라지는 상황을 자연스럽게 조장했다. 그 후속제품이 꾸준히 나오는 한 성공사례를 이을 수는 있었다.

테크크런치는 삼성전자는 선도적인 시장입지를 지켜내기 위해 제품의 유효 수명이 줄어드는 상황을 빠른 개발 속도로 메워내고 있다며 이는 당분간 변치 않을 특기라고 평했다.

■성장의 그림자

삼성의 성장 배경에는 뛰어난 사업적 수완만 있었던게 아닌 것으로 평가된다. 물론 개천에서 용났다는 흔치 않은 성장신화가 중심에 놓여 있지만 재벌 삼성의 '지독한 이면'역시 빼놓을 수 없다는 지적이다. 이건희 회장이 암에 빗댄 '제품'의 불량은 그 하나만의 사례일 뿐이다. 그런데 '기업'의 기질이나 도덕성 차원의 결함은 어떻게 봐야할까.

삼성전자가 직접 개입한 것으로 알려진 일부 위법 사례만 보면 ▲2005년 미국에서 D램 메모리 가격담합에 공모한 혐의로 3억달러 벌금 부과 ▲지난해 3월에는 LG전자, 팬텍같은 휴대폰 제조사들과 함께 가격부풀리기를 통한 보조금지급 행위로 142억8천만원의 과징금을 부과 ▲이후 공정거래위원회 조사방해로 벌금 4억원이 추가 ▲지난해 8월 삼성전자가 애플의 모바일기기 디자인특허 6건을 침해했다고 미국 배심원단이 평결, 이에 루시 고 담당판사는 10억5천만달러 배상금을 선고 ▲1월말 삼성반도체 화성공장에서 불산누출 사고로 협력사 직원 4명이 다치고 1명이 사망한데 이어 5월초 같은 시설 동일 지점에서 또다른 누출사고로 직원 3명이 부상을 당했으나, 그에 회사가 진 책임은 먼젓번 사고에 대해 부과된 벌금 100만원 뿐이었다.

이에 테크크런치는 이들은 삼성전자가 직접 개입한 일부 사례일 뿐, 다른 계열사나 삼성그룹 전사가 책임져야 하는 일들은 더 많다며 해당 사고들을 파렴치한 개인들의 행적으로 치부하긴 쉽지만 이건희 회장 본인도 모범을 보이진 못했다고 지적했다.

■이건희 회장 개인의 도덕성…'IOC 위원 징계' 지금도 유효

삼성 내부 법률고문을 맡았던 김용철 변호사는 회사를 떠나며 자신이 관여했던 모든 부패의 행적을 책으로 남겼다. 지난 2007년 후반 그는 TV 방송을 탄 기자회견장에 나서 삼성과 이건희 회장이 정부 관료들에게 뇌물로 줄 2천억원 규모의 비자금을 조성했다고 주장했다.

이어진 당국의 조사는 그 주장을 입증해주지 않았지만, 이건희 회장은 지난 2008년 1억2천만달러 가량의 탈세혐의로 기소돼 회장직을 내려놨다. 벌금 1천100억원, 징역3년에 집행유예 5년형을 선고받았지만 이명박 대통령에게 2009년말 생애 2번째 특별사면을 받았다. 첫번째는 1996년 8월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과 관련해 그에게 4번에 걸쳐 100억원을 전달한 혐의를 인정받아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은 일에 대해서다. 1997년 김영삼 당시 대통령이 개천절을 맞아 사면 복권한 경제인 23인에 그가 포함됐다.

사면된 이건희 회장은 지난 2010년 3월 삼성 회장으로 돌아와 재벌계 정상이 됐다. 하지만 그의 사면이 의심스러운 IOC 위원으로서의 자질까지 살려주지는 못했다.

당시 IOC윤리위원회는 이건희 회장이 IOC윤리강령에 정한 윤리원칙을 저버렸고 올림픽운동의 명성을 더럽혔다며 올림픽헌장 23.1.1조에 따라 '견책'과 'IOC산하위원회 참가권리 5년간 중지'를 처벌로 부과했다. 이 윤리위원회 권고는 2010년 2월 IOC집행위원회 승인을 받았다. 즉 이건희 회장은 올림픽 정신을 더럽힌 잘못으로 오는 2015년 2월까지 IOC산하위원회 활동을 못 한다.

테크크런치는 그럼에도 이건희 회장과 삼성전자 그리고 삼성그룹 전사는 거의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은 만큼 그 규모 자체가 삼성의 최대 자산이라며 전세계 직원이 수십만명에 달하고 한국 GDP 5분의 1을 차지하는 삼성그룹의 움직임은 정치적, 재정적 측면에서 무엇이든 뜻대로 처리하기에 충분한 조직임을 방증한다고 묘사했다.

이런 삼성의 능력은 뉴욕대학교 사회학과 스티븐 룩스 교수가 말하는 '3차원적 권력'에 해당한다. 3차원적 권력은 문화권력이라고도 표현되는데,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권력자의 이익에 유리한 쪽으로 작용함을 뜻한다. 손가락을 치켜들거나 음모를 꾸미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그 이익에 순응케 만든다는 얘기다.

그 단적인 예는 지난 4월 근로복지공단에서 산업재해로 인정된 일명 '반도체 백혈병'을 둘러싼 정황들이다. 매그나칩반도체 노동자 고 김진기 씨는 백혈병으로 사망후 유족들의 산재다툼 끝에 이를 인정받았다. 당시 근로복지공단에 제안된 역학조사에 참여할 자문위원으로 회사측은 삼성전자건강연구소 부소장 김수근 교수 등 2명을 추천했고 김 씨의 유족은 삼성 백혈병 관련 논문 저자 등 3명이 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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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반도체 백혈병이 공론화된 시점은 지난 2007년 삼성반도체 노동자 고 황유미 씨가 숨을 거둔 뒤다. 삼성측은 황 씨의 백혈병 진단에 회사 책임을 부인해왔다. 근로복지공단도 산재를 승인하지 않았다. 하지만 법원은 지난 2011년 근로복지공단에 황 씨에 대한 산재불승인을 취소하라고 선고했다. 근로복지공단이 항소해 2심이 진행중이며 삼성은 여기에 피고 보조 참가인 자격으로 재판에 참여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황 씨의 아버지 황상기 씨는 딸의 투병기간중 끊이지 않았던 회사 관계자들의 '산재 포기에 따른 보상'을 매개로 한 회유와 주변 지인들의 '삼성과 싸우면 개인이 무조건 진다'는 충고로 갈등이 컸다는 후문이다. 근로복지공단이 삼성반도체 백혈병 산재불승인 취소 판결에 항소한 모습은 마치 삼성반도체 담당 임원이 빙의된 듯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