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에스트로가 찬탄한 ‘미래의 소리’
“오가 부사장에게 알려 주십시오. 우리는 PCM레코더로 카라얀씨가 지휘하는 베를린 필의 연주곡 ‘일 트로바토레’ 녹음에 성공했습니다.”
1977년 쾰른에 있는 소니도이치에서 보내온 텔렉스였다. 소니의 기술연구소장 나카지마박사가 찰즈부르크에 들러 카라얀과 베를린 필이 연습중인 음악을 수록했다는 소식이었다. PCM레코더는 소니가 이제 막 개발한 세계최초의 디지털녹음기기였다.
얼마 후 소니는 도쿄를 방문한 마에스트로에게 이를 직접 들려주기로 했다.
PCM기술은 1초 동안의 음의 흐름을 잘게 나눈 다음 6만5천여 종류의 숫자정보로 만들어 녹음하고 재생하는 원리에 기반한 것이었다.
소니연구소 기술자가 모리타 회장의 저택으로 가 소리재생을 준비했다.
“선생님, 이것이 지금 주목받는 디지털PCM레코더입니다.”
모리타의 설명에 카라얀의 청회색 눈빛이 강하게 반짝였다.
비디오테이프가 조용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카라얀지휘의 서곡에 이어 남성가수의 아름다운 노래가 나왔다. 카라얀이 13년 만에 빈 국립오페라극장 복귀를 기념해 지휘하고 대성공을 거둔 일 트로바토레였다.
“음 훌륭하군.” 카라얀이 낮고 짧게 감탄을 터뜨렸다.
“아날로그보다 훨씬 좋은데.... 이거야 말로 미래의 소리군.”
거장이 디지털음에 대한 진가를 인정하는 순간이었다. PCM레코더가 예민한 주변음까지 녹음하면서 오히려 고객들의 클레임을 받고 있는 상황인 만큼 그의 한마디는 CD확산에 천군만마격이었다.
실제로 이후 카라얀은 CD발표회 등에서 직접 성능을 소개하는 등 CD확산에 커다란 역할을 한다.
■마법의 디스크의 더 작고, 더 깨끗한 음
1976년 소니연구소 개발팀이 LP레코드와 같은 직경 30cm 크기의 음악용 레이저디스크를만들었다. 디지털사운드를 13시간 20분이나 녹음할 수 있었다. “기술을 위한 기술에 지나지 않는 어리석은 결과물일 뿐일세.”
오가 부사장은 이 연구팀의 성과물에 대해 일언지하에 딱지를 놓아 버렸다.
이때 멀리 네덜란드에서 텔렉스가 날아들었다.
“당신께 긴히 할 얘기가 있습니다. 유럽에 오시면 꼭 저희 회사데 들러 주십시오.기다리겠습니다.”
카세트테이프의 통일규격을 개발할 때 라이벌인 필립스의 기술개발본부장 오텐스였다. 오가는 즉시 필립스본사로 날아갔다.
“이 오디오 디스크의 직경은 11.5cm입니다. 여기에 디지털음이 어느 정도 녹음될지 아십니까?
“적어도 한시간은 들어가겠군요.”
“그렇습니다. 이 작은 디스크가 LP와 같은 용량인 셈이지요.”
소니와 필립스 간의 차이는 30cm와 11.5cm라는 차이 밖에 없는 셈이었다.
“미스터 오가, 우리는 이것을 컴팩트디스크라고 부릅니다. 어떻소 같이 해보지 않겠습니까?”
오가 부사장에게 “이거야 말로 미래의 소리”라고 한 카라얀의 감탄의 목소리가 귓가에 살아나고 있었다. 뛰어난 음질에 크기가 기존 LP의 3분의 1밖에 안되는 CD로 음질을 즐기기 위해 레코드점을 찾는 이들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CBS소니 사장인 오가 노리오에게는 이 혁명적 음반이 가져올 막대한 시장의 가능성이 더욱 뚜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음반혁명 주도권 공방
1979년 9월부터 1980년 6월까지 두 회사 엔지니어들이 도쿄와 네덜란드 아인트호벤을 번갈아 오갔다. 표준규격 회의에서 소니는 디지털녹음으로 구현할 수 있는 최고수준인 16비트를, 필립스는 이미 개발해 놓은 14비트 표준을 주장하며 평행선을 달렸다. 결국 16비트표준으로 낙착됐다.
이제 녹음시간과 CD크기를 정해야 했다.
“그 말도 안되는 규격을 그 친구들이 철회할까?” 소니의 오가 노리오부사장이 말했다.
필립스는 LP레코드와 같은 60분을 적용하려 했고 이 경우 CD의 직경은 11.5cm가 됐다.
“통일규격은 무엇보다도 먼저 베토벤교향곡 9번이 한 장에 반드시 다 들어가야 돼.”
녹음시간 74분. 직경 12cm는 오가 부사장의 지론이었다. 대부분의 교향곡과 대표적인 유명 오페라 1막을 그대로 담을 수 있다는 게 이유였다.
80년 3월 도쿄. 두 회사의 기술진은 긁힌 디스크, 손때 묻은 디스크, 분필가루 묻은 디스크로 각자의 에러정정시스템을 검사했다. 결과는 소니의 우세였다.
80년 6월19일. 도쿄 시바우라의 소니기술연구소 4층 회의실. 이대로 가면 소니가 모든 기술을 독식할 판이었다.
“더이상 참을 수가 없군, 난 가겠소! 우리린 시간과 비트,샘플링 주파수 44.1KHz까지 모두 양보했소.”
격앙된 필립스의 보겔스 기술담당이사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모듈레이션을 양보하는 대신 오류정정은 우리의 주장을 들어주시오. 어떻소, 그러면 공평하지요?”
“좋습니다.싸움은 끝났소“ 나카지마 소장이 화답했다.
1년간 끌어오던 두회사의 지루했던 CD표준이 확립되는 순간이었다. 이는 이어 국제표준이 됐다.
■LP레코드 업계의 거센 반발을 뚫고
“속임수 집어치우시오! 무슨 잠꼬대같은 소리입니까? 고객들이 LP에 만족하고 있는데 왜 이제와서 막대한 투자를 버려 가면서까지 위험한 교체를 해야 한단 말입니까?”
또다른 대표의 반발도 이어졌다.
“소리가 좋다는 건 알겠소. 그러나 그것이 어느 정도 수요로 이어질 것인지에 대해서도 당신들도 전혀 알수 없는 것 아니요?”
1982년 4월26일. 에게해가 보이는 아테네 교외의 애스터팰리스리조트(Astir Palace Resort)호텔. 나흘 간의 일정으로 개최된 레코드업계의 국제총회 IMIC(International Music Industry Conference)행사장에서였다. 소니와 필립스가 공동 개발한 혁명적 음질의 디지털CD와 CD플레이어를 보급하겠다며 시연을 했지만 메이저 음반사의 비난과 반발이 끊이지 않았다.
CD는 레이저광선으로 디스크 정보를 읽어내기에 LP레코드와 턴테이블 바늘에 의한 잡음이 발생시키지 않았다. 게다가 그것은 디지털방식의 깨끗한 원음이었다.
그러나 이 규격을 따를 경우 전세계의 거의 모든 전자메이커들이 소니와 필립스에게 기술사용 허가를 받아야 했다.
소니는 진작부터 이것이 엄청난 기술적 진보이자 대박의 기회임을 알고 있었다.
음반업계의 주장 가운데 “CD의 시장예측을 할 수 없다”는 말은 당시 세계전자업계를 주름잡던 소니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것이었다.
만드는 거의 모든 제품이 모두 이전에는 없었던 것이고, 그러다 보니 시장조사나 수요예측이란 것이 무의미했다. 트랜지스터, 녹음기, 디지털녹음기, 워크맨 등 소니가 만든 비교대상 없는 세계최초의 수많은 전자기기는 베스트셀러가 됐었지만 소니는 항상 이들에 대한 시장수요를 예측하지 못해 왔다.
■디지털음악의 신화를 쏘아올리다.
오가 노리오 부사장은 음반 업계의 반발과 기술적 난관에 맞서기로 했다.
그리스에서 본사로 돌아온 그는 82년 10월 1일 CD와 CD플레이어를 일본시장에서 판매하겠다고 못박아버렸다.
CD플레이어(CDP) 제작까지의 길은 멀었다.
무엇보다도 12cm의 디스크에 입력된 62억4천만비트의 정보를 읽어내려면 회전디스크에서 광선을 조절할 초정밀 반도체레이저가 필요했다. 500개나 들어가는 IC를 소형화하는 것도 난제였다.
직경 30cm인 기존 비디오디스크 스캐너 판독기술은 직경 12cm의 CD판독에는 통하지 않았다. 다행히 샤프가 반도체 레이저를 양산하면서 레이저픽업 조달 문제가 해결됐다.
소니의 기술진은 CDP의 사활을 쥐게 될 IC개발에 들어갔다. 시판 예정일을 3개월 남기고 CDP에 들어가는 약 500개의 IC를 단 3개의 IC로 집약하는데도 성공했다. 말썽이던 CD 불량률 문제도 한달 만에 해결됐다.
1.2mm두께에 무게가 15g에 불과한 CD로 만들어진 기념비적인 CD타이틀 1호는 빌리조엘의 ‘(뉴욕) 52번가’였다.
최초의 CD플레이어 출시에 시장은 크게 흥분했지만 가격이 700달러로 너무 비쌌다. 소니는 CD발매 2년 뒤인 1984년 11월 새로운 CDP D-50을 내놓았다. 첫 제품에 비해 크기가 절반인 모델(D-50)을 3분의 1 가격(4만9천800엔)에 내놓자 바닥이었던 판매실적이 급상승세를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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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은색의 작은 원반이 전세계 레코드점에서 각 가정으로 파고 들기 시작했다. CD는 발매 4년 만에 LP를 추월하면서 화려한 CD시대를 연다. 도쿄필하모니를 지휘할 수준의 음악가이자 거장 카라얀과 깊은 교유관계였던 오가 노리오만이 할 수 있었던 일일지도 몰랐다.
이후 CD는 2000년 MP3P가 유행하기 시작할 때까지 전세계 음악애호가들의 마음을 마법과 같은 힘으로 사로 잡았다.<목요연재>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