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BM컴퓨터의 운명이 걸린 체스게임
1997년 5월 7일 뉴욕 맨해튼 51번가. 마천루 사이로 치솟은 에퀴터블 센터 35층.
취임한 지 4년 째인 루 거스너 IBM 회장이 뜨거운 열기로 가득찬 ‘전투상황실’로 들어섰다.
온갖 조명과 스위치,패널이 가득차 있는 그곳은 TV스튜디오가 별도로 꾸며져 있는 곳이었다.
카리스마가 철철 넘치는 거스너가 들어섰지만 아무도 그를 주시하지 않았다.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인간과 컴퓨터 간에 세기의 체스대결 6번기가 진행되고 있었다.
마호가니 책상과 회전의자가 있던 자리에 체스판이 놓여있었다. 빙 둘러 선 IBM맨들은 지금 IBM의 슈퍼컴인 딥블루(DeepBlue)와 인간의 전투상황을 뚫어져라 지켜보고 있었다.
이들은 연신 사무실 건너편의 대형스크린을 바라보며 한수 한수를 마치 자신의 대국인 양 집중해 분석하고 있었다.
스튜디오 건너편 공간에서 있는 또 다른 스크린에 파란 자켓에 회색 바지를 입고 체스판 주위를 서성이는 사나이가 비쳐지고 있었다.
올해 34세인 그의 이름은 게리 카스파로프. 세계 체스계를 주름잡고 있는 불세출의 천재였다. 체스신동으로 불리던 그는 22세때인 1985년 세계 최연소 체스챔피언이 된 인물이었다.
전세계에서 수백만명이 땀을 쥐고 인터넷으로 생중계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의 관심은 “과연 기계의 지능이 인간의 그것을 넘어설 것인가”를 확인시켜 줄 이 대국에 쏠려 있었다.
하지만 루 거스너 IBM회장에게는 이 행사가 각별한 또다른 이유가 있었다.
대국료와 대국장 마련은 물론 홍보와 인터넷 생중계 등 IBM의 모든 행사 지원은 딥블루가 가져올 영향력을 계산한 것이었다.
인터넷은 전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IBM 슈퍼컴 딥블루의 녹슬지 않은 위력을 생중계하고 있었다. 최근 돌풍을 일으키며 덜컥 PC1위로 올라선 컴팩에 대한 관심 돌리기 효과도 그만하면 충분했다.
딥블루가 지더라도 상관없다. 인간, 그것도 체스천재가 기계를 이긴다면 당연시될 터니까.
하지만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거스너 회장과 IBM연구원들은 딥블루의 승리를 갈망했다.
■이제는 단판 승부···양측 모두 초조해지다
챔피언 게리 카스파로프는 1국에서 승리했지만 2국에서 우위를 지키지 못하고 패했다. 이어진 3,4국도 우위를 지키지 못한 채 무승부로 5국째를 맞이했다. 대국 내내 그의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사람들은 챔피언보다 딥블루에 열광하고 있었다.
비록 막상막하의 승부였지만 이 ‘지능있는’ 컴퓨터가 체스천재를 상대로 펼치는 놀라운 전과에 갈채를 보내고 있었다.
총 6번기로 치러지는 이 대국이 챔피언의 승리로 끝난다면 그건 당연한 일이 될 것이었다. 11세부터 체
스신동 소리를 들으며 세계 체스계의 최고봉에 올라선 그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불과 1년 전에 등장한 딥블루가 챔피언을 이긴다면 지극히 놀라운 뉴스가 될 터였다. 그건 마치 인간이 개를 문“것 처럼 화제를 뿌릴 것이었다.
챔피언은 지난 해 딥블루를 4대 2로 물리친 적이 있었다. 하지만 IBM사람들은 이를 업그레이드해 내부에서는 '디퍼블루(Deeper Blue)‘로 부르고 있었다.
시합 전 챔피언은 딥블루의 성향 분석을 위해 기보를 요청했으나 거부당했다. 그는 딥블루의 수준과 성향을 파악할 수 없었다.
신경이 과민해진 탓이었을까? 그는 2국에서는 딥블루의 뒤에서 뭔가 생각하는 존재가 숨어서 조종하는 것 같은 느낌까지 받았다. 혹 IBM의 딥블루 프로젝트 고문을 맡고 있는 그랜드 마스터 벤자민은 아닐까?
IBM 측은 1국의 결과를 반영해 프로그램을 보강한 결과라고 설명했지만 웬지 떨떠름했다.
챔피언은 지난해 첫판을 지면서 시작했지만 결국 4대2로 승리한 것을 떠올리며 게임에 집중했다.
거스너회장이 도착했을 때 딥 블루는 불리한 상황에 빠져있었다.
챔피언은 과감하게 졸을 희생시키며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분위기가 긴장되기 시작했다. 양쪽은 끝까지 팽팽히 맞섰으나 4국에 이어 5국도 무승부로 끝났다. 이제 승부는 마지막 한판에 달렸다. 딥블루팀도 걱정에 휩싸였다.
■기계가 인간을 외통수로 넘어뜨리다.
5월 11일 또다시 뉴욕 에쿼터블 빌딩 35층. 오후 3시부터 기계와 인간의 ‘세기의 체스대결’ 최종국인 6번국이 시작됐다. 이 한판에 모든 것이 달려 있었다.
이전의 대국들과 달리 흑으로 두게 돼 선번(先番)을 빼앗긴 챔피언은 맨 앞줄의 졸(pawn)을 움직이는 케이로-칸디펜스(Caro-Kann Defense)라는 수비형 포석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7번째 수가 두어졌을 때 분위기가 급반전됐다.
‘체스 사상 가장 논리적인 기사’라는 그에게서 이해할 수 없는 실수가 나왔다.
그러자 백을 쥔 딥블루가 나이트(knight)를 버리고 졸(pawn)을 취했다. 카스파로프는 캐슬(castle)로 왕을 지킬 능력을 잃었다.
해설자인 에세르 세이라완 그랜드마스터는 “챔피언이 다른 체스대국을 설명하면서 문제라고 지적했던 국면을 스스로 연출했다”며 안타까워 했다.
이 시점에서 챔피언은 극적인 행마의 변화를 시도했지만 소용없었다. 이는 딥블루에겐 유리한 흐름으로 이어졌다. 대국이 시작된 지 1시간 만에 백을 쥔 딥블루의 결정적 공격이 나왔다. 딥블루의 다음 수는 퀸의 공격이었다. 외통수(checkmate)였다.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던 ‘살아있는 체스의 전설’은 결국 19수만에 백기를 들고 말았다.
그랜드마스터는 건너편에 있는 펭슝수 교수에게 손을 들어 패배를 표시했다.
마지막 대국은 1시간도 되지 않아 끝났다. 이는 카스파로프의 체스시합 사상 최단시간 내에 패배한 기록이었다. 또한 현역 세계 체스챔피언이 토너먼트 방식의 정식규정 시합에서 컴퓨터에게 패한 최초의 사례이기도 했다.
“이렇게 되리라고는 결코 예상하지 못했는데....”
해설자 에세르 세이라완 그랜드마스터는 “우리는 체스의 이정표가 되는 사건을 지켜봤다”며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생각하는 기계와 인간의 대결시대 끝나다
“이겼다.”
세기의 체스대결이 딥블루의 승리로 끝나자 카네기 멜론대교수 출신의 개발자 펭슝 수와 캠벨은 환호했다. IBM은 1989년 딥블루의 원형 ‘딥쏘우트(Deep Thought)’를 개발한 이들을 영입, 체스컴퓨터의 업그레이드에 매달려 왔다. 그런 만큼 이번 성공은 남달랐다.
프로그래머들은 체스게임에 강한 컴퓨터를 만들기 위해 한정된 시간동안 모든 수를 최대한 많이 보기에 효율적인 알고리듬을 사용했다.
말그대로 ‘짙은 푸른색’의 딥블루는 연산속도 11.38기가플롭스의 무게 1.4톤짜리 대형컴퓨터였다. 30개의 120MHz CPU,480개의 VLSI칩이 내장됐다.
딥블루는 1년 전에 비해 성능이 배가돼 초당 2억번이나 체스말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또 보통 6~8수, 최고 20수 이상을 내다보는 수읽기를 자랑했다. 그랜드마스터들의 대국 900국을 완전히 소화해 담고 있기도 했다. 챔피언 게리 카스파로프는 초당 2가지 경우의 수를 생각할 수 있었다.
세기의 체스대결 승리 이후 딥블루는 더 이상 평범한 컴퓨터가 아니었다. 속도로는 세계 슈퍼컴 랭킹 259위에 불과했지만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슈퍼컴이 됐다. 200만달러짜리 딥블루는 수십억달러의 몸값효과를 가져왔다.
사람들은 1949년 이래 컴퓨터의 선구자 앨런 튜링이 추구해 오던 ‘생각하는 기계(Thinking Machine)'를 실현했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딥블루는 빈사상태의 IBM메인프레임 사업부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할 서광을 비쳐 주었다.
이후 딥블루 성능을 포팅한 대형컴퓨터 기종(RS/6000)은 산업계에서 가장 필요한 대형컴퓨터의 대명사가 된다. 이는 확실히 1994년 초 빈사상태였던 IBM살리기에 나선 루 거스너 CEO에게도 도움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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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에도 인간과 컴퓨터의 체스게임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지만 기계가 점점 인간을 압도하는 양상이다. 카스파로프는 2003년 딥주니어에게 3대3으로 비겼고, 그의 제자 크람릭은 2006년 독일 체스프로그램 딥프리츠에게 0승2패 4무승부로 지고 만다.
일각에서는 지난 2005년 체스전용 컴퓨터 히드라가 세계 7위의 그랜드마스터 마이크 아담스를 물리친 것을 기계와 인간의 컴퓨터 대결시대의 종언으로 보기도 한다. <목요연재>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