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렉에서 따 온 컴퓨터 이름 ‘알테어’
“당신들 사기치는 거 아냐, 내돈을 돌려주지도 않고 말야!”
1976년 초 어느 날. 미국 뉴멕시코 앨버쿼키. MITS란 회사에 화난 목소리의 전화가 걸려왔다. ‘1년도 더 전에’ 물건대금으로 1천달러 이상의 돈을 보냈는데 왜 제품이 아직 안오냐는 독촉이었다.
'앨버쿼키의 천재’라는 창업자 에드 로버츠의 친구이자 이사인 에디 커리가 말했다.
“좋습니다. 당장 이름을 알려주시죠. 대금에 즉시 이자를 붙여서 돌려주라고 경리부에 지시하겠습니다.”
그러자 그 남자는 즉시 태도를 180도 바꾸어 “어이구, 아니예요. 그걸 바라는 건 아니구요”라고 물러섰다.
물론 그가 원한 것은 ‘자신의 기기’였다.
사나이가 말하는 기기란 ‘알테어8800’컴퓨터였다.
1년 전인 1975년 '파퓰러일렉트로닉스‘지 1월호가 50만권이나 팔리는 대히트를 치는 '사건'이 있었다. 모든 미국 컴퓨터마니아들의 눈을 번쩍 뜨게 한 것은 바로 이 잡지표지에 실린 알테어8800의 사진과 광고였다.
사실 에드 로버츠는 잡지 편집장 레스 솔로몬의 성화에 못이겨 회사 주소, 그리고 기본적인 이 개인용컴퓨터조립키트를 397달러에 판다는 광고를 기사와 함께 실었다.
그것은 오븐크기의 푸른색칠을 한 매혹적인 작은 컴퓨터였다. 전면 판에 조그만 스위치와 2줄의 빨간 발광다이오드가 붙어있었다.
로버츠와 조수 빌 예이츠가 해설기사를 썼다. 설계대로라면 작동은 하겠지만 사실 잡지에 실린 것은 대충 급조한 것을 찍은 사진이었다.
배송일 저녁 에드의 딸이 인기 TV프로 ‘스타트렉’에서 우주선 엔터프라이즈가 멋진 별 알테어에 착륙하는 것을 봤다고 말했다. 에드는 거기서 이름을 딴 제품과 관련기사를 잡지사에 보냈다.
잡지가 나오는 날 파산을 걱정했던 그의 회사 전화통은 주문이 폭주하면서 하루종일 불이날 정도로 울려댔다. 그것은 조악하기 짝이 없었지만 개인용PC에 대한 목마름을 여실히 반영하는 것이었다.
■워즈니악, 알테어에 자극받아 컴퓨터를 만들다
알테어에는 아직 제대로 숨결이 불어넣어져 있다고는 할 수 없었다. 인텔8080 CPU를 사용하고 있다고는 하나 이 기계가 사용자와 교류하는 유일한 방법은 전면의 깜빡이는 불빛뿐이었다. 그것은 깜빡이는 LED박힌 상자에 불과했다.
실제적 용도를 말하자면 이 기계는 장님,벙어리,귀머거리였다. 마치 모든 신체기능의 마비된 채 뇌만 멀쩡한 사람같았다.
여기에 제대로 생명을 불어넣은 것은 빌게이츠와 폴앨런이었다. 잡지를 보고 급히 달려온 빌 게이츠와 폴 앨런은 베이직으로 프로그램을 만들어 텔레타이프에 연결했다. 사람들이 모여있는 가운데 ‘준비(Ready)’라는 단어가 출력돼 나와 모두를 놀라게 했다.
사용자가 알테어로 무엇을 할지는 결국 그들의 설계 및 조작능력에 달려있었다. 그랬다. 이것은 오로지 컴퓨터마니아들만이 손댈 수 있는 수준의 퍼스널 컴퓨터였다. 이제 샌프란시스코지역에서 자란 천재 워즈니악의 차례였다.
“1975년 6월 29일 일요일. 그 때 나는 그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몰랐다. 역사상 처음으로 키보드로 글자를 쳐서 눈앞의 스크린에 띄우는 일이 얼마나 획기적인 일이었는지.”
애플I은 실리콘밸리 부근 매장에서, 또는 우편주문으로 666달러 66센트에 팔렸다.
지금은 아무 것도 아니지만 당시만 해도 일반자판으로 프로그램을 타이핑하면 그것이 스크린 위로 둥둥떠다니는 컴퓨터는 없었다. 애플I은 그 첫번째 컴퓨터였다.
워즈는 애플I 기종을 통해 컴퓨터에 최초로 키보드와 디스플레이를 부여했던 감격을 그렇게 회고했다. 하지만 거기서 멈추고 있지 않았다.
워즈니악은 이 설계가 끝나자 마자 그 해 하반기 내내 애플II 설계에 전력했다.
그가 HP에 개발사실을 보고했어도 회사는 무신경하게 넘어갔다. 다행이었다. 그는 칩에 색을 구현하고 텍스트와 그래픽을 시스템 자체 메모리에서 구현되도록 컴퓨터를 아주 새롭게 설계했다.
이렇게 해서 나온 애플II는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도 사용할 수 있는, 최초의 저렴한 컴퓨터가 되었다.
■‘2인의 스티브’와 인텔에서 온 경영자 실리콘밸리의 유명한 벤처캐피털 세콰이어의 창립자 돈 밸런타인은 전화공세에 시달리고 있었다. 쿠퍼티노의 비쩍 마른 청바지입은 히피가 들러붙어 “정 싫다면 다른 후원자라도 추천해 달라”고 떼쓰고 있었다.
마지 못해 추천한 인물 가운데 한사람이 인텔 마케팅사업부 출신의 마이크 마쿨라였다. 이미 사업 밑천으로 워즈는 HP-65계산기를, 잡스는 승용차까지 팔아치운 터였다.
애플컴퓨터를 개발한 2인의 스티브는 향후 사업에서 가장 절실한 것이 투자와 함께 경영경험이란 걸 알고 있었다.
마쿨라가 잡스의 차고로 찾아갔다. 둘은 소형컴퓨터를 만든다고 했다. 잡스는 가정과 회사에 자기들의 컴퓨터를 팔아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열변을 토했다. 공감하는 바였다. 짜릿한 기능의 칩을 장착한 컴퓨터가 자신들을 돈방석에 앉혀 주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 때부터 마쿨라는 잡스의 차고를 드나들었다.
하지만 그의 사업계획을 들은 친구는 펄쩍 뛰었다.
“미친 게 분명해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10억달러 규모의 회사를 세우겠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인텔보다 규모가 크잖아? 저 친구 정말 돌았군.”
하지만 마쿨라는 애플을 5년이내 포춘지 선정 500대기업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고 확신했다. .
그는 9만1천달러를 현금으로 투자해 애플창업 초기에 가장 많은 돈을 투자한 벤처캐피털리스트가 됐다. 게다가 25만 달러를 은행신용보증으로 추가했다.
마쿨라가 내건 가장 큰 조건은 워즈니악이 애플의 정식 직원이 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록히드사 미사일디자이너의 아들 워즈니악은 결국 재직중인 HP에 사직서를 냈다.
3명의 창업멤버는 회사지분을 3등분했다. 이어 1977년 3월 1일 마쿨라의 수영장에 모여 정식 주식회사 전환 서류에 서명했다.
애플 초창기에 마쿨라를 영입하고, 그의 조언에 따른 것은 결과적으로 이들이 한 일 가운데 가장 잘한 일이었다. 이로써 잡스도 워즈니악이 만든 해커 차원의 컴퓨터를 실용적 보급에 이르도록 바꿔놓는 데 일익을 담당한 사람이 됐다.
■해커영역의 컴퓨터가 일반에게
1977년 4월 16일 화창한 날씨 속의 샌프란시스코 시빅센터 앞. 제 1회 웨스트코스터컴퓨터전시회가 개막됐다. 아침부터 사람들이 꾸역꾸역 몰리더니 수천명의 사람들이 건물 양쪽벽을 구불구불 돌아 끝에서 끝까지 다섯줄이나 만들고 서 있었다. 말쑥한 셔츠에서 캐주얼, 넥타이부대까지 가세한 그야말로 각양각색의 모습이었다.
그토록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했음에도 아무도 화내지 않았어요. 사람들은 그냥 쭈욱 줄을 선 채 ‘알테어를 가지고 계신다구요,근사한데요?’ ‘이 문제를 풀었어요?’등의 대화를 즐겼죠. 서로가 누구에게도 큰소리를 내는 법이 없었어요.”
행사 주최측은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이 행사에 참여해 관심과 함께 호기심을 나눈 데 대해 놀라워했다.
전시장 안으로 들어가자 사방이 기묘한 기계음으로 꽉 차있었고 프린터의 철커덕 소리, 여러컴퓨터에서 조그만 소리로 연주하는 선율 등이 뒤범벅되어 있었다. 하지만 입구근처 가장 좋은 자리에는 미래의 컴퓨터주역인 애플II가 커다란 디스플레이 모니터에 만화같은 비디오그래픽 프로그램을 띄우고 있었다. 애플이 처음 대중에게 소개한 애플II의 판매가격은 1천298달러였다.
오전 10시 박람회장의 문이 열렸고 거의 200개에 이르는 모든 부스가 발디딜틈없이 꽉 찼다. 애플 부스앞에 모인 관람객들은 난생 처음보는 멋진 퍼스널컴퓨터를 눈앞에서 구경할 수 있었다.
부스 안내직원들이 컴퓨터케이스를 열자 아무도 꿈도 꾸지 못했던 마더보드를 볼 수 있었다. 62개의 칩과 집적회로를 하나의 보드에 넣은 것은 진풍경이었다.
애플II를 가동하자 대형화면에 역동적인 이미지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이것이 과연 이 작은 컴퓨터에서 구현한 것이란 말인가! 정장차림의 스티브 잡스가 대형컴퓨터를 숨겨두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부스 뒤켠 장막을 계속 걷어 올렸다.
고2년생인 애플 프로그래머 에스피노사는 “박람회가 끝나고 우리가 애플뿐 아니라 컴퓨터산업전체를 위해 굉장한 일을 해냈다는 생각에 무척기뻤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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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사실이었다. 이 행사야 말로 해커들의 전유물이었던 컴퓨터가 일반인에게 다가간 최초의 전시회였기 때문이었다. 애플II가 일반인도 쓸 수 있는 최초의 본격적인 저가 컴퓨터였기 때문이다.
애플의 창업자인 두 스티브는 IBM 사제단의 컴퓨터를 대중화해 일반인들도 쓸 수 있게 한 공로로 20대 초반에 백만장자가 됐다. 대중들은 그들에게 납득할 만한 보답을 한 셈이었다. 마쿨라는 옳았다. <목요연재>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