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니그마를 풀어라
에니그마(수수께끼)를 풀어라.”
1939년 9월 4일 영국이 독일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고 난 다음날 런던북쪽 64km 지점. 이른바 블레츨리 파크에는 전국 각지의 괴짜 수재들이 모여들었다.
이집트학자, 십자말풀이 전문가, 체스챔피언 등이 영국 전역에서 모였다. 영국정부의 암호해독팀(GCCS)이 독일군의 암호 에니그마를 풀어낼 국가적 프로젝트를 위해 특별 선발한 두뇌그룹인 셈이었다.
독일은 사흘 전 폴란드를 침공했다. 폴란드의 함락은 몇주일도 안 걸렸다. 이듬 해 영국군의 상황은 점점더 급박해졌다. 작전수행의 최대 골칫거리는 독일의 U보트였다. 대서양을 건너오는 미국상선들이 U보트에 의해 여지없이 격침되면서 아우성이었다.
“암호를 풀어내지 못하면 영국국민의 보급물자와 식량이 배와 함께 가라앉는다.”
1940년 3월 18일 멤버중 가장 젊은 청년 주도로 만들어진 에니그마 메커니즘을 부분적으로 모방한 기계가 소개됐다.
기계의 이름은 '봄베(Bombe)'. 시간당 1만7576가지의 가능한 암호조합을 20분 안에 잡아 낼 수 있었다. 사람키 높이의 커다란 냉장고를 연상시키는 무게 1톤짜리의 이 기기는 108개의 드럼과 톱니바퀴,펀치테이프, 전기회로 등으로 이뤄졌다. 이듬 해 2호기가 설치되면서 그 해에만 178개의 독일 암호 메시지를 해독해 냈다.
설계의 주역인 이 청년은 4년전 22세의 나이로 독일의 저명 수학자 다비드 힐베르트가 낸 20세기사상 가장 중요한 문제라는 수학을 풀어낸 바 있었다. 그는 '가상의 기계'를 이용해 이 문제가 제시하는 참과 거짓을 증명할 해법을 내놓았다. .
■컬로서스의 등장
1912년생인 청년의 이름은 앨런 튜링. 20세기 후반 급속히 퍼진 컴퓨터에 대한 선구적 업적, 그리고 비극적 죽음으로 가장 위대하다던 그 수학자보다 더욱 유명해질 인물이었다.
1942년 2월 그에게 새로운 임무가 떨어졌다. 독일 해군이 암호체계를 바꿔버린 것이었다.
기존 암호해독기는 무용지물이 됐다. 공군은 대잠수함 작전을 할 만한 충분한 성능의 레이더를 갖추지 못해 조바심했다. 지난해 말 진주만 기습을 받고 참전을 선언한 미국도 마찬가지였다.독일 U보트들은 이제 ‘두 번째 해피타임’이라고 알려진 시기를 맞아 연합군 배들은 마음껏 침몰시키면서 활개치고 다녔다. 한시가 급했다.
“드디어...풀었다!” 1943년 12월 정부의 전폭적 지지 속에 1년여만에 만들어진 새 암호해독기를 만든 팀은 환호했다. 튜링이 맥스 뉴먼교수와 설계한 새 기기가 독일군의 새 암호체계를 해독해 낸 것이다. 제작을 맡은 토미플라워스도 기쁨을 함께 했다.
처칠의 명령으로 극비사항에 묶여 있다가 1976년에야 그 존재가 드러난 ‘프로그래밍 가능한 컴퓨터’인 '컬로서스(Colossus)'였다.
컬로서스는 거의 매일 힘들게 구성을 바꿔줘야 하는 기기였다. 독일군이 메시지 전송방식의 세부사항을 정기적으로 교체했기 때문이었다.
이 기기는 계산기보다 뛰어났지만 프로그래밍이 가능한 진정한 컴퓨터가 아니었다. 청년의 머릿속엔 자신이 1937년 런던 수학학회보에 제출한 논문에서 제안한 훨씬 더 뛰어난 ‘만능기계(Universal Machine)'가 떠올랐다. 그는 컬로서스로도 성이 차지 않았다.
그것은 지금처럼 프로그램만 바꾸면 계산기로도, 스프레드시트로도, 그리고 워드프로세서로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는 기계의 개념이었다. 바로 현대적 컴퓨터였다.
■수학천재와 두 번의 커밍아웃
인도 오릿사지역에서 대영제국의 공무원을 하던 그의 아버지는 어린시절 그와 형을 친구집에 맡겼다. 튜링기계로 불리는 만능기계를 최초로 고안한 이 소년은 고독한 천재로 자라났다.
1929년 어머니는 뒤늦게 수학천재인 열일곱 살 아들의 이상한 취향에 조바심을 갖게 됐다. 아들은 나이가 좀 많은 크리스토퍼 모콤이란 남자 동급생에게 애정을 느끼고 있었다.
“어머니, 저는 모콤과 함께 해낼 일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이제 나만 혼자 남아 그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함께 수학적,과학적 역량을 길러가고자 생각했던 아들의 친구가 갑자기 결핵으로 사망하자 보내온 아들의 편지에는 낙담이 배어있었다.
튜링의 종교적 신념은 산산조각 났고 그는 무신론자가 됐다. 그는 인간의 두뇌에서 발생하는 작용을 포함해 모든 현상을 의구심으로 받아들였다.
그런 그에게도 40년대 말 블레츨리 파크에서 일할 때 남녀의 사랑 비슷한 것이 왔다.
조앤 클라크라는 케임브리지 수학과 출신의 여학생이 블레츠키파크의 그의 부서로 파견되었던 것이다.
자신의 동성애적 성향을 그녀에게 털어놓았음에도 조앤은 별로 신경쓰지 않는 듯했다.
그들 사이에는 연인 비슷한 감정이 자라났다.
하지만 블레츠키파크의 잔디밭에 나란히 누워 데이지꽃을 꺾어 가며 꽃의 수학적 형상을 얘기하곤 하던, 야간교대근무를 마치고 새벽 체스를 하던 그녀와의 만남은 차갑게 끝나 버렸다.
동성애자와 결혼하는 것이 현명하지 못하다는 것을 깨달은 그녀가 떠났다.
■50년을 앞서다
전쟁이 끝난 후 튜링은 국립물리학연구소(NPL)에서 무한히 변동 가능한 기계, 즉 자신의 만능기계에 대한 연구를 지원해 달라는 요청을 넣었다. “하나의 기계에 추가 부품을 더하지 않고 프로그램만 바꿔서 다양한 종류의 온갖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튜링은 당시 영국 최고의 과학행정가인 찰스 다윈경에게 설명했다.
“어떻게 특별한 목적이 아닌 기계를 만들 수 있는가?”
불행히도 다윈경에게 그의 설명에 대한 반박만 있을 뿐 지원할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매번 새로 하드웨어를 만들 필요가 없는 기기를 만들겠다는 튜링의 아이디어는 그렇게 허공으로 사라졌다.
누구나 다 50년 이후에나 이뤄질 일을 튜링처럼 생각해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사실 당시 그가 생각한 것은 단순했다. 당시의 타이프 라이터로 스캐닝하고, 읽고, 무한한 테이프에 실린 명령어 장치를 이용한 기계로 다양한 기능을 수행한다는 아이디어였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부품과 IT의 발전 흐름을 타고 오늘날 보다 진보된 형태로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컴퓨터'란 형태로 나타난 것일 뿐이었다.
오늘날 그의 신기한 수학적 로직에 대한 성과를 이해할 일반인은 드물다. 하지만 그가 사용한 아이디어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다.
튜링과 다윈경의 대화 이후 약 50년. 인류는 컴퓨터라는 하나의 하드웨어로 인터넷서핑, 메신저, 이메일,영화감상,블로깅,워딩,계산 등을 모두 처리할 수 있게 됐다.
튜링은 이후 인공지능과 자기인식의 속성에 대한 논문 몇편을 발표했는데 이조차도 그의 사후 현대인지과학과 컴퓨터 과학의 토대로 인정받게 된다.
■사과를 베어 문 백설공주처럼
케임브리지대나 맨체스터에서 자신과 함께 연구할 지적 동반자도 찾지 못한데다 사랑할 사람도 사라져버린 앨런 튜링의 몸과 마음은 망가져만 갔다.
조앤과의 결별후 진실한 사랑을 체념한 그는 가끔씩 '우연한 만남'으로 외로움을 달랬다.
고독했지만 장거리마라톤 등으로 잘 버티던 그에게 1952년 1월 운명적인 일이 생겼다.
아놀드 머큐리란 19세된 남자와 하룻밤을 보낸 것이 발단이 됐다. 그가 자기 친구에게 튜링의 집 위치를 알려주고 집을 털어갔다. 그의 신고로 이뤄진 수사과정에서 그의 동성애가 드러났다.
동성애는 당시 영국에서 중대범죄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유명 작가인 오스카 와일드도 이미 50년전 쯤에 동성애로 곤욕을 치른 적이 있지 않았던가?
결국 그는 수감되거나 동성애 성향을 치료받기 위해 여성홀몬을 맞는 처분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1953년 4월 그에 대한 처방은 끝났지만 절망스럽게도 그의 가슴은 여자처럼 커져 버렸다.
1954년 6월 7일 영국 북부 맨체스터 윔슬로우의 비내리는 저녁.
튜링은 어린 시절의 연인 모콤이 죽은 후 그를 생각하면서 읊던 '잠자는 숲속의 미녀'에 나오는 대사를 읊었다. 독이 든 사과를 깨문 공주가 그 즉시 영원한 안식에 드는 대목이었다.
그러면서 튜링은 사과하나를 들고 실험용 청산가리 용액을 사과에 주사했다.
다음날 사람들이 숨진 그를 발견했을 때 그의 옆에 떨어진 사과에는 여러번 베어 문 자국이 있었다.
1966년 이래 ACM이란 단체는 그의 이름을 따 수학계에 가장 훌륭한 업적을 남긴 사람에게 상을 수여하고 있다. 2009년 이후 수상자의 상금이 노벨상의 60%이상 웃도는 25만달러가 될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해 존 그레이엄 커밍스란 인물은 영국정부에 앨런 튜링에 대한 사후 사면을 청원했고 고든 브라운 총리는 이를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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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3월 29일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은 그를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인물 100인에 포함시켰다.
오늘날 우리가 폰 노이만식 컴퓨터로 부르는 컴퓨터는 사실 앨런 튜링식 컴퓨터이다. 세계 IT업계에서는 가장 잘 나간다는 회사인 애플의 로고 '베어문 사과'가 앨런튜링의 사과를 상징한 것이란 얘기가 그럴 듯하게 전해지고 있다. <목요연재>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