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닷컴버블 붕괴의 전주곡
‘나스닥이 연일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다!’
2000년 3월 10일. 상승세를 이어가던 미국의 기술기업거래소 나스닥의 주가지수가 5048을 기록하며 사람들을 놀래켰다. 장중 한때 5132까지 치솟았다. 1년 전에 비해 2배 이상 가치가 뛴 것이었다.
‘닷컴’으로 불리던 인터넷 기업들의 인기는 식을 줄 몰랐다. 회사이름에 접두사 'e-'가 붙거나 접미사 닷컴(.com)'이 붙어야 자연스러웠다.
닷컴버블시대의 절정이었다. 일부 애널리스트와 언론만이 우려섞인 눈길로 이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튿 날부터 닷컴기업을 중심으로 걷잡을 수 없는 주식 폭락이 이어졌다. 이른바 ‘닷컴버블’ 붕괴의 시작이었다. 3월 10일 5048이었던 나스닥지수가 4580으로 떨어지는데 단 6일이면 충분했다. 이 기간 동안 9%의 주식가치가 사라졌다. 이후 2004년까지 살아남은 닷컴기업은 절반에 불과했다.
사람들은 이유를 찾기 시작했다. 시스코,IBM,델 등 거대 IT회사가 우연히도 월요일 동시다발적으로 대량의 주식을 팔았다. 사람들은 동요했고 시장에서는 ‘팔자’주문이 이어졌다. 또다른 사람들은 Y2K에 혐의를 씌웠다. 세기의 재앙이라는 Y2K(2000)인식 오류로 컴퓨터가 멈출지 모른다는 생각에 사람들은 새로운 장비를 도입했다. 예상외의 돈이 나갔으므로 새해엔 하려던 투자도 접으리란 것이었다. 2000년초 미연방준비은행(FRB)은 6번이나 금리를 인상했다. 이해 4월 3일 발표될 미정부의 MS 윈도에 대한 독점 판결이 시장을 흔들었다는 분석도 그럴 듯 했다.
하지만 근본적 이유는 닷컴내부에 있었다. 이들은 손해가 나는 서비스를 지속하더라도 네티즌 접속이 늘고, 이를 통해 브랜드 인지도가 높아지기만 한다면 언젠가 고수익을 낼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손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도 전혀 겁내지 않았다. 닷컴들이 ‘메트 칼프의 법칙’에 따라 접속자가 늘어나 주기만을 기대한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수익창출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네트워크의 힘을 잘 이용할 줄 아는 구글같은 기업은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아파넷에 빠진 청년과 사라진 공학박사 꿈
“자네의 논문을 통과시켜 줄 수 없네.” 1969년 하버드대에서 컴퓨터 공학박사 논문통과를 기다리던 붉은 턱수염의 한 청년에게 날벼락 같은 통보가 떨어졌다. 그는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전기공학과 산업경영을 공부하고, 하버드에서 응용수학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은 청년이었다.
지도교수는 그의 학위 논문 ‘아파넷을 위한 시나리오’의 탈락 이유에 대해 “이론적으로 충분치 않다”고 말했다.
당시 하버드대는 미국방성네트워크 아파넷(ARPANET)에 푹빠진 이 대학원생에게 저학년이란 이유로 학교컴퓨터와 아파넷 간 연동 연구를 허락하지 않았었다.
청년 메트 칼프는 굴하지 않고 이웃에 있는 MIT의 MAC프로젝트에 참여했다. 그리고 거기서 하버드가 아닌 MIT의 미니컴퓨터를 인터넷의 원형인 아파넷과 연계시키는 MIP(Interface Messenger Protocol)하드웨어를 만들기에 이른다. 이 때문인지도 몰랐다.
청년의 부모는 그의 박사학위수여식에 참석하기 위해 뉴욕에서 보스톤으로 오고 있는 중이었다.
메트 칼프는 박사학위를 들고 합류하기로 했던 제록스팰러앨토연구소(X-PARC·제록스파크)로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했다.
“어쨌거나 이리 오게. 그리고 논문이나 마치게나.”
연구소의 컴퓨터과학책임자 부르스 테일러는 전후사정을 자세히 듣지도 않고 그렇게 말했다.
1959년 세계최초의 복사기 발표 이후 급성장한 제록스는 메트 칼프가 합류한 1970년 포춘 500의 40대 기업으로 성장해 있었다. 이 회사는 스탠포드대학내 넓은 부지에 제록스파크를 설립해 미국 전역의 두뇌들을 모아 미래 먹거리 개발에 전력하고 있었다.
■하와이에서 발굴한 네트워크 혁명의 꿈
제록스파크에 온 지 몇 달 만에 메트칼프는 무선통신망 알로하네트(ALOHANet) 이야기를 읽었다. 눈이 번쩍 뜨였다. 그 해 하와이대에서 개발했다는 통신망이었다.
일약 초신성기업으로 부상한 제록스는 미래를 위한 투자차원에서 최고의 대우로 최고의 연구원들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메트 칼프는 그런 분위기를 즐겼다.
그는 1등석을 타고 하와이로 떠났다. 섬의 통신권역 지름은 400km. 두 개의 다른 주파수를 사용해 별모양의 중앙허브에서 외부로 송신하고 섬 외곽에서는 허브가 있는 대학으로 신호를 보내도록 하는 방식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 망은 노드를 거쳐서 다른 노드 끝에 있는 회선에 연결되는 아파넷과 달랐다. 즉, 똑같은 주파수로 모든 노드와 통신할 수 있었다.
하와이대는 멀리 떨어진 캠퍼스와 통신하기 위해 저가 아마추어 무선망을 사용하고 있었고, 텔레타이프로 초당 80자를 넘지않는 데이터를 보냈다. 하지만 2개의 기지국에 동시에 교신하려할 때는 문제가 생겼다. 이를 본 메트 칼프에게 유선망에서 이더넷프로토콜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면 되겠다는 영감이 떠올랐다.
1973년 5월 22일. 메트 칼프는 ‘앨토 이더넷(alto Ethernet)'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연구소내에 돌렸다.
한 대의 허브를 중심으로 여러대의 컴퓨터와 네트워크 장비가 '별 모양'으로 연결돼 상호 통신을 하는 것이었다. 고리(Ring)모양의 네트워크를 거치면서 순차적 통신을 수행하는 이른바 ’토큰링‘방식에 비해 훨씬 빠르고 효율적이었다. 이른바 ‘메트 칼프의 법칙’으로 설명되는 네트워크의 힘을 설명할 수 있는 구조가 공개되는 순간이었다.
■붉은 수염의 청년 쓰리콤(3Com)을 창립하다. 제록스파크의 메트 칼프는 이더넷을 발명한 지 6년 만인 1979년 자신의 아파트에서 '쓰리콤(3Com)'이라는 회사를 설립한다.
제록스는 1만6천달러나 하는 컴퓨터인 제록스스타를 가지고 2천달러가 안되는 매킨토시와 경쟁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곳이었다. 그런 곳에서 돈을 벌어 자식을 대학교에 보내고 돈을 벌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회사이름으로 고민하던 그는 ‘컴퓨터(Computers),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 적합성(Compatibility)’라는 단어의 약자인 3Com이란 회사를 만들었다.
‘3M’이라는 회사도 있는데 ‘3Com’이란 이름이 안될 이유가 어디있단 말인가?
그가 자신의 이더넷에 기반해 떠올린 것은 결국 “네트워크의 힘은 거기에 접속하는 사용자의 제곱에 비례한다‘는 것이었다.
'메트칼프의 법칙'으로 불리는 이 현상은 1993년 그의 친구 조지 길더에 의해 유명세를 타게 된다. 그는 네크워크를 연구하던 중 메트 칼프가 고객 설명용으로 만든 35mm 슬라이드에서 그래프를 발견하고는 그렇게 이름붙였다.
하지만 인터넷 세상에서 네트워크 파워를 설명해주는 가장 명확하고 단순한 설명은 이 정도가 될 것이다.
두 대의 전화선을 연결하면 하나의 연결이 가능해진다. 하지만 5대의 전화선을 연결하면 10개의 연계가 가능하다. 이것을 12개로 늘려보면 66개의 연결이 가능하다....
메트칼프는 회사설립 후 이더넷 효율성에 동조하는 DEC,인텔(Intel),제록스(Xerox)와 함께 이른 바 DIX연합을 결성, IBM 토큰링표준을 몰아내고 쓰리콤을 네트워크의 대명사로 우뚝 세운다.
컴퓨터업계의 제왕인 IBM의 허버트 그로쉬는 60년대 초 “컴퓨터의 성능은 투입된 비용의 제곱에 비례한다”고 썼다. 큰것이 좋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1965년 4월 인텔의 고든 무어는 이 법칙을 뒤집었다. 무어는 “반도체의 집적도는 대략 18개월에 2배씩 증가한다”는 반도체산업에 대한 예언을 내놓는다. 작은 것이 더 좋다고 주장한 그의 법칙은 오늘날까지 살아 있다.
메트 칼프의 법칙은 '무어의 법칙'과 함께 IT업계를 움직이는 가장 유명한 법칙으로 살아남아 있다.
■메트컬프의 법칙 이후
“만일 네트워크에서 이익을 얻고자 한다면 고객들은 일정한 한계치를 넘어서는 이더넷카드를 사야 할 것입니다.”
메트칼프는 고객들에게 “네트워크를 통해 상품이나 서비스를 일정량 이상, 이른바 '임계규모(critical mass)'이상 구매한다면 제품이나 서비스에 지불하는 가격이상의 가치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말로 네트워크의 가치와 활용법에 대해 설명했다.
하지만 어떻게 많은 사람들이 이 임계치까지 오도록 유도할 수 있단 말인가.
따지고 보면 인터넷에 무료로 접속해 서비스를 제공하고 회사이름을 알리려는 닷컴버블 시대의 풍속도는 이 임계치까지 이르도록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닷컴버블 붕괴의 원인은 이러한 흐름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사상 최악의 합병인 AOL-타임워너합병도 이 흐름에 휩쓸린 것이었다.
하지만 미국방성의 네트워크(ARPANET)에 빠져있던 '아파넷가이(APRA NetGuy)' 메트 칼프의 발명품은 결국 인류를 인터넷소통의 신세계로 인도했다. 이더넷이 촉발하고 가속시킨 인터넷 혁명은 인터넷,월드와이드웹,트위터등 소셜네트워킹을 가능케 한 소통혁명의 고속도로망이었다.
사람들은 접속한 사람의 제곱에 비례해 늘어나는 이 네트워크의 힘을 통해 위키노믹스로 알려진 집단 지성의 힘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메트 칼프가 가져다 준 ‘네트워크의 힘’이라는 불씨는 인터넷과 결합해 진화를 거듭했다. 이제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공짜로 제공하거나 받으면서도 경제효과를 찾는 ‘공짜경제학’을 가져온 웹 2.0혁명을 경험하고 있다.
아마존,야후,구글,이베이 등이 이에 기반한 새로운 경제를 이끌고 있으며 구글은 안드로이드라는 툴로 웹 2.0시대 경제를 주도하면서 끊임없이 산업과 경제의 질서를 바꿔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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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네트워크에 접속한 모든 사람의 영향력을 똑같이 평가한 점 등 이 법칙의 약점도 꾸준히 지적되고 있다.
메트 칼프는 2001년 벤처캐피털리스트(VC)로 변신, 폴라리스벤처파트너스에서 벤처육성을 하는가 하면 기고와 강연활동 등으로 바쁘다. 2010년 4월. HP는 27억달러를 들인 쓰리콤 인수작업을 마무리한다.<목요연재>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