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 K-컬처에 열광하는 이유는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이야기, 오래된 시간의 결이 담긴 헤리티지에 있습니다. 전통을 오늘의 감각으로 다시 읽고 디지털 기술과 예술적 상상력을 더할 때 문화자원은 공연과 전시, 도시와 공간, 콘텐츠와 산업의 언어로 확장됩니다. 정책과 현장, 기술과 예술이 만나는 접점에서 한국다움이 오늘의 콘텐츠와 경험으로 어떻게 살아나는지를 이창근 칼럼니스트와 함께 짚어봅니다. [편집자주]
물결은 바닥에 있고, 작은 정원은 그 위에 떠 있는 듯하다. 흰 테두리 안에 돌과 이끼, 식물이 놓여 있다. 푸른 물결 영상이 그 사이를 채우고 노랑과 분홍빛이 가장자리를 감싼다. 가까이에서는 재료의 질감이 드러나고, 한 걸음 물러서면 설치물들을 잇는 흐름이 보인다.
10월 22일부터 28일까지 성남큐브미술관 반달갤러리에서 열리는 테라피랜드(Therapy Land)의 ‘RECOVER: 순환의 순간’은 성남의 물순환과 도시생태 회복을 빛과 소리, 설치로 풀어낸 전시다. 필자가 주목한 것은 실물의 정원과 디지털 이미지가 서로의 모습을 바꾸는 방식이었다. 빛은 돌과 잎의 표정을 달리하고, 식물은 그림자를 드리워 영상에 새로운 윤곽을 만든다.
작은 빛으로 연결하는 도시의 물길
테라피랜드는 2024년 결성된 예술집단이다. 최은아 작가(사운드 디자이너 겸 디렉터), 사운드 디자인과 피지컬 컴퓨팅을 담당하는 홍세정 작가, 미디어아티스트 겸 아트디렉터 신효흔 작가로 구성됐다. 소리와 이미지, 공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감각적 회복의 가능성을 탐구한다. 이번 전시는 2026 경기예술지원 ‘모든예술31 성남’에 선정돼 경기도·성남시·경기문화재단·성남문화재단의 지원으로 제작됐다.
현장에서 만난 최은아 작가는 성남의 도시환경을 조사하며 단절된 물길과 생태의 관계에 주목했다고 설명했다. 도시와 자연이 다시 연결되는 과정을 관람자의 작은 행동으로 경험하게 하는 것이 기획의 중심이다. 1층의 ‘도랑’은 탄천과 저수지의 물길에서 출발한다. 일곱 점의 낮은 설치물은 각각 작은 섬처럼 놓여 있다. 그 사이를 물결 영상이 잇고, 사람은 그 위를 걷는다. 순환이라는 주제가 사물의 배치와 관람 동선으로 구체화돼 있다.
바닥이 화면이 되면서 감상의 거리도 달라진다. 관람자의 시선은 가까운 잎과 돌에서 발아래의 영상으로, 다시 공간 전체로 옮겨간다. 실물은 시선을 붙들고, 영상은 그 시선을 주변으로 확장한다. 서로 다른 재료가 각자의 방식으로 관람자의 주의를 이끈다.
전시는 관람자에게 랜턴과 ‘도시생태관리사’라는 역할을 건넨다. 숨겨진 반응 지점을 찾아 빛을 비추면 물길과 사운드가 활성화된다. 최은아 작가는 이러한 개입을 통해 관람자가 도시생태의 참여자이자 회복을 매개하는 존재가 되도록 구성했다고 설명했다. 랜턴은 시선의 방향을 손의 움직임으로 옮기는 도구다. 어디를 비출지 선택하는 행위가 작품의 변화와 연결된다. 각자의 참여가 모이면 하나의 회복 장면이 이어지도록 설계했다.
그림자가 넓힌 자연의 자리
2층의 ‘옥상정원’에서는 실물과 영상의 관계가 한층 선명해진다. 가느다란 다리 위에 놓인 식물 뒤로 푸른 곡선의 영상이 펼쳐지고, 잎과 줄기의 그림자가 벽에 길게 드리워진다. 작은 식물이 자신의 크기를 넘어 벽을 차지한다. 그림자는 이 작품에서 흥미로운 제3의 이미지다. 식물에서 생겨났지만 실물과 다른 크기와 농도를 갖는다. 그 뒤의 투사 영상과 겹치면서 자연의 윤곽이 디지털 화면을 가르고 들어온다. 재료와 빛이 서로를 드러내는 순간이다.
최은아 작가는 성남의 옥상녹화를 모티프로, 건축물 위에 자연이 머무는 자리를 상상했다고 설명했다. 전시장에서는 그 작은 자리가 그림자를 통해 확장된다.
‘수조’는 시선을 안쪽으로 모은다. 투명한 원통 안에 돌과 가지의 형상이 놓여 있고, 따뜻한 빛이 이를 감싼다. 용기 안에 응축된 풍경은 가까이 들여다보게 한다. 최은아 작가에 따르면 수조는 정화를 거친 물이 자연으로 돌아가기 전 머무는 저장소를 상상한 작품이다. 회복의 결실과 다음 순환의 시작을 함께 담았다. 넓은 바닥의 흐름에서 작은 용기의 내부로 옮겨가는 시선이 전시의 완급을 만든다.
풍경 안으로 들어온 사람
이 전시는 작은 정원과 넓게 펼쳐진 영상 사이에서 관람자의 시선과 감상 거리를 바꾼다. 손에 든 작은 빛, 가까이 살펴야 하는 식물, 벽과 바닥으로 펼쳐지는 영상이 하나의 경험 안에 놓인다. 관람자의 몸은 그 사이의 거리를 조절하며 풍경을 읽는다.
다만 성남의 물길을 다룬다는 맥락은 작품의 조형보다 해설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추상적인 물결과 작은 정원의 이미지에 탄천과 저수지의 구체적인 모습이 더해졌다면, 장소와 작품의 연결도 한층 또렷했을 것이다.
관람자의 몸은 빛을 가리고, 벽에 그림자를 남긴다. 필자는 그 겹침에서 전시의 의미를 읽는다. 도시의 회복을 이야기하는 풍경 안에는 사람의 자리도 함께 놓여 있다. 물길을 바라보던 사람은 어느새 그 풍경의 일부가 된다.
* 헤디트(HEDIT) : Heritage(문화자원) + Digital(첨단기술) + Art(예술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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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이창근
예술경영학박사(Ph.D.). 콘텐츠 디렉터이자 예술-기술 칼럼니스트다. 헤리티지랩(Heritage LAB) 소장으로서 문화유산·도시공간·융합콘텐츠를 바탕으로 프로젝트를 기획하며, 디지털 경험 설계와 콘텐츠 창작, 미디어전시·퍼포먼스 연출을 이어오고 있다. 2021년부터 지디넷코리아(ZDNET Korea) 오피니언 필진으로 [이창근의 헤디트]를 연재하고 있다. 저서로 『K-헤리티지, 매력 도시 디자인』과 『우리는 왜 오래된 장소에 끌리는가』가 있다.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