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AI윤리] 디지털 불멸과 자아의 연속성

[11회] 호접몽에서 데드봇까지...기억과 존재의 경계에 대한 철학적 물음

전문가 칼럼입력 :2026/08/16 10:57

박형빈 서울교육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

1. 기(起): 나비의 꿈과 성진의 꿈-깨어난 자는 누구인가?

장주는 꿈속에서 나비가 돼 훨훨 날아다니며 즐거워했고, 자신이 장주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문득 깨어보니 그는 장주였다. 그러나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장자' '제물론'의 마지막에 놓인 호접몽은 꿈과 현실, 서로 다른 존재 상태와 관점의 관계를 묻는 이야기로 해석된다. 원문은 ‘장주와 나비 사이에는 반드시 구별이 있다 (周與胡蝶,則必有分矣)’고 한 뒤 ‘이를 물화라 한다(此之謂物化)’고 끝맺는다. ‘물화(物化)’는 통상 사물 또는 만물의 변화로 옮기지만, 그 철학적 의미에는 여러 해석이 존재한다. 따라서 호접몽은 어느 한쪽만을 참된 현실로 확정하기보다 서로 구별되는 존재 상태의 전환을 통해 고정된 자아와 관점의 경계를 성찰하게 하는 이야기로 읽을 수 있다.

우리 고전문학에도 꿈과 각성을 중심에 둔 작품이 있다. 김만중의 '구운몽'에서 성진은 팔선녀를 만난 뒤 속세의 부귀공명을 욕망하고, 꿈속에서 양소유로 태어나 여덟 여성과 인연을 맺으며 높은 관직과 부귀를 누린다. 말년의 양소유는 역대 영웅들의 황폐한 무덤을 보고 인생의 무상함을 느낀다. 이어 한 호승과 문답하다 꿈에서 깨어나 자신이 육관대사 앞의 성진임을 알게 된다.

'구운몽'은 이처럼 현실과 꿈을 넘나드는 환몽 구조의 대표적 고전소설이다. 그러나 이를 ‘인생은 한바탕 꿈’이라는 교훈으로만 압축할 수 있을까. 양소유의 삶이 꿈의 층위에 속한다고 해서 그 안에서 겪은 욕망과 사랑, 만남과 이별까지 무의미했다고 할 수 있을까. 꿈에서 깨어난 성진은 과연 꿈을 꾸기 전과 완전히 같은 존재인가. 양소유의 경험이 성진의 깨달음을 이끌었다면, 그 꿈은 성진의 일부가 되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구운몽'이 우리에게 묻는 것은 꿈과 현실 가운데 어느 쪽이 참인가가 아니라, 한 존재가 겪은 경험은 어디까지 그 사람의 일부가 되는가라는 물음이 아닐까.

2. 승(承): 죽은 목소리의 귀환-컴퓨터 서버에서 되살아난 오래된 질문

이 유구한 철학적 물음이 이제 생성형 AI의 서버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깨어나고 있다. 고인이 남긴 문자, 이메일, SNS 게시물, 저술, 음성 및 영상 자료 등을 활용해 고인의 말투와 성격을 모사하는 시스템은 ‘그리프봇(griefbot)’, ‘데드봇(deadbot)’, ‘타나봇(thanabot)’, ‘사후 아바타(postmortem avatar)’ 등으로 불린다. 이러한 기술은 더 이상 공상과학적 상상에 머물지 않는다. 실제 서비스가 등장했고, 디지털 사후 산업과 AI 윤리의 연구 대상이 되었다(Hollanek & Nowaczyk-Basińska, 2024).

이들 시스템은 고인이 생전에 남긴 문장을 단순히 검색하거나 재생하는 장치와도 다르다. 대규모 언어모델에 기반한 타나봇은 고인의 실제 발언이나 정보를 활용할 뿐 아니라 고인이 직접 말한 적은 없지만 그 사람이라면 말했을 법한 새로운 문장도 생성할 수 있다(Campbell, Liu, & Nyholm, 2025). 고인의 목소리와 외모까지 결합하면 이용자는 망자와 다시 대면하고 있다는 강한 인상을 받을 수 있다.

그렇다면 작고한 할아버지의 자료를 바탕으로 만든 AI에게 ‘할아버지라면 제 선택을 어떻게 생각하실까요?’라고 물은 뒤, 익숙한 음성과 어휘로 답을 듣는 순간 우리는 누구와 대화하는 것인가. 그 답은 할아버지가 생전에 남긴 말도 아니고, 실제로 내린 새로운 판단도 아니다. 그것은 고인의 과거 자료와 일반적인 언어 패턴을 토대로 시스템이 산출한 문장이다. 기술적으로는 정교한 모사이지만, 철학적·윤리적으로는 모사의 정교함만으로 풀 수 없는 문제가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3. 전(轉): 닮음의 극한에서 갈라지는 존재-영화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과 '아카이브'

존 로크는 '인간지성론'(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제2권 제27장에서 이른바 ‘왕자와 구두수선공’ 사고실험을 제시한다. 그는 왕자의 과거 삶에 대한 의식을 지닌 왕자의 영혼이 본래의 영혼이 떠난 구두수선공의 몸에 들어간 경우를 상정한다. 로크에 따르면 그 존재는 왕자의 행위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는 왕자와 동일한 인격(person)이다. 그러나 신체와 생명의 조직적 연속성을 기준으로 인간(man)의 동일성을 판단한다면, 그는 여전히 구두수선공과 동일한 인간이다.

이 사고실험은 로크가 동일한 사고하는 실체 또는 영혼, 동일한 인간, 동일한 인격을 구별했음을 보여준다. 로크는 인격의 동일성이 동일한 신체나 동일한 영혼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이 과거의 생각과 행위에까지 확장되는 범위와 관련된다고 보았다(Locke, Nidditch ed., 1975).

박형빈 서울교육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

이 논리를 피상적으로 확장하면 디지털 부활에도 낙관적인 결론을 끌어낼 수 있다. 고인의 기억과 성격, 언어 습관과 가치판단을 충분히 재현한다면 그 사람도 계속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고인에 관한 정보를 저장하고 기억에 관한 문장을 생성하는 것과, 그 기억을 자신의 과거 경험으로 의식하는 것은 동일하지 않다.

로크에게 인격동일성은 정보의 외형적 일치나 심리적 유사성만으로 성립하지 않으며, 의식이 과거의 생각과 행위에까지 이어지는 범위와 관련된다. 따라서 현존하는 디지털 시스템이 고인의 언어와 기억을 정교하게 모사한다는 사실만으로 고인의 인격이 그 시스템 안에서 여전히 존재한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다.

데릭 파핏은 '이성과 인격'(Reasons and Persons)에서 여러 사고실험을 통해 개인동일성의 문제를 검토한다. 단순 텔레트랜스포테이션 사례에서 지구의 장치는 한 사람의 신체와 뇌를 파괴하면서 각 세포의 정확한 상태를 기록하고, 화성의 장치는 새로운 물질을 사용해 원래 사람과 신체 구조 및 심리 상태가 질적으로 동일한 재현체(Replica)를 만든다. 이어지는 분기선 사례(Branch-Line Case)에서는 새로운 스캐너가 지구에 있는 원래 사람의 신체를 파괴하지 않지만 그의 심장계를 손상시킨다.

원래 사람은 며칠 뒤 죽게 되며, 그동안 스캔 시점까지 자신의 기억과 성격을 공유하는 화성의 재현체와 동시에 존재하고 대화한다. 파핏은 또한 자신을 포함한 일란성 세쌍둥이 중 두 형제의 신체에 자신의 뇌 반구를 각각 이식하는 나의 분열(My Division) 사례를 검토한다. 이 사고실험에서는 자신의 신체가 치명상을 입고 두 형제의 뇌도 회복할 수 없게 손상된다.

수술로 생겨난 두 사람은 모두 원래 사람의 삶을 기억하는 듯하고 그의 성격을 지니며, 그와 심리적으로 연속된다. 파핏은 이러한 분열의 경우 수적 개인동일성은 성립하지 않지만 심리적 연결성과 연속성은 남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가 ‘관계 R(Relation R)’이라고 부르는 것은 심리적 연결성 및 심리적 연속성이다. 파핏의 핵심 주장은 생존에서 중요한 것이 수적 개인동일성 자체라기보다 관계 R일 수 있다는 것이다(Parfit, 1984).

이 간극을 섬세하게 포착한 영화가 마이클 알메레이다의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Marjorie Prime, 2017)이다. 기억이 쇠퇴해 가는 노년의 마조리 앞에 젊은 시절의 남편 월터를 본뜬 홀로그램 ‘월터 프라임’이 나타난다. 그러나 프라임은 실제 월터의 내면을 보존한 존재가 아니다. 그는 마조리와 가족이 들려주는 기억을 입력받아 그 이야기를 다시 전달한다. 가족이 고통스러운 과거를 누락하고 행복했던 기억을 보태거나 윤색할수록 월터 프라임은 실존했던 월터보다 가족이 기억하고 싶어 하는 월터의 편집본에 가까워진다.

개빈 로더리의 '아카이브'(Archive, 2020)는 죽었다고 여겨지는 배우자의 의식을 인간과 동등한 수준의 AI에 구현하려는 시도를 전면에 내세운다. 고인의 기억과 성격을 재현한 존재가 고인이 사랑했던 사람을 자신도 사랑한다고 말할 때,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그것을 정교한 모방이 아닌 당사자의 귀환으로 인정할 수 있을까. 영화는 결말의 반전을 통해 누가 죽고 누가 살아남았는지에 관한 관객의 전제를 뒤집으며, 저장된 의식의 재현과 원래 인물의 동일성이 과연 같은 것인지 다시 묻는다.

두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기술적 재현의 실패라기보다 재현이 아무리 정교해져도 원본과의 존재론적 간격이 저절로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최근의 철학 연구도 이 구별 앞에서 신중하다. 예컨대 타나봇과 새로 맺는 관계는 고인과 맺었던 관계의 진정한 연속일 수 없다는 논증이 제시된 바 있다(Campbell, Liu, & Nyholm, 2025).

타나봇은 고인과 동일한 개체가 아니며 언어모델이 맥락에 맞고 그럴듯한 문장을 생성한다는 사실만으로는 그것이 문장의 의미를 이해하거나 고인의 정신 상태를 이어받았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타나봇과의 상호작용이 유족이 고인과 유지하는 심리적·상징적 관계, 즉 지속되는 유대를 지지하는 수단이 될 가능성은 부정하기 어려워 보인다.

이 문제는 개인동일성의 차원을 넘어 동의, 사후 프라이버시, 인간 존엄과 이용자 복지의 문제로 확장된다. 특히 고인의 자료를 제공하는 사람과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 모두의 의미 있는 동의, AI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는 투명성, 성인 이용자로의 제한, 관계를 끝낼 수 있는 선택권, 사용하지 않는 데드봇을 존중을 갖춘 방식으로 폐기하는 절차가 요구된다. 디지털 부활은 생성의 기술만이 아니라 종료의 윤리까지 필요로 한다.

4. 결(結): 돌아온 목소리와 돌아오지 않은 사람

여기서 디지털 불멸의 역설이 모습을 드러낸다. 재현 기술이 정교해질수록 우리는 고인을 더 많이 되찾았다고 느끼지만 동시에 고인과 그를 모사한 시스템 사이의 경계를 분별하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그러나 인간은 생전에 남긴 기록의 총합이 아니다. 우리는 기억한 것뿐 아니라 망각한 것, 발화한 것뿐 아니라 끝내 말하지 않은 것, 한때 확신했지만 훗날 철회한 것까지 품고 살아간다.

데이터는 이미 일어난 삶의 흔적을 압축할 수 있다. 반면 살아 있는 인격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건과 관계 속에서 판단을 바꾸고, 자신을 반성하며, 때로는 과거의 자기와 결별한다. 고인의 데이터로 만들어진 AI에는 바로 이 미완의 미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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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디지털 불멸의 핵심 질문은 ‘AI가 고인을 얼마나 완벽하게 모사할 수 있는가’에 머물 수 없다. 그것은 기술적 성능의 문제다. 더 어려운 질문은 우리가 무엇을 한 사람의 ‘계속됨’으로 인정할 것인가이다. 한 사람의 동일성인가, 심리적 연속성인가, 남겨진 이들과의 관계인가, 아니면 기억을 보존하는 사회적 실천인가. 이 서로 다른 의미를 구별하지 않는 순간, 기억의 보존은 존재의 부활로 오인된다.

장주의 나비와 성진의 양소유가 현실과 꿈, 변화와 자아의 경계를 물었다면, AI 시대의 호접몽은 기억과 존재의 경계를 묻는다. 화면 속 존재가 나만 아는 이야기를 되풀이하고, 익숙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며, 고인이 했을 법한 위로를 건넨다고 해도 그것을 곧 고인의 귀환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는 돌아온 사람이 아니라 고인이 남긴 데이터와 남겨진 이들의 기억, 상실과 욕망이 함께 빚어낸 새로운 타자일 수 있다. 기술은 죽은 이의 목소리를 다시 들려줄 수 있다. 그러나 목소리가 돌아오는 것과 그 사람이 돌아오는 것은 같은 사건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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