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에서 저널리즘을 성찰한다

[김익현의 미디어 읽기] 논리적 추론 vs 선험적 억지

데스크 칼럼입력 :2022/06/14 14:03    수정: 2022/06/14 18:18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 기자 페이지 구독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죄와 벌’은 고등학교 1학년 때 삼중당문고 번역본으로 처음 읽었다. 대학생(이었던) 라스꼴리니꼬프가 한 전당포 노파를 살해하는 것이 이야기의 골자다. 살인을 저지른 후 고뇌하던 라스꼴리니꼬프는 착한 매춘부 소냐의 설득으로 자수를 하고, 시베리아 유형을 떠난다는 내용이다. 

감수성 예민했던 고등학교 1학년 학생에겐 소냐가 라스꼴리니꼬프를 설득하는 장면이 강하게 다가왔다.

“일어나세요! 지금 네거리로 나가서 몸을 굽혀 당신이 더럽힌 대지 위에 키스하세요. 그리고 온 천지에 머리를 조아리고 모두 듣도록 큰 소리로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라고 외치세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생명을 주실 겁니다.”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하지만 그 때 난, 대부분의 고등학생들처럼, 겉핥기 독서를 했다. 도스토예프스키 특유의 웅숭 깊은 사유를 받아들일 여유가 없었다. 정상 정복에 급급한 초보 등산객처럼, 그저 목적지(책 맨 마지막 페이지)만 보고 정신 없이 달렸다. ‘죄와 벌'이란 산을 오르는 곳곳에서 볼 수 있었던 멋진 풍경은 모두 건너 뛰어 버렸다.

■ 살인을 정당화하기 위해 논리적 비약을 감행하는 라스꼴리니꼬쁘 

‘꼰대 아재'가 되고 난 뒤 ‘죄와 벌’을 다시 읽고 있다. 그 때 미처 보지 못했던 많은 장면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 사이 내 사유의 폭이 조금 깊어진 때문일 수도 있고, '죄와 벌’에 대해 논한 많은 이들의 ‘등산 안내문’을 접한 덕분일 수도 있을 게다. 그도 아니면, 그 때보다는 조금 더 느긋하게 책을 읽을 여유가 생긴 탓일 수도 있다.

‘죄와 벌'을 새롭게 읽으면서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라스꼴리니꼬프의 살인이 ‘우연의 산물’이라고 거듭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라스꼴리니꼬프가 피도 눈물도 없는 전당포 노파를 살해하는 대외적 명분은 ‘초인 사상’이다. 평범한 사람의 살인은 범죄이지만, 전쟁에서 수 만 명을 살해한 비범한 사람은 오히려 영웅 대접을 받는다는 생각이 당시 젊은이들에겐 꽤 널리 퍼져 있었다. 

바스티앙 루키아의 그래픽 노블 '죄와 벌'의 한 장면.

라스꼴리니꼬프 역시 이런 독백으로 자신의 살인을 정당화한다.

“어쩌면 수백, 수천 명의 사람들이 올바른 길로 갈 수도 있고 수십 가구가 극빈과 분열, 파멸, 타락, 성병 치료원에서 구원받을 수도 있어. 이 모든 일이 노파의 돈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단 말이야.”

그런데 라스꼴리니꼬쁘를 창조한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런 그의 생각에 계속 제동을 건다. 비범한 척 하지만, 겁에 질린 라스꼴리니꼬프의 모습을 계속 묘사해준다. 살인 전날 도끼로 소를 살해하는 악몽을 꾸며 가위 눌리는 장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 뿐 아니다. 작가는 라스꼴리니꼬프가 우연히 벌어진 여러 사건들을 ‘그 일’을 행할 필연의 신호로 잘못 이해했다고 강조한다.  

집으로 돌아가던 라스꼴리니꼬프가 공원에서 한 대화를 엿듣는 것이 첫 우연의 시작이다. 

그는 한 상인이 전당포 노파의 여동생인 라자베따를 초대하는 장면을 우연히 목격한다. “내일 7시에 와요. 그 사람들도 올 거에요.”

전당포 노파는 여동생과 둘이 살고 있다. 여동생이 집을 비운다면? 노파 혼자 있게 된다. 살인을 결행하기엔 더 없이 좋은 기회다. 라스꼴리니꼬프는 이렇게 생각한다.

1935년 콜롬비아 영화사가 제작한 '죄와 벌'의 한 장면.

“전날 밤, 전혀 위험 부담도 없이, 그 어떤 위험한 질문이나 탐색도 없이, 이렇게 정확하게, 죽이고자 하는 그 노파가 내일 그 시간에 집에 혼자 있으리라는 사실을 알게 되기란 아마도 어려운 일일 것이다.” (상권, 97쪽, 열린책들 번역본)

두 번째 우연한 사건은 술집에서 일어난다. 옆 자리에 앉은 대학생 둘이 라자베따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을 '우연히' 듣게 된 것. 대학생들은 노파가 배 다른 여동생인 라자베따를 학대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그리고 이런 말도 한다.

“어리석고, 의미 없고, 하찮고, 못됐고,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아니 오히려 모든 사람에게 해만 끼치는 그런 병든 노파가 있어. 그 노파는 자기가 왜 사는지도 모르고, 또 그렇지 않아도 얼마 안 있으면 저절로 죽게 될 거야.” (같은 책, 100쪽)

'우연하게' 이들의 대화를 엿듣게 된 라스꼴리니꼬프는 흥분한다. “이제 막 그의 머릿속에 <똑 같은 생각>이 떠오르고 있는 바로 그 순간에” 같은 얘기를 듣게 된 때문이다.

이 대화는 살인을 결행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 대목을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렇게 묘사한다.

“그에게는 이러한 우연의 일치가 언제나 이상하게 여겨졌다. 술집에서의 이 하찮은 논쟁은 장차 사건을 발전시키는 데 있어 그에게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마치 그 속에서 어떤 숙명과 계시라도 있었던 것처럼...” (102쪽)

예전에 읽을 땐 전혀 생각하지 못한 장면들이었다. 전혀 논리적이지 않은 이 장면을 접하면서, 주변을 돌아보게 됐다. 나도 혹시 저런 오류를 범한 적은 없을까, 되뇌어 봤다.

■ 취재 방법도 따지고 보면 연역법과 귀납법 중 하나  

논리적 추론에는 연역법과 귀납법이 있다. 연역법은 일반적인 진리에서 특수한 사실을 추론해내는 방법이다. 삼단논법이 대표적인 사례다.

반면 귀납법은 다양한 사례들을 통해 일반적인 법칙을 도출해내는 방법이다. 이를테면 소크라테스도 죽고, 플라톤도 죽고, 아리스토텔레스도 죽었는데, 이들은 모두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죽는다는 진리를 이끌어내는 방법이다.

언론들이 취재할 때도 연역법과 귀납법을 두루 사용한다. 이를테면 워터게이트 특종 같은 경우 닉슨 대통령이 도청에 연루됐다는 진리가 먼저 존재한다. 기자들은 그 진리를 입증할 증거를 찾기 위해 전방위 탐사보도를 단행했다. 대표적인 연역적 취재 방식이다.

영국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 과학적 방법론에는 연역법과 귀납법이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귀납법은 여러 사실들에서 일반적인 정황을 찾아내는 방법이다. A업체는 요즘 상황이 좋지 않다. 그런데 그게 A업체 만의 상황은 아니다. B, C업체들이 모두 불황이 시달리고 있다. 이들은 모두 통신업체들이다. 이런 사실을 통해 통신시장 불황이 심상치 않다는 좀 더 큰 기사가 나오게 된다.

그런데 연역법과 귀납법을 뒤섞어버리는 경우가 있다. 대개는 ‘특정한 목적의식’이 강하게 작용할 때 그런 오류에 빠지게 된다.

이를테면 A라는 인물이나 업체가 아주 나쁜 사람이라는 강한 생각을 갖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전형적인 연역적 사고다. 그 사실을 입증할 사례를 찾아내야 한다. 그런데 그 목적의식이 너무 강할 경우엔 논리적 타당성을 뛰어넘어 버리는 경우가 생긴다.

‘죄와 벌’의 라스꼴리니꼬프가 바로 이런 오류를 범한다. 라스꼴리니꼬쁘에게 전당포 노파는 ‘반드시 사라져야 할 악의 축’이다. 그가 착취한 돈을 젊은이들에게 나눠주면, 인류 전체에겐 더 큰 이득이 될 것이고 자기 합리화했다.

하지만 여전히 살인은 두렵다. 악몽까지 꿀 정도다.

이런 상황에서 우연히 내일 오후 7시에 노파가 혼자 있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이게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받아들인다. 인류를 위한 자신의 ‘거사’를 도우려는 신의 계시로 받아들인다.

게다가 그가 긴가 민가했던 살인의 명분에 공감하는 젊은이들을, 하필이면 거사일 전날, 그것도 술집 옆자리에서 만난다. 역시 예사롭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 목적이나 의욕 때문에 엉뚱한 결론 도출한 적 없나 

도스토예프스키는 작품 속에서 이런 논리 비약을 바로 꼬집는다. 상인 내외가 라자베따를 초대한 것은 “아주 흔히 있을 수 있는 용무로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고 지적한다. 라스꼴리니꼬프 역시 살인을 하고 난 뒤, 훨씬 나중에 이런 사실을 깨닫는다.

술집에서 옆자리에 앉은 청년들의 대화 역시 찬찬히 들어보면 허점 투성이다. 초인 사상을 역설했던 청년은 “너는 네 손으로 노파를 죽일 수 있겠어?”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변한다.

“물론, 아냐! 난 다만 정의를 위해서..., 그건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

그러자 질문을 던졌던 다른 청년은 이렇게 못을 박는다.

“내 생각에는 만일 네 자신이 그 일을 결행할 마음을 먹지 못한다면, 거기엔 어떤 정의도 있을 수 없어.”

도스토에프스키의 ‘죄와 벌’은 특히 등장인물들의 심리 묘사가 대단히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소싯적에 지리하기 짝이 없었던, 긴 사유 과정들을 찬찬히 따라가는 재미가 쏠쏠했다. 정상 정복에 급급했던 산을 다시 오르면서, 주변 경치를 찬찬히 음미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인공은 라스꼴리니꼬프가 살인을 결심하는 과정을 통해, 목적이나 의욕이 앞설 경우 엉뚱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는, 평범하지만 굉장히 중요한 진리를 접하는 기쁨도 만끽했다. 이 땅의 많은 저널리스트들이 한번쯤 되새겨볼만한 부분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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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이 글을 읽고 '죄와 벌'의 심오한 주제를 지나치게 단순화했다는 불만을 제기하는 분이 있을 것 같다. '죄와 벌'은 인간의 본능에 대해 깊이 있게 탐구하고 있다는 점에는 전혀 의문이 없다. 다만, 라스꼴리니꼬프가 여러 우연들을 필연으로 오해하면서 논리적 비약을 단행하는 부분을 지적하고 싶었다. 기자들 역시 이런 논리적 오류에 빠질 가능성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sini@zdne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