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한 원로 언론인이 지난 1일(현지시간) 별세했다. 그의 이름은 배리 서스먼(Barry Sussman). 하지만 8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그의 부음 기사는 그다지 큰 반향을 불러오진 않았다.
서스먼은 지금은 잊혀진 인물이다. 일반인 뿐 아니라 저널리즘 전공자들 중에도 서스먼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그는 언론사상 최대 특종으로 꼽히는 ‘워터게이트 보도’ 때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신참이던 칼 번스타인과 밥 우드워드 두 기자를 이끌면서 언론 역사상 최대 특종을 완성했다.
워터게이트 특종은 탐사 보도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성과로 꼽힌다. 사상 처음으로 현직 대통령을 사임시킨 '탐사 저널리즘의 모범 사례'다.
워터게이트 사건은 1972년 6월 17일 시작됐다. 토요일이던 그날 워터게이트 빌딩에 있던 민주당 전국위원회에 침입한 다섯 명이 경찰에 체포된 것이 시발점이다. 처음엔 단순 절도 사건인 줄 알았다. 하지만 닉슨 대통령 재선을 위해 민주당 전국위원회에 도청장치를 설치하려고 침입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워싱턴포스트의 민완 기자들은 단순 절도처럼 보였던 그 사건 뒤에 엄청난 권력의 음모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파헤치는 데 성공했다.
당시 워싱턴DC 뉴스 편집 책임자였던 서스먼은 초기부터 누구보다 먼저 워터게이트 사건의 의미를 잘 파악했다. 그는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 두 기자의 취재 과정을 진두 지휘하면서 저널리즘의 빛나는 승리를 이끌어냈다.
하지만 그는 저널리즘 역사에서 철저하게 소외됐다. 지금은 밥 우드워드, 칼 번스타인 두 기자와 함께 벤 브레들리 당시 편집국장만 승리의 주역으로 기억될 따름이다.
■ 워터게이트 특종보도 당시엔 '3인방'으로 통해
초기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니먼랩에 따르면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워터게이트 보도 이듬해인 1973년 5월 7일자에 ‘워터게이트 3인방(Watergate three)'이란 기사를게재했다.
‘타임’의 이 기사는 워싱턴포스트가 워터게이트 특종으로 곧 발표될 퓰리처상 공공서비스 부문 수상이 유력하다고 전망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38세인 배리 서스먼 워싱턴DC 편집자와 칼 번스타인(29세), 밥 우드워드(30세) 등 상대적으로 젊은 언론인들에게 영광이 돌아갈 것 같다.”
서스먼은 실제로 워터게이트 특종 보도 초기에 많은 공을 세웠다.
니먼랩에 따르면 서스먼은 사건 초기부터 워터게이트 전담 편집자였다.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을 워터게이트 특별 취재팀에 발탁한 것도 그였다. 자유분방한 번스타인을 특별 취재팀에 합류시킬 때는 편집국 고위층의 엄청난 반대에 부닥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자신의 뜻을 관철했다. 덕분에 '우드스타인(Woodstein)' 듀오가 탄생할 수 있었다.
우드워드와 번스타인이 공동 저술한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에는 서스먼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그는 우드워드, 번스타인 뿐 아니라 워싱턴포스트의 다른 편집자들보다 워터게이트에 대해 훨씬 상세하게 알고 있었다. 심지어 도서관 사서가 찾기 못한 자료까지도 기억해 낼 정도였다.”
이 정도로 뛰어난 역할을 했던 서스먼은 왜 이후에 잊힌 인물이 됐을까?
■ 책과 영화 연이어 나오면서 두 기자 전면 부각
니먼랩에 따르면 워터게이트 사건 이후 출간된 책과 영화 때문이었다.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은 워터게이트 사건이 일단락된 뒤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이란 책을 출간한다. 이 책은 이후 로버트 레드퍼드와 더스틴 호프만 주연으로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그런데 책 출간 과정부터 서스먼은 조금씩 소외되기 시작했다.
역시 니먼랩에 따르면 사이먼&셧스터 출판사는 처음엔 워터게이트 3인방이 함께 책을 쓰길 원했다. 그런데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 두 기자의 입김으로 서스먼이 필진에서 배제됐다. 이들은 서스먼이 뛰어난 편집자이긴 하지만, 책을 쓸 때는 더 이상 편집자가 필요없다고 판단했다.
밥 우드워드도 나중에 “유감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워터게이트는) 기자들 얘기이지, 편집자 얘기는 아니다”고 말했다.
1974년 봄 출간된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은 곧바로 베스트셀러가 됐다. 덕분에 밥 우드워드, 칼 번스타인 두 기자는 전국적인 스타가 됐다. 그 때 이후 서스먼은 워터게이트 특종에서 더 소외됐다.
책은 약과였다. 1976년 개봉된 영화는 서스먼에게 더 큰 상실감을 안겨줬다.
우드워드와 번스타인의 책을 각색했던 동명의 영화엔 로버트 레드퍼드, 더스틴 호프먼을 비롯해 기라성 같은 배우들이 출연했다. 이 영화는 그 해 아카데미 4개 부문상을 수상했다. 벤 브래들리 편집국장을 연기했던 제이슨 로버즈는 남우조연상을 받았다.
하지만 이 영화에 서스먼은 아예 등장하지도 않았다.
니먼랩에 따르면 당시 영화 제작진들은 중년 백인 편집간부가 너무 많이 등장하는 데 부담을 느꼈다고 한다. 결국 벤 브래들리를 비롯해 해리 로젠펠드, 하워드 시몬스 등 3명만 등장하고,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서스먼은 아예 배제해버렸다.
로젠펠드와 시몬스는 영화 제작을 위해 자료 수집을 하던 알란 파큘라 감독에게 “워터게이트 보도로 워싱턴포스트 내에서 퓰리처 상을 받을 단 한 명을 꼽으라면 배리 서스먼이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이런 설명에도 불구하고 서스먼은 영화에서는 아예 사라져 버렸다.
■ 6월17일은 워터게이트 50주년…다시 저널리즘을 생각하며
‘워터게이트 특종’은 미국 뿐 아니라 전 세계 저널리즘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별이다. 각종 위협을 이겨내고 닉슨 대통령의 불법 행위를 밝혀낸 번스타인과 우드워드 두 기자가 없었다면, 미국 역사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 갔을 수도 있다. 이들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소중한 업적을 이뤄냈다.
하지만 워터게이트 특종은 두 기자만의 공은 아니었다. 기사 바이라인에는 나오지 않지만, 초기부터 두 기자를 잘 이끌었던 배리 서스먼 같은 편집 간부의 역할도 결코 무시 못한다.
그 뿐 아니다. 방대한 사건을 일목요연하게 보도하기 위해 필요한 자료를 제 때 찾아줬던 조사부 기자, 그리고 도서관 직원들. 무엇보다 두 기자의 작업을 가능케 한 워싱턴포스트의 시스템이 함께 이뤄낸 성과다.
역사는 천재적인 소수의 전유물이 아니다. 모스크바 원정 전쟁이 나폴레옹만의 작품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워터게이트 특종 역시 두 기자만의 작품은 아니다.
참고로 퓰리처상 공공서비스 부문은 기사를 쓴 기자가 아니라 해당 언론사에 주는 상이다. 탐사보도가 어떻게 이뤄지는 지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오는 6월 17일은 워터게이트 사건이 발생한 지 50주년이 되는 날이다. 그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그리고 공교롭게도 50주년 직전 별세한 한 언론인을 기억하기 위해, 이 글을 쓰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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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리 서스먼은 2004년부터 2012년까지 니먼저널리즘연구소에서 ‘니먼위치독’이란 사이트를 운영했다. 이 사이트의 모토가 ‘언론이 해야만 하는 질문(Questions the press should ask)’이라고 한다. 그는 또 “올바른 질문을 하는 기자와 편집자들이 위대한 저널리즘을 만들어낸다”는 말도 했다. 요즘 이 말을 자주 되새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