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노벨평화상은 특별한 사람에게 돌아갔다. 거대 권력에 맞서 진실을 보도해 온 필리핀과 러시아 기자 두 명이 공동 수상했다. 시민운동가나 정치인들의 전유물이던 노벨평화상을 언론인이 수상한 건 1935년 독일인 카를 폰 오시에츠키 이후 86년 만이다.
화제의 주인공은 필리핀 언론인 마리아 레사와 러시아 언론인 드미트리 무라토프다.
둘 중에선 특히 마리아 레사란 이름이 눈에 확 들어왔다. 마리아 레사는 필리핀 탐사보도 전문매체 래플러(Rappler)를 이끌면서 두테르테 정권의 비리와 폭력적 행태를 보도하는 데 앞장선 인물이다.
그렇다고 레사 기자와 개인적인 인연이 있는 건 아니다. 지난 해 번역한 책 때문이다. 그 얘기를 하기 위해 칼럼을 시작했다.
두테르테 정권의 폭력·온라인 괴롭힘 맞서면서 언론 역할 수행
나는 지난 해 ‘저널리즘, 허위정보 & 가짜뉴스’란 책을 번역했다. 유네스코 저널리즘 교육시리즈로 나온 책이었다.
이 책은 ‘가짜뉴스’란 말이 왜 무책임하고 엉터리 용어인지 설득력 있게 설명하고 있다. 허위조작 정보와 정보 무질서 현상에 대해서도 깊이 있는 통찰을 담아 냈다. 이와 함께 전 세계 언론인을 대상으로 한 각종 사이버 테러에 대해서도 실감나게 전해줬다.
그 부분을 번역하면서 마리아 레사와 ‘래플러’란 매체를 처음 알게 됐다.
마리아 레사가 발 딛고 있는 필리핀은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이 지배하고 있다. 두테르테는 현재 지구상에서 대표적인 독재자 중 한 명이다. 그는 ‘마약과의 전쟁’을 빌미로 무차별 폭력을 감행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때론 사람들을 동원해 조직적으로 허위정보를 유포했다. 마리아 레사는 이런 허위정보 공세의 주 타깃이 됐다.
마리아 레사와 래플러의 활약이 더 감동적인 건 이런 상황 때문이다. 그들은 두테르테 정권의 압박과 폭력에 맞서 저널리즘의 진수를 보여줬다.
그 과정에서 물리적인 폭력에 노출되기도 했다. 때론 무차별적인 ‘가짜뉴스(fake news)’ 공세를 감내해야 했다. 마리아 레사는 이 모든 위협과 폭력 속에서 저널리즘의 꽃을 활짝 피워냈다.
‘저널리즘, 허위정보 & 가짜뉴스’에 소개된 마리아 리사 이야기를 옮기면서 가슴 뭉클한 감동을 맛봤다.
그 중 한 구절을 소개한다.
“마리아 레사는 “못생긴 여자, 개, 뱀이라고 불렸으며 강간과 살해 협박을 받았다”고 말했다. 레사는 살해 협박 횟수를 세다가 포기했다. 게다가 그는 #마리아레사 체포(#ArrestMariaRessa), #그녀를상원으로 (BringHerToTheSenate) 같은 해시태그 캠페인의 타깃이 됐다. 이 캠페인은 온라인 군중의 공격을 선동하고 레사와 ‘래플러’의 신뢰를 떨어뜨리며, 그들의 보도를 위축시키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이 책에서 레사는 "사법 절차를 따르지 않은 살인에 대해 비판하거나 의문을 제시한 사람들은 누구나 공격을 받았다. 심하게 공격받았다. 여성에게 가해진 공격은 더 끔찍했다. 이 시스템은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을 침묵시키려 하는 것이다. 저널리스트를 길들이기 위해서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온라인 괴롭힘 호소에 저커버그는 농담으로 넘기기도
언론인을 대상으로 한 물리적 폭력의 역사는 꽤 깊다. 많은 언론인들이 전쟁이나 범죄를 취재하고 보도하다가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마리아 레사는 ‘온라인 괴롭힘’ 문제도 심각하다고 주장한다. 특히 여성 언론인을 대상으로 한 사이버 공격은 심각한 수준이다.
이런 위협에 대처하는 마리아 레사의 노하우도 상당히 흥미로웠다. 그는 사안의 심각성에 대해 인지하고, 영향을 받은 직원들에게 심리적인 지원을 제공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또 각종 공격에 대응하는 최고 무기는 ‘탐사 저널리즘’이란 그의 고백도 감동적이었다.
그는 또 “온라인 괴롭힘을 경감시키고, 적절하게 관리될 수 있도록 플랫폼에 공식 요청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특히 페이스북과 트위터 같은 거대 플랫폼에 온라인 괴롭힘과 허위 조작정보 문제에 대해 좀 더 강력하게 대처해줄 것을 요구했다고 밝혔다.
그런데 이런 심각한 문제 제기를 받은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최고경영자(CEO)의 대처는 상당히 실망스러웠다고 한다.
칼럼니스트인 박상현 님이 ‘Otter Letter’를 통해 이 부분을 잘 소개해줬다. 그 부분을 그대로 옮긴다.
“그가 저커버그에게 필리핀 사람들의 97%가 페이스북을 사용하기 때문에 소셜미디어의 책임이 크다고 하자 저커버그는 "마리아, 그럼 나머지 3%는 왜 페이스북을 안 쓰죠?"라고 반문했다고 한다. 목숨을 내걸고 허위정보와 싸우는 언론인의 호소에 세계적인 젊은 갑부는 농담으로 대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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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저널리스트인 마리아 레사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권력 감시란 언론 본연의 임무를 묵묵히 수행해 온 그의 뛰어난 업적을 감안하면, 역대 그 어느 수상자 못지 않은 충분한 자격을 갖고 있는 것 같다.
레사 이야기를 새롭게 되새기면서 플랫폼이 지배하는 시대 언론의 역할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더불어 전 세계 수 십 억 명의 소통 공간으로 자리잡은 페이스북 최고경영자의 가벼운 현실 인식을 지켜보는 마음은 무겁기 그지 없다. 최근 페이스북을 둘러싼 각종 추문과 사고가 우연이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