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품의 시대에 노동의 가치를 생각한다

[이균성의 溫技] 진정한 경제적 자유

데스크 칼럼입력 :2022/05/27 08:33    수정: 2022/05/27 11:13

우리 매체는 주로 미래를 이야기한다. 과학기술이 산업과 시장 그리고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는 지에 관심이 많다. 여기서 변화는 ‘혁신’과 거의 동의어이며, 혁신은 또 ‘미래’와 거의 같은 말이다. 우리 능력의 한계 탓에, 이 변화를 추적하는 그물은 매우 성글고, 이 변화를 내다보는 전망은 흐릿할 때도 많다. 그런 이유로 우리의 선의(善意)와 달리 우리의 일이 가끔 시장을 왜곡할 때도 없지 않다.

‘거품의 시기’에 그런 경우가 특히 많다. 우리가 주로 이야기 하는 소재는 4차 산업혁명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들이다. 반도체 전기차 바이오 메타버스 블록체인 가상자산 등등. 이런 분야가 산업과 시장과 노동과 삶을 변화시킬 것이라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것들은 변화와 혁신의 토대이자 동력이다. 그쪽으로 자원을 집중하는 것이 옳은 방향이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하는 거품이다.

[서울=뉴시스] 김진아 기자 = 업비트와 빗썸이 ‘루나(LUNA)’에 대한 거래지원을 종료를 공지해 혼란이 계속되고 있는 16일 서울 서초구 빗썸 고객센터 태블릿에 ‘루나(LUNA)’ 시세가 표시되고 있다. 업비트와 빗썸은 루나에 대한 거래 지원을 각각 오는 20일, 27일에 종료한다고 발표한 바 있다. 2022.05.16.

고백하건데, 우리는 ‘방향’을 짐작할 수는 있으나, 그 ‘속도’를 정확히 가늠할 역량은 없다. 안타까운 것은 그게 우리뿐이 아니어 보인다는 사실이다. 어떤 전문가도 심지어는 해당 기술을 개발하고 그것으로 사업을 하는 당사자마저 그럴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속도에 대한 무지가 거품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변화와 혁신의 과정에서는 어쩔 수 없이 거품이 발생하는 게 자연스럽다.

지금이 그런 ‘거품의 시기’다. 또 그 거품이 빠지면서 세계 경제가 요동치는 상황이다. 문제는 거품이 빈익빈부익부를 심화시킨다는 데 있다. 거품은 경제적 약자를 더 궁지로 내몰고 결과적으로 경제적 강자를 더 강하게 만드는 쪽으로 작동한다. ‘경제적 자유’라는 꿈을 향해 새롭게 자산 투자에 나선 이들이 거품 붕괴로 피해를 입고, 투자하지 않은 보통사람도 높아진 물가 때문에 고통 받는다.

코로나19 이후 급격히 팽창한 어휘가 바로 이 ‘경제적 자유’다. 속도에 대한 무지가 거품을 발생시켰고 그 거품이 ‘경제적 자유’에 대한 꿈을 풍선처럼 부풀린 거다. 투자하면 이른 시일에 ‘경제적 자유’를 얻을 것으로 믿겨졌고, 그 속도를 더 높이기 위해 있는 돈 없는 돈 끌어다 쏟아 부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꺾인 생산과 소비를 부추기기 위해 각국 정부가 앞장서서 풍선에 바람을 넣었다.

거품은 자본시장이 생긴 이래 가장 크게 부풀었지만 투자 경험이 적은 신출내기일수록 그 사실을 몰랐다. 거품이 꺼지면서 ‘경제적 자유’를 향한 꿈은 더 멀어지고 갚아야 할 이자는 더 늘어났다. 삶은 더 팍팍해지고 노동은 더 고달퍼졌다. 공짜 점심은 없다는 말을 새삼스럽게 되새기게 됐다. 우리는 늘 불안했다. 우리가 쓰는 방향에 대한 기사가 독자로 하여금 속도를 오독하게 하고 있지는 않은지.

방향은 대체로 과학이자 이성의 영역에 속하지만 속도는 그 범위를 벗어나는 경향이 있다. 객관화할 수 없는 심리와 분위기에 편승하는가 하면 추적하고 분석해 전망하는 일을 허망하게 만들어버리곤 한다. 우리는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 방향과 속도의 차이를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최선을 다해 방향을 찾되 속도로부터는 자유로워야 한다. 고수는 늘 방향에 집중하고, 하수는 속도에만 연연한다.

거품의 시기에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 자유’라는 꿈을 위해 속도에만 매달려 과속했던 까닭은 사회적으로 노동의 가치가 심하게 훼손됐기 때문이다. 노동은 분명 생계의 수단이다. 그 점에서 고달픈 측면이 없지 않다. 노동은 그러나 존재의 본질적 가치이기도 하다. 인간이 빛나는 것은 노동을 할 때이기도 하다는 거다. 생계수단인 노동은 그래서 존재의 의미와 존재가 누리는 재미로 확대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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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적 자유’를 ‘노동으로부터의 탈피’에서 찾는 게 아니라 ‘가혹한 수단으로서의 노동’을 ‘의미와 재미를 갖춘 노동’으로 혁신함으로써 찾는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정치가 할 일이 바로 그것이다. 누군가 소를 키워야만 하는 게 현실이라면 그 일이 의미 있고 즐거운 것이 되게 해야 한다. 모두 그것을 하지 않으려한다면 누가 소를 키우겠는가. 정치가 속도만 고민하게 되면 소는 굶어죽게 될 거다.

마침 기업들이 나서서 그 어느 때보다 ‘사회적 가치’를 주창하고 있다. 기후변화와 환경 문제 등이 주요 안건이지만 기업의 ‘사회적 가치’를 높이는 데는 노동도 뺄 수 없다. 노동자를 오직 수단과 비용으로만 계산하지 마라. 그들이 일에 보람과 재미를 느끼게 하라. 그것이 기업의 사회적 가치를 높이는 길이고, 우리 땅에 더 많은 소가 기뻐 춤추게 하는 길이다. 노동의 가치는 그렇듯 숭고한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