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 삼성 현대차 등 주요 그룹이 일제히 향후 5년간 투자계획을 발표했다. 수조원에서 450조원까지 다양하다. 채용 계획도 덧붙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지금은 2022년이라는 점이다. 인간은 흔히 시간을 유용하게 쓰기 위해 분절한다. 1년을 12달로 나누고 하루를 24시간으로 나누는 게 대표적이다. 그래서 2022라는 숫자가 재미있다는 이야기다. 왜 하필 2022년에 향후 5년 계획을 발표하나.
그것도 일제히. 답은 하나다. 대통령에 대한 선물 혹은 립 서비스. 기업가치가 수백조원씩 하는 글로벌 기업인만큼 진짜 사업계획은 자신들의 시간표에 따라 흘러갈 것이다. 그리고 그 계획을 약간 변조하거나 조금 더 뻥튀기해 발표한 게 24일치 각사의 보도 참고용 자료일 터다. 일제히 발표되고 있는 것으로 봐서 그 일정마저 누군가에 의해 조율됐을 터. 그런 이유로 자료는 텅 비어보였다.
매체마다 호들갑을 떨며 크게 보도했지만 별로 울림이 없는 까닭이 그것 아니겠는가. 투자자든, 소비자든, 협력업체든, 입사희망자든 그 기업에 이래저래 이해관계가 얽혀있을 사람마저 그 거대한 숫자들을 보고서도 흥분하지 않는 것도 그런 까닭이겠다. 그 엄청난 발표가 주식시장에 전혀 반영되지 않는 것을 보라. 어떻게 수백조원에 달하는 투자가 기업가치에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있겠나.
이런 요식행위는 중단할 필요가 있다. 두 가지 점에서 그렇다. 첫째, 정치권력이 기업의 상전노릇을 하고 있다는 방증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규제 권한과 사법 권력을 바탕으로 협박하며 정치권력 입맛에 맞게 길들이기를 하는 관례로 여겨질 수 있다. 정치권력이 도를 넘어 불법적인 준조세를 강요하다 정권이 통째로 순식간에 몰락했던 경험을 했던 게 불과 5년 전이라는 걸 기억하여야 한다.
둘째, 이 식상한 스토리가 반복되면 숫자가 숫자로서의 기능을 상실할 수 있다. 정부와 기업에서 나오는 모든 숫자는 누군가의 피와 땀이 어린 것이다. 그래서 그 숫자들은 진실한 것이어야 하고 그렇게 읽혀져야 한다. 그래야만 모든 이해관계자들이 그 숫자에 맞게 현명한 대응을 준비할 수 있는 것이다. 숫자들이 공허하게 느껴지기 시작하면 모든 주체들은 혼란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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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공허한 압박과 립 서비스는 비단 이번 정부에서만 일어난 일도 아니고 어쩌면 우리나라에서만 벌어지는 일도 아니다. 사실 한편으로 생각하면 긍정적인 측면도 없지 않다. 기업이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면 신임 대통령 낯도 세워주고 국가 전체에 희망도 불어넣는다는 차원에서 페이퍼워크를 한 번 더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장점이 앞의 두 가지 폐해를 상쇄할 수 있을 진 잘 모르겠다.
윤 대통령은 새롭기 위해 청와대를 국민한테 돌려줬다. 기업을 향한 마음도 그랬으면 한다. 대통령은 누구보다 바쁠 것이다. 기업도 그렇다. 정글 속에서 무한경쟁을 해야 한다. 그 경쟁에서 생기는 애로사항을 듣기 위해 기업인을 만나는 건 얼마든지 환영받을 일이다. 그러나 그들을 들러리로 새울 가능성이 눈곱만큼이라도 있다면 동원하지 말아야 한다. 청와대를 해방한 게 그런 마음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