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이 “3차 세계대전의 위험이 실재한다"고 말했다고 여러 매체가 보도했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에 관여하려는 서방 세계에 대한 경고장인 셈이다. 그 가능성을 높게 보는 전문가들은 적은 듯하다. 핵을 보유한 국가들 사이에 벌이는 전쟁이 얼마나 참혹할 지는 누구나 짐작하는 바다. 그 가능성을 논하는 것 자체가 끔찍한 일로 여겨질 정도다.
앙겔라 메르켈 전 독일 총리라면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다. 지금부터 8년 전인 2014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을 때 우크라이나군을 돕기 위해 중무장 병력을 파병하는 방안에 대해 당시 메르켈 총리는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와 달리 반대했다. 무력은 분쟁을 종식하는데 대부분 실패하고 오히려 분쟁을 심화시킨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대신 그는 분쟁기간에 푸틴과 38번이나 대화했다.
그해 9월 분쟁 7개월 만에 메르켈과 푸틴은 최후 협상을 벌이고 휴전에 합의했다. 결과적으로 합의는 불완전한 봉합이었을 수도 있다. 휴전 이후에도 산발적인 전투가 계속됐고, 올해 들어서는 전면전이 개시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완전한 평화라도 그것이 전면적인 전쟁보다는 낫다는 게 메르켈의 생각이다. 지금 전쟁의 문제는 메르켈 같이 힘 있고 끈질긴 평화주의 중재자가 없다는 점이다.
메르켈이 독재자 푸틴과 온갖 모욕을 감수하며 7개월간 38번이나 대화한 것은 독일 사회학자 헤르프리트 뮝클러가 쓴 ‘30년 전쟁:유럽의 재앙~’이란 책의 덕도 크다. 이 책은 유럽이 16세기에 악독한 종교전쟁을 벌이고 왜 17세기에 다시 끔찍한 30년 전쟁을 벌였는지 1000페이지로 알려주고 있다. 그 이유가 뜻밖이다. 70여년의 세월이 흘러 모두가 전쟁의 참혹함을 잊었기 때문이라는 거다.
재임 16년 동안 메르켈이 가장 고민했던 게 이 대목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70여년이 지난 지금 유럽인은 물론이고 세계 각지의 인류가 과연 전쟁에 대해 현실적인 감각을 제대로 유지하고 있는지 의문스러웠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세계 주요 국가에서 권위주의자나 독재자가 지도자로 잇따라 선출되는 현실이 고통스러웠을 것 같다. 또 극우 정당이 기승을 부리는 것도 마찬가지였겠다.
메르켈은 보수당 출신이지만 독재와 권위주의에 끝없이 반대하는 정치를 해왔다. 히틀러 시절 조국이 우크라이나 같은 이웃 국가 국민을 어떻게 학살했는지 잘 알고, 동독 출신이어서 스탈린주의자들의 폭압이 어떤 것인지도 35년간 직접 체험했기 때문이다. 독재와 권위주의자들이 인류를 처참한 지옥으로 내몬 2차 대전이 종식되고 7~80년이 흘러 다시 세계 곳곳에서 권위주의자가 득세하고 있다.
최악의 상황으로 흘러가는 국제 정세를 메르켈만 걱정했던 것은 아닌 모양이다. 24일(현지시간)에는 억만장자 조지 소로스가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2022년 세계경제포럼(WEF) 참석자들에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제3차 세계대전의 시작을 알리는 것일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결국 전쟁이 중단되더라도 상황은 결코 예전으로 되돌아가지 않을 것"이라며 암울한 전망을 계속해나갔다.
소로스는 “이 전쟁으로 인해 전염병, 기후 변화, 핵전쟁 등 인류의 다른 문제들이 뒷전으로 밀려나야 했다”며 “문명이 살아남지 못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해법은 메르켈과 다른 것 같다. 그는 "러시아가 하루 속히 패배해야 하며 이를 위해 서방 세계가 우크라이나가 원하는 모든 지원을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푸틴이 핵단추를 누르기 전에 전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뜻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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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로스의 논리가 맞다면 메르켈이 2014년에 기울였던 노력은 헛된 것이었다. 푸틴이 지금보다 힘이 덜 셌던 그 때 휴전을 도모하는 대신 러시아를 섬멸하는 더 큰 전쟁을 했다면 지금과 같은 우려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때 더 큰 전쟁을 했다면 3차 세계대전은 당시에 일어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메르켈과 소르스의 생각 가운데 무엇이 더 현명한 판단일지는 쉽게 알 수가 없다.
다만 부정하지 못할 분명한 사실은 세계적으로 전쟁의 참혹함을 잊고 사는 사람의 숫자가 70~80년 전보다 지금 훨씬 더 많아졌다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