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균성의 溫技] ‘닷컴 붐’ 때는 없었던 ‘디지털 뉴딜’의 세 가지 악조건

극심하게 ‘기울어진 운동장’

데스크 칼럼입력 :2020/08/06 07:46    수정: 2020/10/05 13:25

정부가 포스트 코로나 대응책으로 추진하는 ‘한국판 뉴딜’은 방향성에서 옳은 것으로 판단된다. 그 핵심이 ‘디지털 뉴딜’과 ‘그린 뉴딜’이라는 것 또한 기술 변화와 시대적 요구에 적절하게 부합한 결정으로 보인다. 이는 20여 년 전 김대중 대통령이 추진했던 정책(일명 DJ노믹스)과 비교될 만 하다. 돌발적으로 부닥친 국가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만든 범(汎)국가 뉴딜 정책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두 정책은 배경과 방향에서 공통점이 많지만 현실과 구체적인 측면에서는 달리 고려해야 하는 차이도 적지 않아 보인다. 한국판 뉴딜, 특히 디지털 뉴딜을 추진할 때 이 점이 잘 반영됐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 20여 년 전의 정책을 잘 벤치마킹하고 계승하되 달라진 현실에 맞게 변주(變奏)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해 보인다. 다소 거칠겠지만, 이 글에서는 그에 관한 몇 가지 포인트를 말하려 한다.

김대중 대통령의 최대 숙제는 이전 정부가 불러온 국제통화기금(IMF) 환란 위기를 탈출하는 것이었다. 결과론이겠지만 그 점에서 DJ노믹스는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하는 데 인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신자유주의에 따른 비정규직 양산 등 추후에 적잖은 숙제를 남긴 것도 사실이지만, IMF 환란을 성공적으로 극복했고, 국내 산업구조를 혁신해 새로운 생태계를 만들었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한국판 뉴딜 계획을 발표하고 있는 문재인 대통령(이미지=청와대)

IMF 위기는 30년 이상 지속된 대기업 중심 경제구조와 방만 경영이 원인이 됐다. DJ노믹스의 최대 과제는 이를 신속하고 확실하게 구조조정하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미래지향적인 새로운 산업 생태를 만드는 것이다. 전자(前者)는 외과 집도의 같은 강심장이 요구되는 일이고, 후자(後者)는 척박한 땅에서 작물을 키워내야 하는 농부의 자세가 필요한 일이었다. 결과적으로 둘 다 꽤나 성공적이었다.

문재인 정부도 IMF 환란 위기 때와 비슷하거나 아니면 더 혹독한 상황에 놓여 있다. 그때보다 지금이 더 혹독한 건 세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그때와 달리 지금은 우리 경제가 구조적 저성장 과정에 처해 있다는 점이다. 둘째, 그때와 달리 지금의 위기는 글로벌 문제라는 점이다. 즉 우리만 잘 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셋째, 새로운 산업 생태계의 실체가 더 흐릿해졌다는 점이다.

위의 두 가지는 다른 기회에 논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셋째 항목에 집중하려 한다. 20년 전 닷컴 붐과 지금의 디지털 뉴딜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살핌으로써 디지털 뉴딜을 더 성공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고려해야 할 사항을 공유하는 게 이 글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DJ노믹스의 최대 성과는 아마도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별로 뒤지지 않은 ‘인터넷 산업 생태계’를 새롭게 만들어냈다는 사실일 것이다.

대기업으로 하여금 초고속인터넷망을 속도감 있게 깔게 하고 이를 기반으로 활용 서비스를 제공하려는 벤처기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하는 정책이 제대로 통한 것이다. 그 결과 그때 시작한 벤처기업 다수가 지금은 굴지의 대기업과 시가총액 최상위권을 다투는 거대기업으로 성장했다. 많은 기업이 등장했고 상당수가 성공했으며 그로 인해 수많은 일자리가 생겼고 국민 생활 또한 훨씬 더 편리해졌다.

디지털 뉴딜은 이 성공 모델의 변주라고 할 수 있다. 초고속인터넷망과 인터넷 서비스는 각각 5G와 데이터·AI로 변주됐다. 중요한 것은 DJ노믹스의 경우 확실하게 과거에 없던 ‘인터넷 산업 생태계’를 남부럽지 않게 만들어냈다는 사실이다. 디지털 뉴딜의 목표도 그것일 테다. 과거에는 없었기에 새로우면서 남부럽지 않은 ‘데이터 산업 생태계’. 문재인 정부와 우리는 과연 그걸 만들어낼 수 있을까.

그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정부와 업계는 정책을 내놓거나 사업을 운영할 때 20년 전과 지금은 달라진 다음 세 가지 차이를 거듭거듭 곱씹었으면 한다. 첫째, 데이터·AI는 얼핏 보기에 새로운 시장 같지만 현실적으로는 전혀 새로운 게 아닐 수 있다는 점이다. ‘그때처럼 많은 기업이 새로 등장하고 그중 상당수가 거대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낙관할 수만은 없다는 뜻이다.

그때 인터넷 서비스 시장은 사실상 무주공산이었다. 아무도 안 했기 때문이다. 아이디어가 곧 사업이었다. 서비스를 구현할 수만 있으면 됐다. 플레이어가 수도 없이 쏟아질 수 있었다는 뜻이다. 지금은? 곳곳에 이미 사업자가 존재한다. 그때 성장한 벤처기업은 이미 수조 수십조의 대기업이 됐고 엄청난 시장 장악력과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시장과 기술은 그들 편이지 벤처기업 편일 리가 없다.

기존 사업자들 사이에서 시장이 고도화할지언정 새로운 사업자에게 엘도라도일 수 없다는 뜻이다. 둘째, 그 거대 기존 사업자마저 안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다국적 기업, 특히 미국과 중국계 기업의 공습 때문이다. 비즈니스 초점이 인터넷에서 모바일로 옮겨진 지난 10여 년 동안 이 현상은 가속화하고 있다. 데이터의 집산 사업인 클라우드와 차세대 핵심 데이터가 될 동영상 콘텐츠가 특히 그렇다.

셋째, 위 두 요소와 비슷한 맥락이지만 데이터·AI는 20여 년 전의 인터넷 서비스와 달리 본질적으로 벤처기업의 아이템이라기보다 이미 소비자 접점을 극대화한 대기업에 적합한 비즈니스일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는 점이다. 데이터를 기반으로 하는 사업인데 이미 그게 있는 대기업과 이제부터 그걸 모아야 할 신생기업의 승부는 너무 뻔해 보이지 않는가. 단지 아이디어만으로 극복이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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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 요소는 얼핏 보기에 간단해보이지만 사실 신생기업에겐 거의 회복 불가능의 기울어진 운동장일 수도 있다. 이 기울어짐이 존재하는 한 완전히 새로운 기업들이 20여 년 전처럼 쏟아질 가능성은 매우 적고 설사 나온다 하더라도 지금의 네이버나 카카오처럼 성장할 가능성은 더 적어 보인다. 물론 지나치게 비관적인 생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려가 있다면 고려해보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상황이 이런데도 돈은 또 그때처럼 막대하게 풀릴 것이다. 그 돈은 황무지에서 새싹이 트길 원하는 마중물과 같을 것이다. 그러니 일단은 반갑다. 하지만 한편으론 두렵다. 그 물이 싹 틔울 씨가 얼마나 묻혀있을지 걱정스럽기 때문이다. 돈을 분배하는 곳이나 받는 곳이나 신중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대하길 바란다. 그 돈은 어찌됐건 나라 경제의 운명을 걸고 바쳐지는 국민의 피와 땀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