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낙연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차기 대선주자 여론조사에서 압도적 지지율로 1위를 달리고 있는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그의 화법(話法)도 한 몫 했을 듯하다. 그가 말하는 방식은 여느 정치인과 꽤 다르다. 직설(直說)보다는 은유(隱喩)를 선호한다. 상대가 공격을 해오더라도 그대로 맞받아치기보다 돌려 말하면서 정곡을 찌른다. 공격하던 상대가 스스로 지쳐 무장해제 되는 광경을 자주 목격하곤 했다.
모두가 이 스타일을 좋아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지지자는 그의 화법에서 인간으로서의 품격과 전문가로서의 예리함을 동시에 발견했을 것이다. 반대하는 사람은 그런 화법 때문에 오히려 ‘줏대 없는 인간’이라는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를 지지하든 그렇지 않든 많은 사람이 그런 화법을 한번쯤 배워보고 싶었을 듯도 하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대화의 어려움을 다들 겪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화(對話)는 사실 사람 일 중에서 가장 어려운 것일지도 모른다. ‘대화의 달인’이라 할 수 있는 이 의원마저 아주 가끔은 설화(舌禍)에 휘말린다. 1일에는 “남자는 소녀가 엄마로 변하는 경험을 못해 철이 안든다”는 말이 논란이 됐다. 출산과 육아의 고통에서 상대적으로 큰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여성의 현실을 잘 파악하고 해결해야 하다는 것이 본의였겠지만, 그 뜻은 오간데 없이 사라져버렸다.
정치권에선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다. 달은 보지 않고 가리키는 손만 놓고 싸움질하는 게 어쩌면 그들의 숙명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런 일은 비단 정치권에서만 벌어지는 게 아니다. 대화가 소통의 수단이라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아주 자주 단절의 계기가 되기도 한다. 연인 사이에, 가족 사이에, 회사 내 동료 사이에, 사업 파트너와, 그외 모든 관계에서 우리는 매일 소통하면서 사실은 단절한다.
대화는 대체 왜 이렇게 어려운 것일까. 그 이유는 뜻밖에도 간단한 것 같다. 대화의 목적을 설득(說得)에 두기 때문일 것이다. 문제는 사실상 설득이 불가능한 경우가 아주 많다는 데 있다. 겉으로 보기에 설득된 것처럼 보이는 경우도 실상은 설득이라기보다 한 쪽의 강요와 한 쪽의 희생이 겹쳐진 것일 뿐이다. 그게 누적되면 관계는 폭발하고 단절된다. 우리는 매일 그것을 목격하며 살고 있다.
대화의 목적이 설득인 한 결국 그것은 관계 사이의 전쟁일 뿐이다. 우리 삶이 팍팍하고 힘든 이유도 매일 그 전쟁을 치러야하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런데 그 전쟁 같은 지옥에서 벗어나는 일도 사실은 뜻밖에 간단하다. 대화의 목적을 바꾸는 것이다. 설득이 아니라 공감으로. 그럴 경우 대화의 실효성이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반대로 순도 높은 설득에 성공할 수도 있을 거다.
기업과 소비자의 대화 방식을 예로 들어보자. 공급자 주도형 상품을 만들어 소비자를 설득하기 위해 많은 돈의 홍보 영상물을 만드는 기업과 미리미리 소비자의 애로와 요구사항에 세심하게 귀 기울여 그걸 해결해주는 상품을 만드는 기업이 있다면 어느 쪽이 더 설득력을 갖겠는가. 아마 후자일 것이다. 타깃 마케팅이네 빅데이터네 하는 용어 자체가 그런 시대 변화를 실감한 데서 태어난 것이리라.
직장 내에서도 이치는 같겠다. 이미 구닥다리가 돼 어디에나 존재하는 노하우를 경전처럼 되뇌고 강요하는 리더를 가진 팀과 팀원의 아이디어가 봇물처럼 터져 나오도록 귀 기울이는 리더를 가진 팀이 있다면 어느 쪽이 더 큰 성과를 내겠는가. 아무래도 후자 아니겠는가. 이런 이치는 어쩌면 부부 사이에도, 부모 자식 간에도 다 통할 것이다. 그럴 때야 대화가 전쟁이 아니라 소통이 되는 것이다.
관련기사
- 이재용 부회장은 왜 혐의를 전면 부정하는 걸까2020.06.10
- ‘상시 재택근무’ 가능 기업 주가 상승 시대2020.05.22
- 이름만 ‘n번방 방지법’ 다시 생각해보자2020.05.19
- 포스트 코로나 전략, AI+X가 핵심이다2020.05.14
컨베이어 벨트 시절의 생산성은 인간의 부품화로 상징된다. 한 마디로 시스템에 인간을 끼워 넣는 방식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걸 설득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런 방식은 이미 시효를 다 했다. 4차산업혁명 시대의 생산성은 어쩌면 차이에 대한 공감에서 창출될 지도 모른다. 나 아니 다른 것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야 말로 창의적인 아이템이 솟아나는 원천인 것이다. 그걸 찾아가는 과정이 곧 대화다.
이낙연 의원을 전혀 알지 못하지만 그의 화법이 많은 이의 공감을 얻는 까닭도 거기에 있을지 모른다. 설득하려는 대화일수록 실패하기 쉽고, 공감하려는 대화일수록 성공할 확률이 높다. 전자는 빠를 수 있지만 지속가능하지 않고, 후자는 느릴 수 있지만 울림이 크고 오래 갈 수 있다. 문제는 우리 모두 그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설득한답시고 누군가와 싸우며 단절의 벽만 쌓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