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자주 ‘시대에 뒤떨어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특히 유튜브와 동영상을 대할 때 그런 생각이 들곤 한다. 시대를 따라가고자 하는 고민이 없지는 않다. 아니 일자리에 대한 위기감 때문이라도 그 고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실제로 틈 날 때마다 잘 팔리는 유튜브 콘텐츠를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이리저리 알아보고 있기도 하다. 그 고민을 나눠보고자 한다.
머리 한 켠에서 동영상이 맴돌게 한 사람은 경제신문에 다닐 때 만났던 선배다. 당시 그의 필생의 업(業)은 과학 칼럼니스트였다. 그 꿈은 접어야만 했다. 이유가 뜻밖이었다. 돈 때문이다. 칼럼에 대한 회사의 대우는 참담할 정도였다. 수십 년 일한 논설위원 연봉이 신입기자 수준에 불과하였다는 것이다. 지금 선배가 택한 ‘인생 2모작’은 동영상이다. 방송사 은퇴자들과 연대해 비즈니스를 하고 있다.
“글로는 독립할 수 없었는데 동영상은 자립의 기회를 줬다”는 게 선배의 ‘동영상 예찬’이다. 글에 관한 한 존경했던 선배이기에 그 말이 한 편으로 참담했고(그 선배보다 훨씬 부족한 나는 어떻게 살라는 말인가 하는 점에서), 다른 한 편으로는 다행이다 싶었다. 가보지는 않았지만 다른 길이 존재한다는 사실 만으로도 왠지 보험 하나를 들어놓았다는 망상에 가까운 착각(술 탓이겠지만) 때문이다.
선배의 ‘인생 2모작’을 살피면서 동영상을 하기 위해서는 글과 다른 테크닉(혹은 문법)을 배우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촬영하고 편집하고 유튜브에 올리는 기술 말이다. 대학 친구인 동영상 전문가를 찾아갔다. 그는 방송 프로그램 제작사를 운영한다. KBS와 EBS 등 방송사에 꽤 잘 알려진 고정 시리즈물 4편을 공급하고 있다. 유튜브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설명하고서 전문가로서 조언을 부탁했다.
대화는 초장부터 참담했다. 말 없는 비웃음이 그의 소리 없는 일성이었다. “왔으니 밥이나 먹고 가.” 실제 첫 마디는 이거였다. 예의였던지 ‘쓸 데 없는 소리 하지 말고’는 혼자 삼키고 내뱉지는 않았다. 대신 밥 한 술도 뜨기 전에 메스같이 예리한 한 마디가 날라 왔다. “넌 안 돼.” 명쾌한 스트레이트였다. “수십 년 방송 밥 먹은 사람들도 안 되는데 네가 무슨 수로 할 수 있겠어. 개꿈은 꾸지마.”
그의 논지는 대충 이렇다. “유튜브 현상을 단순히 문자와 동영상의 차이로만 보는 건 멍청한 짓이다. 신문과 방송의 차이가 아니다. 단지 그 차이라면 방송 출신이 유튜브를 장악하는 게 맞다. 하지만 방송은 유튜브에서 안 통한다. 신문과 방송의 차이보다, 방송과 유튜브의 차이가 100배는 더 크다. 그 이유를 알아야만 한다. 그런 점에서 넌 방송은 할 수 있어도 유튜브는 죽었다 깨어나도 안 된다.”
그렇다면, 유튜브 콘텐츠도 타이틀은 다 TV라고 하는데, 방송과 그것은 과연 무엇이 다르기에 수십 년 일한 방송 전문가들조차 유튜버들한테 꼼짝도 못하는 것일까. 유튜브를 하려면 결국 이 질문에 답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 그 친구의 생각이다. 첫째, 주체가 다르다. 방송은 조직이 만든다. 조직은 전문직 직장인에 일을 시킨다. 유튜브는 개인 마니아가 만든다. 결국 방송은 일이지만 유튜브는 취미다.
이 차이로 많은 것이 달라진다. 먼저 목표가 달라진다. 방송은 겉으로 드러낸 목표가 있긴 하지만 실제로는 시청률과 그로 인한 수익이 궁극의 목표다. 이게 유지되지 않으면 방송은 더 이상 할 수 없다. 유튜버의 목표는 그보다 재미에 가깝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다. 그냥 좋아서 한다. 돈을 벌든 말든 싫증날 때까지 한다. 그러다 돈을 벌면 더 좋을 뿐이다. 목표의 차이는 지속성의 차이가 된다.
돈을 목적으로 한 조직이 재미로 한 개인을 이길 수 없는 근본적인 차이가 그 지속성에 있다. 유튜버 중에는 돈을 목적으로 시작한 사람도 물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조직 방송인들처럼 결국 목표 달성이 쉽지 않기 때문에 중간에 포기할 가능성이 많고, 지속적이고 장기적으로 인기를 얻는 유튜버의 공통점은 그 일 자체를 미친놈처럼 즐긴다는 사실이다. 유튜버를 할 거면 취미로 해야만 한다는 거다.
그런 뒤에 인기를 얻어 돈까지 번다면 그건 덤일 뿐이다.
둘째, 시청자가 다르다. 이 말은 시청자 층이 다르다는 뜻이 아니다. 그보다는 방송을 볼 때와 유튜브를 볼 때 시청자의 마음 자세가 다르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시청자로서, 방송과 유튜브에 기대하는 바가 다르다는 뜻이기도 하다. 가장 큰 차이는 공공성과 재미, 그리고 균형 감각과 편향이다. 유튜브 시청자를 잡으려면 공공성보다 재미, 균형 감각보다 편향에 더 치중할 수 있어야 하는 거다.
1세대 유튜브 크리에이터인 대도서관도 그렇게 말한다. 그는 3일 밤 한 라디오 시사프로그램의 임시 진행자로 나와 ‘유튜브에서 인기를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두 가지로 대답했다. “방송에서 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하라”는 점과 “텐션(tension)을 주라”는 것이었다. 유튜브에서 ‘확증편향’이 심해지고 있다는 점도 인정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방송도 끊임없이 유혹받지만 모두 금기다.
그러니 그 금기에 단련된 방송인들이 유튜브에 어찌 쉽게 적응할 수 있겠는가. 방송인이 그러는 데야 하물며 문외한이야 두 말할 게 뭐 있겠는가. 그렇지만 친구에게 답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넌 죽었다 깨어나도 안 되니, 그걸 잘 할 수 있는 친구들을 찾아 취미 생활 열심히 하도록 무조건 밀어줘.” 그게 유일한 답이었다. 어떻게 밀어주지? 크리에이터 발굴 지원 사업? 에구. 너무 나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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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에이터는 밀어줘서 크는 게 아니라 혼자 알아서 큰다.
유튜브에의 관심이 그렇다고 무소득인 것만은 아니다. 다른 것을 끌어안기 위해 한 손과 세 귀가 필요한 섭(攝)으로서의 융합(融合)의 관점(이 표현은 여성학자 정희진의 시각을 빌림)에서 시대의 변화와 새로운 주체를 조금이라도 이해하려면 유튜브를 더 면밀히 들여다봐야 한다는 점을 느낀 것만으로도 소중한 기회였다. 요즘 누구나 늘 유튜브를 보지만, 보는 것이 곧 유튜브를 아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