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정부가 일본의 핵심소재 수출규제에 대한 대응방안을 모색하는 가운데 다자 간 외교적 논의를 비롯한 세계무역기구 제소, 상응조치 등이 문제해결을 위한 유력한 해법으로 제시됐다.
16일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은 ‘일본의 대(對)한국 수출규제 강화에 대한 국제통상법적 검토’라는 보고서를 내고,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와 관련해 이 같은 대응방안을 제시했다.
특히,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은 최근 일본이 핵심소재 수출규제 조치의 근거로 우리 정부가 전략물자를 밀수출하는 등 대북제재를 위반한 데 있다고 주장한 것에 근거해 이를 세계무역기구(WTO)에 적극 제소해야한다고 강조했다.
일본 정부는 지난 4일 수출무역관리령 개정을 통해 ▲반도체·디스플레이의 핵심소재인 포토레지스트(감광액)와 에칭가스(고순도 불화수소) ▲TV와 스마트폰 액정에 사용되는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등 3개 품목을 전략물자 수출통제제도상 일반허가 대상에서 제외하고, 개별 수출허가 대상으로 변경하는 수출규제 조치를 내린바 있다.
이번 수출규제 조치로 해당 품목을 한국에 수출하는 일본 기업들은 제품명부터 판매처, 수량, 사용 목적과 방법을 적은 서류와 무기용으로 사용되지 않는다는 서약서 등을 경제산업성에 제출해야만 한다. 신청부터 허가가 나오기까지 소요되는 기간은 약 90일로 국내 반도체·디스플레이 업계는 핵심소재에 대한 대일의존도(플루오린 폴리이미드 93.7%, 포토레지스트 91.9%, 에칭가스 43.9%)가 높아 위기감이 큰 상황이다.
나아가 일본 정부는 이르면 다음 달 중 우리나라를 외국환 및 외국무역관리법(외환법)에 따른 안보상 우방인 백색국가에서 제외하고 ▲화학약품 ▲전자부품 ▲공작기계 ▲차량용 전지 ▲탄소섬유 ▲통신기기 등 전략물자로 분류될 수 있는 다수의 품목에 대한 추가 수출규제도 검토 중이다.
이천기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무역통상실 부연구위원은 “전방위적·다층적인 노력이 필요한 시점으로 지속적인 양자·다자 협의 요청을 통해 일본과 외교적 차원에서 문제 해결에 노력해야한다”며 “이번 사안이 GVC(가치사슬)로 연결된 세계무역 전반에까지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제3국에 적극 피력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또 “일본이 북한에 대한 전략물자 수출통제가 이번 수출규제 강화조치의 주된 목적이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라 보인다”며 “참의원선거 유세 과정에서 국가안보 목적과는 맞지 않는다는 언급도 일부 발견되고 있는바 WTO 제소 시 이를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 한국이 연관돼 있는 수출통제 건에서 부적절한 사례가 발생해 수출규제를 강화하고 있는 것이라 주장하면서도 일본 정부가 정확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도 장기적으로 일본의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제21조 국가안보 예외 주장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나아가 “보다 즉각적인 효력을 가질 수 있는 상응조치로 우리 정부가 일반국제법상의 대응조치 개념에 입각해 일본산 상품 또는 서비스에 시장접근 제한, 관세인상, 對일본 수출제한 등을 취할 수 있다”며 “다만 이는 이번 수출규제 강화로 인해 한국이 입은 피해에 비례하는 수준만큼만 대응조치가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우리 정부는 그간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에 대응해 지속적으로 WTO 제소를 강조해왔다. 이에 오는 23일부터 24일까지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리는 WTO 일반이사회에서는 일본 수출규제 조치가 정식의제로 논의될 예정이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은 WTO 제소와 관련해 ▲GATT 제11조 제1항(상품의 수출입 금지 또는 수량제한 조치 금지) ▲GATT 제1조 제1항(최혜국대우원칙 의무) ▲GATT 제10조 제3항(무역규칙의 일관적·공평·합리적 시행 의무) 등에서 우리 정부와 일본이 논쟁을 벌일 것으로 예상했다.
이천기 부연구위원은 GATT 제11조 제1항에 대해 “핵심소재 3개 품목에 대한 수출규제 강화 조치는 대한국 수출을 금지·제한한다는 것이 아니라 개별 수출허가제를 전환한다는 내용에 불과해 일본의 개별수출허가제도 자체가 WTO 협정에 위배된다는 주장은 우리 정부가 제기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각 수출계약 건마다 개별 수출허가를 요구하는 조치의 적용으로 우리나라로의 수출에 지장 내지는 부당한 지연이 발생했다는 점과 사실상의 수량제한이 발생했음을 우리 정부가 입증할 수 있는 시점이 돼야 GATT 제11조 제1항 위반 주장이 설득력을 가질 것”이라고 분석했다.
다만 “앞으로 2~3개월 내에 국내 반도체 생산기업의 소재·부품 수급이 일본 수출규제 강화로 인해 지연되고 원활히 이뤄지지 못할 경우, 일본의 수출규제 강화조치가 사실상 우리나라로의 수출을 제한 내지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고 볼 여지가 있다”며 “이 점에 근거해 일본의 제11조 제1항 위반을 주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나아가 GATT 제1조 제1항에 대해서는 “일본 정부가 그간 한국에 특혜를 부여했다가 보통의 상태로 되돌리려는 것이므로 최혜국 대우 의무 위반이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예외사유가 존재하지 않는 한 특혜를 취소하는 조치도 원칙적으로 최혜국대우 의무가 적용된다”며 “다른 국가와의 관계에서 포괄적 수출허가 제도를 유지하면서 우리나라만 해당 제도에서 제외해 개별 수출허가의 적용을 받도록 한 것이면 이는 일본이 차별을 정당화시켜 줄 수 있는 예외사유를 가지고 있지 않는 한 의무 위반에 해당될 여지가 있다”고 지적했다.
GATT 제10조 제3항과 관련해서는 “개정된 일본의 수출규제 제도가 특정 국가로의 수출에 대해서만 지나치게 복잡한 또는 과도한 신청서류 제출을 요구하는 등 부당한 행정처리 지연을 야기하는 경우, 개정 수출무역관리령 등 일본의 수출무역 관리제도가 위반이라는 주장이 가능할 것”이라며 “중국의 희토류 및 원자재 수출제한 조치에 대해 미국, 일본, EU(유럽연합)이 소를 제기했던 China - Rare Eatths 사건에서 제소국들은 중국의 제3조 제3항 위반을 주장한 바 있다”고 설명했다.
일본 정부가 한국을 백색국가에서 제외하는 추가 수출규제를 준비하는 것에 대해서는 WTO 제소보다는 양자·다자적 채널을 통한 문제해결과 일반국제법상의 대응조치에 나서는 방식을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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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기 부연구위원은 이와 관련해 “일본의 무역조치가 확대·축소·취소될 가능성이 있으므로 현 시점에 서둘러 WTO 제소를 감행할 필요는 없다”며 “양자·다자적 채널을 통해 일본과 문제해결을 지속하면 서 일본 정부의 공식 성명이나 인터뷰 등에서 제소 시 우리 주장을 뒷받침해줄 만한 증거를 시간을 두고 충분히 수집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또 “이번 사건에서 일본의 전략물자 관련 주장은 근거가 없으며 일본의 조치는 사실상 강제징용 판결의 후속 보복조치로 이뤄진 것임을 우리 정부가 입증할 수 있는지가 중요할 것”이라며 “WTO 분쟁해결양해에 따른 사법적 분쟁해결은 첫 단계인 협의 요청부터 상소기구보고서 채택일까지를 기준으로 평균 23.21개월, 28개월이 소요돼 보다 즉각적인 상응 조치로 일반국제법상의 대응조치가 가능할 것”이라고 제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