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은 고립된 섬이 됐다.”
시민운동가가 한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쓰고 있는 바로 그 인터넷을 만든 팀 버너스 리의 신랄한 비판입니다.
구글, 페이스북 같은 거대 기업들이 웹을 자신들만의 정원(walled garden)으로 만들어버렸단 비판입니다.
듣기에 따라선 과한 비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버너스 리라면 저런 비판을 할 자격이 충분해 보입니다.
■ 버너스 리 "개인의 데이터 통제권 상실·가짜뉴스 범람 심각"
팀 버너스 리는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 재직하던 1989년 웹을 처음 제안했습니다. 웹은 1945년부터 발전해 온 하이퍼텍스트 이론을 현실에 구현한 플랫폼입니다. 고유의 웹 주소(URL)를 갖고 있는 문서를 하이퍼링크로 연결하는 시스템입니다.
그는 자신의 발명품에 ‘세계를 연결하는 망(world wide web)’이란 멋진 이름을 붙여줬습니다. 특허권으로 보호하라는 주변의 권유도 과감하게 뿌리쳤습니다. 대신 모든 사람들이 맘껏 활용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인류가 인터넷 혁명의 과실을 누릴 수 있었던 건 버너스 리의 이런 결정 덕분이었습니다.
이런 배경을 알고 보면 버너스 리의 저 발언이 예사롭지 않게 다가옵니다. 세계를 연결하는 '디지털 비단길'이 몇몇 대기업이 독점하는 ‘중앙집중형 괴물’이 돼 버렸단 비판이기 때문입니다.
웹을 바라보는 버너스 리의 눈길엔 슬픔과 분노가 배어 있는 듯 합니다. 실제로 그는 웹 탄생일이 있는 3월만 되면 강한 비판을 강하게 쏟아냈습니다. 그가 꼽는 웹의 문제점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 개인들의 데이터 통제권 상실.
둘째. 가짜뉴스 무차별 확산.
셋째. 투명하지 못한 온라인 정치 광고 범람.
물론 버너스 리는 그냥 목청만 높인 건 아닙니다. 잘못된 자식을 제 자리로 돌려놓기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해 왔습니다. 요 며칠 사이 국내외 언론들이 보도한 ‘솔리드(Solid)’ 플랫폼이 바로 그겁니다.
버너스 리는 지난 주말 IT 전문잡지 ‘패스트컴퍼니’와 단독 인터뷰를 통해 “거대 기업들에게 쏠려 있는 데이터 통제권을 개인에게 되돌려주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솔리드는 개인들이 구글 같은 거대 플랫폼에 데이터를 넘겨주지 않고 스스로 통제할 수 있도록 하는 플랫폼이라는 게 버너스 리의 주장입니다. (☞ 패스트 컴퍼니 기사 바로 가기)
■ "개발자들의 혁명 정신에 많은 기대 걸고 있다"
팀 버너스 리는 그 동안 웹을 개방된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 왔습니다. 월드와이드웹컨소시엄(W3C)이 이런 노력의 터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젠 더 이상 체제 내 개혁으론 웹을 바꾸기 힘들다고 판단한 듯합니다. 그는 패스트컴퍼니와 인터뷰에선 “행동을 해야 할 때다”며 목청을 높였습니다. “지금이 역사적인 순간”이라는 주장도 했습니다.
버너스 리는 아예 ‘인럽트(Inrupt)’란 회사를 별도로 만들었습니다. 이 작업에 집중하기 위해 재직 중이던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에선 안식년 휴가를 받았습니다. 분신이나 다름 없던 W3C 활동도 줄이기로 했습니다.
솔리드는 그가 29년 전 쏘아올렸던 월드와이드웹에 비해선 다소 초라해보이기도 합니다. 기존 인터넷 상에서 작동하는 플랫폼이기 때문입니다.
큰 차이는 ‘솔리드 포드’란 개인 저장소가 있다는 점입니다. 이 저장소를 통해 개인들이 정보 통제권을 갖도록 하겠다는 구상입니다.
웹의 거대한 위력을 감안하면 제 아무리 팀 버너스 리라 할 지라도 이런 시도가 다소 무모해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팀 버너스 리는 전 세계 개발자와 해커들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그는 패스트컴퍼니와 인터뷰에선 “개발자들은 늘 일정부분 혁명정신을 견지해 왔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들이 참여할 경우 거대 기업이 둘러싼 거대한 울타리를 조금씩 허물어뜨릴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감추지 않았습니다.
버너스 리는 이번 주부터 전 세계 개발자들이 ‘솔리드용 앱’을 만들 수 있도록 할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 '읽고 쓰는 웹'에 대한 또 다른 야심도 드러내
국내 언론들에 보도된 내용은 여기까지입니다.
하지만 전 버너스 리가 지난 주말 올린 ‘웹을 위한 작은 발걸음(One Small Steop for the Web)’이란 글에서 의미 있는 구절을 발견했습니다. (☞팀 버너스 리 글 바로가기)
“2009년에 난 “내가 구상했던 웹은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내가 그 말을 한 건, 사람들이 웹을 문서를 위해서만 사용하기 때문이었다. 웹을 아우르는 거대한 컴퓨터의 데이터를 위해선 사용되지 않고 있다. 오픈 데이터의 물결은 목격했지만, 읽고-쓰는 데이터(read-write data)의 물결은 보지 못했다.”
팀 버너스 리는 솔리드 플랫폼을 통해 웹의 이런 한계도 함께 해결할 계획이라고 공언했습니다. 저는 오히려 이 대목이 더 강하게 와 닿았습니다. 그 얘길 좀 더 해 볼까요?
인터넷의 이론적 토대를 닦은 건 배너바 부시입니다. 1945년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As We May Think)’이란 논문을 통해 기존 패러다임을 뛰어넘는 새로운 시스템을 제안했습니다. 이 제안을 대중적으로 구현한 것이 월드와이드웹입니다.
하지만 팀 버너스 리는 월드와이드웹을 구현하기 위해 한 가지를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완전한 정보 평등’이란 이상입니다. 그 당시 기술 수준으로 웹을 구현하기 위해선 ‘양방향에서 쓸 수 있는 플랫폼’이란 또 다른 소중한 가치는 훗날을 기약할 수 밖에 없었던 겁니다.
팀 버너스 리는 현재 웹의 한계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수많은 오픈 정부 데이터도 일방향 파이프라인을 통해서만 생산되고 있다. 그러다보니 우리는 볼 수만 있을 따름이다.”
솔리드를 통해 이 문제도 해결하겠다는 게 팀 버너스 리의 구상입니다.
■ 29년 전의 인터넷 혁명 불꽃, 다시 타오를 수 있을까
웹은 팀 버너스 리에겐 아픈 손가락 같은 존재입니다. 공들여 키웠던 웹이 장성한 뒤 세상의 악에 굴복해 타락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런 아픔과 함께 탄생 당시 온전한 모습을 갖춰주지 못했다는 또 다른 아쉬움도 늘 가슴 한 쪽을 짓눌렀던 것 같습니다.
솔리드는 이런 아픔과 아쉬움을 해소하려는 그의 야심찬 프로젝트란 점에서 많은 관심을 모읍니다. 29년 전 웹을 만들면서 일체의 상업적 가치를 배제했던 그가 ‘인럽트’란 회사까지 만든 것도 이런 이상을 구현하기 위한 작은 발걸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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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버너스 리는 또 한번의 ‘인터넷 혁명’에 성공할 수 있을까요? 규제가 아니라 혁신을 통해 인터넷을 개혁하는 소중한 업적을 이뤄낼 수 있을까요?
현 상황만 놓고 보면 이루기 힘든 꿈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라면 의미 있는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이 생깁니다. 팀 버너스 리라는 이름이 갖는 무게라면, 충분히 해 볼만한 일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