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길, 한국의 길

[박승정 칼럼] 블록체인·암호화폐와 두 시선

데스크 칼럼입력 :2018/09/28 11:07    수정: 2018/11/16 11:33

잠시 19세기 중엽으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세계열강이 동아시아 패권을 놓고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던 당시, 조선 조정은 개화파(開化派)와 척사파(斥邪派)가 극명하게 대립했다.

개화파는 청의 양무운동과 일본의 개방정책을 주목했다. 성리학 중심의 중화질서와 봉건 제도를 타파하고 사회의 질적 변혁이 목표다. 청년지식인 등 소수 엘리트가 앞장섰다. 문호 개방은 물론 서구의 신문물 수용은 당연했다.

반면 척사파는 서양의 문물은 요사스럽고 사악한 것이라고 배척했다. 군주제를 옹호하는 폐쇄적 기득권 세력이 중심이다. 성리학의 본고장인 중국 중심의 세계관만이 살 길이다. 사대주의자들의 또 다른 이름이다.

이들 입장에선 서구문물은 전통 성리학 질서를 무너뜨리고 농촌 경제를 파멸시키는 요사스런 것이다. 수용은 곧 패망의 지름길이다. 전기통신철도 등 이른바 일련의 근대화 작업도 거부하고 서구식 정치제도의 수용은 더욱 반대했다.

결과는 어떤가. 국운이 결정적으로 쇠퇴했다. 당시 척사파는 봉건적 제도 모순과 사회적 부패에 눈감은 채 새로운 사조(思潮)를 거부하고 기득권에 유지에만 골몰한 탓이다.

■ “파리, ICO 수도 만든다”... 프랑스 ICO 허용 전격 유턴

최근의 일이다. 프랑스는 이달 중순 암호화폐를 수용하는 법안을 전격 통과시켰다. 암호화폐의 규제가 아니라 암호화폐의 악용을 막는 스마트한 규제다. 그동안 코인 상장(ICO)에 대한 부정적 입장을 견지해온 행보를 정반대로 뒤집은 것이다.

프랑스는 세계 6위 경제대국이다. 이 나라 금융기관인 AMF(Autorite des Marches Financiers)는 지난 달 이미 ICO 허용을 적극 검토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바 있다.

암호화폐의 각종 불확실성이 해소되지 않았지만 새 블록체인 경제체제 등장의 신호탄으로 본데 따른 결정이다.

같은 시기, 한국의 금융감독원은 ICO기업에 조사서를 발송했다. 전수 조사 통지서다. ICO와 관련된 모든 정보를 기록해서 제출하라는 통보이지만 사실상 또 다른 조치의 서막을 예고하는 것으로 비쳤다. 당연히 시장엔 찬바람이 불었다.

하루 이틀 시차를 둔 두 나라 정부의 정책 지향점은 시사하는 바가 컸다. 프랑스는 암호화폐를 새로운 경제 체제 등장의 신호탄으로 여기는 반면 우리나라는 기존의 질서를 위협하는 요사스런 것, 사악한 것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한국은 블록체인과 암호화폐에 관한 한 분리주의 입장이다. 블록체인과 암호화폐는 분리할 수 없는데도 블록체인은 육성하되 암호화폐는 규제한다는 ‘이상한’ 정책을 고수한다. 프랑스는 통합주의 입장이다. 아예 법 제정을 계기로 파리를 ‘ICO의 수도’로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두 나라의 같은 듯 다른 행보는 어떤 연유에서일까. 혹시라도 척사파의 시각으로 블록체인·암호화폐를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볼 일이다.

세계는 지금 경제 주도권을 놓고 무역전쟁을 벌이고 있다. 미중이 한 치의 양보 없이 관세 폭탄을 터트리는 등 고공전을 벌이는 동안 관련 기업들은 희비가 엇갈리고 있다. 양국은 군사, 정치, 경제, 산업 전부문서 신(新)냉전의 전선을 구축하고 있다.

산업 패권은 국가 간 신냉전 전략전술의 가늠자로 통한다. 곧바로 정치·경제의 주도권으로 이어진다. 미·중은 물론 세계 각국이 분산경제의 새 주도권 다툼에 나서는 이유다.

일단 중앙집중식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최대 승자는 미국이다. 구글과 아마존, 페이스북, 애플을 보라. 정보화시대의 플랫폼 경쟁에서 승기를 잡은 미국의 우위는 아직 절대적이다. 중국은 바이두, 알리바바, 텐센트가 추격하고 있지만 역부족이다.

하지만 차세대 경제 패권의 향배는 안개속이다. 미·중의 블록체인 프로젝트가 그것이다. 미국은 3천여개, 중국은 1천여개 프로젝트로 아직은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 외려 블록체인 테스트베드로 여겨지는 우리나라를 찾는 중국 전문가들의 발길은 미국을 앞선다.

■ “정책은 타이밍, 지금도 늦지 않았다”... ICO 부분 허용이라도 길 터줘야

과연 우리의 선택은 무엇인가. 암호화폐를 포함한 블록체인은 이제 분산경제 체제의 상징이면서 차세대 경제 패권의 징표가 됐다. 개화파의 길을 갈 것인지, 척사파의 길을 갈 것인지 갈림길에 서 있는 것만은 보다 분명해졌다.

우리는 지금 블록체인 원천기술이나 핵심 소프트웨어(SW) 알고리즘은 1~2년 뒤진 형국이다. 이대로 가면 ‘기회’를 영영 상실할지도 모른다.

프랑스의 선택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미·중의 틈바구니에서 선제적으로 치고나간 프랑스의 선택은 절묘하다. 엠마뉘엘 마크롱 대통령과 브뤼노 르 메르 재무장관의 승부수다. 의회 역시 블록체인·암호화폐에 관한 한 지원군을 자임했다.

법안은 투자자에게 ICO의 확실한 검증과 보증을 서주는 대신 구매자에게는 명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을 의무화했다. 투자자 보호가 주목적이다. 법령 자체가 토큰의 발행, 등록, 판매를 보장하고 무형의 자산으로 인정하기에 이른 것이다.

척사파 입장에 섰던 브뤼노 르 메르 장관이 적극 나섰다. 그는 비트코인을 ‘새로운 혁명의 유일한 선구자’라고 할 정도로 적극적인 옹호론자가 됐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블록체인은 스타트업에게 유일한 기회의 땅이다. 파리를 ICO의 수도로 만들겠다는 발언은 아예 도발적이다.

진정한 승자는 자신의 잘못을 흔쾌하게 인정하고 소신을 과감히 바꿀 수 있을 때 가능한 법이다.

우리는 어떤가. 우리 정책 당국 인사 라인으로만 보면 아직은 척사파의 우위가 점쳐진다. 'IT코리아' '전자정부 1등 국가'란 찬사는 과거의 일이 됐다. 이제는 미래다. 블록체인 정책만을 놓고 보면 척사파의 길을 갈 것인지, 개화파의 길을 갈 것인지는 전적으로 우리의 몫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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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은 타이밍이다. 과연 우리에게 브뤼노 장관 같은 용기 있는 인물은 없는 것일까.

[편집인/과학기술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