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중립성 원칙의 운명을 가를 미국 연방통신위원회(FCC) 전체회의 표결을 앞두고 거센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특히 빈트 서프를 비롯한 인터넷 개척자들은 FCC가 인터넷을 잘못 이해했다면서 투표 연기를 촉구했다. 이와 함께 망중립성 원칙을 폐지하더라도 연방거래위원회(FTC)를 통해 사후 제재할 수 있다는 FCC 주장 역시 허점 투성이란 비판도 만만찮게 제기되고 있다.
미국 FCC는 오는 14일(현지시간) 전체 회의를 열고 아짓 파이 위원장이 제안한 ‘인터넷 자유 회복’ 문건 채택 여부에 대한 표결을 진행할 계획이다.
‘인터넷 자유 회복’은 유무선 인터넷 서비스사업자(ISP)들을 통신법 706조의 타이틀1(정보서비스 사업자)로 재분류하는 것이 핵심 골자다.
유무선 ISP는 오바마 행정부 때인 지난 2015년 유선전화 사업자들이 소속돼 있는 타이틀2로 분류했다. 타이틀2로 분류된 기업들은 강력한 커먼 캐리어 의무를 지게 된다. 반면 타이틀1에 소속된 기업들은 망중립성 의무를 지지 않는다.
■ "광대역 인터넷이 통신 아니면 전화도 통신 아냐"
투표를 사흘 앞둔 11일에는 인터넷 원로들이 FCC 비판에 가세했다.
월드와이드웹 창시자인 팀 버너스 리를 비롯해 TCP/IP 프로토콜 개발자인 빈트 서프, 인터넷 전신인 알파넷 개발에 참여했던 스티브 크로커 등 21명은 아짓 파이 FCC 위원장이 인터넷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이들은 광대역 접속 서비스는 통신서비스라고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커먼 캐리지’ 규칙에 따라 FCC가 관할권을 가져야만 한다고 팀 버너스 리 등이 강조했다.
아짓 파이가 ISP들을 정보 서비스로 재분류하는 것은 광대역 인터넷 접속 사업을 통신 서비스로 규정하고 있는 FCC의 기본 원칙을 무시하는 처사란 얘기다.
미국 통신법에서는 통신을 한 이용자가 특정한 다른 이용자에게 어떤 변경도 가하지 않은 상태로 정보를 전송해주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파이 위원장은 광대역 인터넷 서비스 이용자들은 어떤 사이트에 접속할 때 IP 주소와 캐시 서버를 특정하지 않기 때문에 통신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아짓 파이 FCC 위원장의 이 같은 해석에 대해 인터넷 원로들은 “잘못된 이해”라고 정면 비판했다.
광대역 인터넷 이용자가 정보 전송 지점을 특정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전화 이용자에게도 똑 같이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유선전화 이용자가 전화 번호를 누를 때도 통화할 상대방 전화를 특정하는 건 아니란 해석도 가능하다는 게 인터넷 원로들의 주장이다.
결국 아짓 파이 위원장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 현재 타이틀2로 분류돼 있는 전화서비스 역시 통신 서비스가 아니라는 황당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고 인터넷 원로들은 주장했다.
■ "FTC로 충분하단 FCC 주장도 허점 투성이" 비판도
또 다른 쟁점은 FTC를 통한 규제가 가능할 것이냐는 부분이다. 아짓 파이 위원장은 올 상반기 망중립성을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할 때부터 줄곧 FTC가 있기 때문에 유무선 ISP를 견제하는 건 문제가 없다고 강조해 왔다.
FCC는 투표를 사흘 앞둔 11일엔 FTC와 공동 체결한 양해각서(MOU)를 공개하면서 여론몰이에 나섰다.
FTC는 이날 “인터넷에 무거운 규젱을 부과하는 대신 FCC와 FTC가 함께 잘못된 행동을 하는 사업자들에게 대해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망중립성 원칙이 폐기될 경우 ISP들이 인터넷 접속을 차단하거나 속도를 저하시키는 등의 행위를 막을 규정은 사라지게 된다.
그런데 이 공백을 FTC가 메울 수 있다는 게 트럼프 행정부의 주장이다. ISP들이 반경쟁적 행위나 소비자 이익을 저해하는 행위를 할 경우 FTC가 제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 IT매체 아스테크니카는 허점이 적지 않다고 꼬집었다.
그 중 하나는 유무선 ISP들이 약관을 변경해버리는 경우다. 명백한 반경쟁 행위를 하거나 소비자 기만 행위를 한 정황이 포착되어야만 FTC가 제재를 할 수 있다.
그런데 유무선 ISP가 망중립성 관련 약속을 하지 않을 경우엔 소비자 기만 행위엔 해당되지 않는다. 실제로 미국 최대 케이블 사업자인 컴캐스트는 아짓 파이 FCC 위원장이 망중립성 폐기 조치에 착수하자 곧바로 ‘유료 급행회선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조항을 삭제해 버렸다.
또 다른 부분은 FTC 규제의 실효성이다. 민주당 FCC 위원인 제시카 로젠워슬은 “FTC는 위반 행위가 있은 지 수 개월, 길 경우는 수년이 지난 뒤에야 제재 조치를 취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FTC 제재로는 망중립성 원칙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취약한 FTC의 관할권마저 사라질 우려도 있다는 점 역시 망중립성 반대론자들이 심각하게 보고 있는 부분이다.
■ FTC, AT&T와 소송 패소 땐 관할권 공백 초래될 수도
FTC는 현재 AT&T와 무제한 데이터 요금 관련 공방을 벌이고 있다. AT&T가 지난 2014년 무제한 데이터 요금 이용자들이 일정 규모 이상의 데이터를 쓸 경우 속도를 늦추는 조치를 단행했다. 그러자 FTC가 AT&T를 제소했다.
양측이 법정 공방을 벌이면서 관할권 문제가 불거졌다. 유선전화 사업자인 AT&T는 통신법 706조의 타이틀2로 분류돼 있다. 따라서 FTC에겐 관할권이 없다. 타이틀2는 FCC 규제 영역이기 때문이다.
AT&T는 FTC가 전화사업자인 자신들을 규제하는 건 월권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FTC는 쟁점이 된 데이터 요금 문제는 커먼 캐리지 영역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들이 규제 권한이 있다고 맞섰다.
법원은 일단 AT&T의 손을 들어줬다. 제9연방순회항소법원이 지난 2016년 8월 FTC가 커먼캐리어인 AT&T를 규제하는 건 월권이라고 판결했다. 이 판결이 그대로 유지될 경우 FTC는 커먼캐리어의 다른 서비스 영역에 대해서도 규제 권항을 잃게 된다.
물론 이 판결은 아직 반전이 남아 있다. 제9순회항소법원이 전원합의체 재심리 방침을 밝힌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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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CC가 망중립성 폐지 원칙을 밀어부친 건 이런 상황과도 관련이 있다. 전원합의체 재심리를 통해 FTC의 관할권을 인정받을 것이란 기대감이다.
하지만 최종 판결이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망중립성 폐지 관련 투표를 하는 건 위험부담이 크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항소법원 전원합의체가 기존 판결을 그대로 인용할 경우 유무선 ISP의 독주를 규제할 기관이 사라지게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