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P와 시스코시스템즈가 오랜 만에 손을 잡았다. 목적은 HP 서버와 시스코 스위치를 가상화 환경에서 간편히 관리하기 위한 IO모듈 제작이다. 경쟁구도로 돌아섰던 두 회사의 관계뿐 아니라 서버와 네트워크 시장에 영향을 미칠 움직임으로 해석된다.
시스코는 HP 블레이드 서버 인클로저인 C시리즈에서 시스코 유니파이드 패브릭 기능을 이용할 수 있는 I/O모듈 ‘HP블레이드 시스템용 FEX(시스코 넥서스 B22HP)’를 출시한다고 최근 밝혔다.
시스코 넥서스 B22HP는 HP 블레이드 서버 사용 고객이 시스코 넥서스5000으로 데이터센터 네트워크를 구축할 때 패브릭패스, VM-FEX 등의 가상 네트워크 기술을 사용할 수 있게 한다. 블레이드 시스템 인클로저에 넥서스 B22HP를 장착하면 모든 서버의 네트워크 관리 포인트를 넥서스5000에서 관리할 수 있다.
또한 HP 블레이드 서버는 버추얼커넥트(IRF) 대신 시스코의 FCoE를 사용해 케이블을 단일화할 수 있다.
■시스코, HP OEM제품을 왜 만들었나
시스코와 HP는 최근까지 경쟁관계였다. 시스코가 유니파이드컴퓨팅시스템(UCS) 서버로 HP의 텃밭에 뛰어들고, HP가 쓰리콤 인수로 독자적인 네트워크 사업을 강화하면서부터다. 이후 두 회사는 사사건건 부딪치는 모습이었다.
그러던 가운데 나온 넥서스 B22HP는 다소 생뚱맞아 보인다. 시스코코리아 관계자들이 이 제품의 출시계획을 처음 접하고 깜짝 놀랐다고 밝힐 정도다.
샤시 키란 시스코 데이터센터 및 가상화 시장 관리 총괄 이사는 “HP의 서버와 시스코 네트워크 솔루션을 모두 도입한 고객들이 유니파이드 패브릭을 쓰기 쉽게 해달라는 요청을 해 만들게 됐다”라며 “고객은 넥서스 B22HP를 통해 시스코의 유니파이드 패브릭과 패브릭패스, FCOE 등을 다 활용할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서버 가상화로 데이터센터는 거대하고 복잡해졌다. 전보다 가상머신(VM)을 많이 사용하고, 물리적 서버를 멀티테넌트로 사용하면 VM마다 네트워크 포트, 보안 등을 별도로 할당해야 한다. 하드웨어 스위치는 가상 포트를 정해진 수만 지원하므로, 스위치와 NIC을 가상화해 여러 개로 쪼개서 쓰게 된다.
물리적인 네트워크를 가상화하는 기술 가운데 하이퍼바이저와 완벽히 호환되는 스위치 제품은 현재 시스코의 넥서스가 거의 유일하다. HP, 주니퍼네트웍스, 브로케이드 등은 시스코의 802.1Qbh를 지원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802.1Qbg란 표준을 수립중이다. 그러나 이들은 상용제품을 출시하지 않았다.
■시스코, HP 서버에 트로이목마 던졌나
HP 서버 입장에서 볼 때 스위치 제조업체는 민감하지 않다. 네트워크를 중점적으로 고려하는 기업 IT관리자라 해도 넥서스 B22HP를 함께 판매하면 되므로, 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
문제는 HP 네트워크 사업이다. HP는 올해 플렉스패브릭이란 개념을 발표하면서 802.1Qbg를 지원하는 스위치를 내놓겠다고 밝혀왔다. HP 버추얼커넥트와 연동해 네트워크 관리 편의성을 높이는 것으로, 서버를 넘어 데이터센터 운영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움직임이다.
시스코는 넥서스 B22HP를 위해 802.1Qbr이란 새로운 표준 프로토콜을 만들었다. 기존 넥서스 스위치에서 사용하던 가상랜(VLAN) 기술인 802.1Qbh 표준을 타사 시스템과 호환하기 위해 만들어낸 것이다. 이를 이용하면 데이터센터 내부 레이어2(L2) 네트워크를 레이어3(L3)로 확장해 데이터센터와 데이터센터를 하나의 네트워크로 구현할 수 있게 된다.
최우형 시스코코리아 부장은 “802.1Qbr표준은 HP 사용자가 서버의 LAN카드를 교체하지 않고 넥서스 스위치를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라며 “넥서스 B22HP를 사용하면 HP 섀시를 넥서스 박스로 보이게 한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서버 포팅과 LAN카드 포팅만 해주면 네트워크 담당자가 모든 서버 배열을 넥서스 5000의 하나의 파트처럼 보이도록 할 수 있다”라고 덧붙였다.
이 표준을 채택한다는 건 HP의 버추얼커넥트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HP로선 기존 시스코 사용자를 HP 네트워크 사용자로 이동시킬 지점이 하나 사라지는 셈이다.
시스코의 네트워크 사업 입장에도 넥서스 B22HP는 넥서스 스위치 판매를 촉진할 발판을 더욱 강화한 효과를 거두게 된다. 자칫 HP 네트워크 사업부에 넘겨줄 수 있는 데이터센터 시장 지배력을 더 공고히 하게 선제 조치로 볼 수 있다.
■시스코 UCS는 어떻게 되나
UCS의 경쟁력이 사라졌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UCS는 기본적으로 패브릭익스텐더를 내장하기 때문에 넥서스와 쉽게 연결가능하다. 넥서스 B22HP 출시로 인해 HP 블레이드와 경쟁하는 차별점이 사라졌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시스코는 UCS 출시 2년만에 블레이드서버 시장 2위에 오르는 등 빠르게 서버사업을 성장시키고 있다. 같은 기간 넥서스도 매년 두자릿수씩 매출이 늘어나며 빠르게 성장했다. UCS와 넥서스 간 시너지가 빛을 발한 셈이다.
시스코의 가상 네트워크 기술을 이용하려면 UCS 서버를 사용하는 게 최선이었다. 물론, v스피어, 하이퍼V 등의 가상 스위치 기능을 사용해도 된다. 다만, 관리를 서버 측에서 맡기 때문에 서버 관리자의 업무 부담이 커진다. 서버 인력의 네트워크 전문성이 떨어진다는 점도 문제였다.
샤시 키란 시스코 총괄이사는 “오히려 넥서스 B22HP는 UCS의 장점을 더 부각시키게 될 것”이라며 “UCS는 중앙집중식 관리시스템(DCNM)을 통해 네트워크를 통합관리할 수 있고, 이미 가상화에서 그 성능을 입증받았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HP의 플렉스 패브릭과 IRF(버추얼커넥트)는 소수 스위치를 관리할 뿐 패브릭을 구성할 능력이 없다”라고 강조했다.
관리와 성능 측면에서 UCS를 사용하는 것이 여전히 유리하다는 설명이다. 또다른 차이점은 스토리지 연결이다.
최우형 부장은 “전체 데이터센터 측면에서 HP 서버를 사용해도 네트워크가 HP나 시스코를 다 같게 만들 수 있지만, 호스트버스어댑터(HBA) IO까지 하나로 만들지 못한다”라며 “단일화로 가려면 시스코 UCS를 이용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다”라고 설명했다.
결국, 넥서스 B22HP는 HP 서버 사용자가 더욱 시스코 UCS에 친밀해지도록 하는 셈이다. 서버-네트워크 연결을 떠나, 서버-네트워크-스토리지로 이어지는 광범위한 관점에서 UCS에 익숙해질 가능성을 심게 된다.
■802.1Qbr, 네트워크 중심 서버 생태계 만드나
시스코는 넥서스 B22HP 제품을 HP 전용제품으로 내놨지만, 차후 델, IBM 등 모든 서버업체와도 협력할 가능성을 열어뒀다.
넥서스 B22HP에 탑재되는 표준인 802.1Qbr이 그 바탕이다. 표준 프로토콜로 내놓기 때문에 HP만을 위해 개발된 FEX만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서버업체가 요청하면 언제든 OEM 제품을 만들 수 있다는 설명이다.
샤시 키란 이사는 “FEX 블레이드 폼팩터는 각 업체의 블레이드 섀시에 특화된 구조로, 다른 서버업체용 제품을 생산하려면 협약도 맺고, 공동 엔지니어링도 진행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라며 “추가협업 여부는 공개할 수 없지만, 다른 업체가 시스코 패브릭 익스텐더 에코시스템에 참여할 것을 독려하고 싶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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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2.1Qbr은 서버업체 생태계를 네트워크 중심으로 재편할 잠재력을 갖고 있다.
HP와 마찬가지로 델, IBM도 독자적인 네트워크 사업을 강화하고 있지만 넥서스 사용자의 시스코 충성도를 넘어서기에 아직 부족하다. 넥서스 사용자 측의 서버 네트워크가 시스코 중심으로 움직이는 한 유명 서버업체도 OEM을 택하는 게 유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