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력망은 대형 동기발전기의 회전에 의존해 왔다. 회전체는 사고 시 주파수 변화를 완충하는 관성을 제공하고 전압 유지와 고장전류 공급에도 기여한다. 반면 태양광·풍력·ESS는 대부분 인버터로 계통에 연결되며, 계통의 전압과 주파수를 따라가는 그리드팔로잉(Grid-following) 방식으로 운전해 왔다. 동기기가 줄면 계통 교란을 완충하는 능력도 약해질 수 있다.
현장은 이미 신호를 보내고 있다. 국회에 제출된 전력거래소 자료에 따르면 호남권 출력제어량은 2021년 35MWh에서 2025년 8만3,944MWh로 늘었고, 2026년 6월까지 8만4784MWh를 기록해 전년도 연간 실적을 넘어섰다.
제주에서도 출력제어는 2015년 3회에서 2020년 77회로 증가했다. 동기기의 최소출력·의무운전(Must-run) 제약이 재생에너지 수용을 제한한다는 분석도 있다. 유럽 송전망운영자협회(ENTSO-E)의 2026년 3월 이베리아 대정전 보고서도 전압·무효전력 제어 공백과 발전원 탈락 등 복합 원인을 지적했다.
그리드포밍(Grid-forming, GFM)은 인버터가 스스로 전압 기준을 형성하고 주파수·전압 변동에 대응하는 기술이다. 합성 관성과 전압 지지에 기여하지만 동기기의 물리적 관성과 고장전류를 그대로 재현하지는 않는다. 정부는 2026년 6월 성능 요건을 마련하고 2027년 12월 상업운전하는 중앙계약시장 장주기 BESS부터 적용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의무화가 제도의 완성은 아니다. 세 가지 과제가 남아 있다.
첫째, 성능 검증과 판정체계를 완성해야 한다. 제조사별 제어 알고리즘에 따라 관성 유사 응답, 위상 급변 대응, 전압 지지와 고장 시 전류 응답이 달라질 수 있다. 한국스마트그리드협회(KSGA)는 2026년 10월 기능·성능 요구사항 개정안과 제어기 성능시험 표준안을 공개회람했다. 단체표준과 전력당국의 시험절차를 연계해 제어기 시험부터 PCS·BESS 통합시험과 현장 검증까지 일관된 판정체계를 마련하고, IEC와 정합된 공통 절차를 계통연계 기준에 반영해야 한다.
둘째, 계통 안정화 기여도에 따른 보상이 필요하다.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은 2038년 관성 필요량을 32GWs로 전망하고 동기조상기 중심의 확보 방향을 제시했다. 2026년 ESS 중앙계약시장(육지 1,100MW) 입찰에는 GFM 관련 계통연계 요건이 입찰 참가 요건으로 반영됐다. 그러나 비가격 평가의 계통 안정화 기여도는 지역별 계통 여건과 설비 보강 효과 등을 종합평가하는 것으로, GFM의 관성 유사 응답과 전압 지지 성능을 별도로 계량하는 체계와는 차이가 있다.
GFM 기능을 제공하려면 PCS의 유·무효전력 출력 여력과 배터리 SOC 운전 여유가 필요해 추가 비용이 든다. 성능 보상 없이 의무만 부과하면 사업자는 최소 요구수준에 머물 수 있다. 독일 송전망운영자들은 2026년 1월부터 동기기와 그리드포밍 변환기의 순간예비력을 시장에서 조달하고 있다. 우리도 응답속도·제공량·지속시간·가용성을 기준으로 기술중립적인 보상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이것이 시장 신호 정상화의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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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적용 범위와 제도 환류체계를 확대해야 한다. 현재 의무화는 중앙계약시장 장주기 BESS 중심이다. 그러나 재생에너지 밀집 지역에서는 태양광·풍력 인버터의 보호 설정과 전압 제어도 계통 안정성에 영향을 미친다. 지역별 관성·계통 강건성·전압 지지 수요를 분석해 우선 적용 지역을 정하고 재생에너지 인버터와 배전망까지 확대해야 한다. 지난 7월 출범한 그리드코드 전문위원회는 실증 결과를 계통연계 기준과 전력시장운영규칙 개정에 반영하는 환류 창구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거버넌스 혁신의 실질적 사례가 될 수 있다.
재생에너지 100GW 시대는 전력망을 지탱하는 주체가 바뀐다는 뜻이다. 과거 대형 동기발전기가 담당했던 계통 안정화 기능을 이제는 인버터 기반 전원도 함께 책임져야 한다. 이를 위해 성능을 객관적으로 검증하고, 계통 기여도에 따라 보상하며, 적용 범위를 단계적으로 확대해야 한다. 그리드포밍 의무화가 선언에 그치지 않고 실제 전력망의 안정성 향상으로 이어지려면 기술과 제도가 함께 완성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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