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이연소 ULP 대표 "궁궐은 테마파크 아냐…빛은 공간의 멋 살려야"

창덕궁부터 한강·청계천까지…서울의 밤 설계한 빛 전문가

유통/생활/문화입력 :2026/10/29 13:14

“궁궐은 테마파크가 아니에요. 빛도 너무 과장되면 원래 그 공간이 가지고 있는 멋과 맛이 잘못 표현될 수 있습니다.”

서울의 밤을 설계해 온 이연소 유엘피(ULP) 대표 겸 한국 ULP AI조명연구소 소장이 강조하는 빛 디자인의 원칙은 공간 본연의 가치를 살리는 일이다. 청계천과 한강, 창덕궁 등 서울 주요 야간경관 조성에 참여한 그는 화려한 조명보다 장소의 역사와 특성을 이해하는 일이 우선이라고 강조했다.

지난 27일 서울 종로구 창덕궁 인근에서 만난 이 소장은 최근 국가유산을 활용한 미디어아트와 야간관광이 활발해지는 흐름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과도한 연출에는 우려를 나타냈다. 관광객의 시선을 끄는 데 치중하다 보면 문화유산 고유의 가치가 가려질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연소 유엘피(ULP) 대표 겸 좋은빛디자인연구소 소장.

그는 국가유산 훼손을 물리적 훼손과 상징적 훼손으로 구분했다. 시설물 설치 과정에서 문화유산을 손상하는 문제뿐 아니라 지나친 영상과 조명 연출로 본래의 이미지를 왜곡하는 일도 경계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특히 서양 석조 건축물에 사용하는 조명 방식을 한국 궁궐에 그대로 적용하는 관행을 지적했다. 이 소장은 “석조 건물처럼 아래에서 위로 조명을 비추면 우리 궁궐은 처마 아래까지만 보이고 어두운 지붕은 날아가 버린다. 건물의 절반밖에 보이지 않는다”며 “우리 전통 건축은 지붕이 중요한데, 그런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조명을 설치하면 본래의 아름다움을 살릴 수 없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고민은 그가 참여한 창덕궁 달빛기행에서도 드러난다. 이 소장은 2012년께 달빛기행 조명 디자인을 맡으면서 기존 조명을 줄이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밝은 조명은 철거하거나 빛의 세기를 낮추고, 눈부심을 유발하는 조명은 가렸다.

관람객이 궁궐 깊숙이 들어갈수록 눈이 자연스럽게 어둠에 적응하도록 유도했다. 건물 안쪽에는 작은 조명을 설치해 창살 사이로 은은한 빛이 새어 나오도록 연출했다. 이 소장은 이러한 작업을 요리에 비유했다. 그는 “진짜 맛있는 요리는 원재료를 잘 살리는 법”이라며 “빛도 너무 과장되면 원래 그 공간이 가지고 있는 멋과 맛이 잘못 오용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의 조명 철학은 서울 도심 야간경관에도 녹아 있다. 특히 한강르네상스 사업 당시 오세훈 서울시장에게 건넸던 제안은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이 소장은 “당시 시장님께 '한강을 어둡게 해서 한강을 살려내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며 “처음에는 의아하게 생각하던 시장님도 한강이 어두워야 서울 야경이 한강에 담긴다고 설명했더니 곧 이해하셨다”고 회고했다.

그의 구상은 한강변에 불필요하게 퍼지는 빛을 줄여 강물에 비치는 도시 야경을 살리는 데 있었다. 강변을 무조건 밝히기보다 수면에 반사되는 서울의 불빛을 경관으로 활용하겠다는 취지였다.

청계천 작업에서는 사람들이 머물기 꺼리던 다리 아래 공간에 따뜻한 간접조명을 활용했다. 경의선숲길은 새로운 시설물을 대거 설치하는 대신 기존 공원등의 색감과 빛의 방향을 조절해 머물고 싶은 공간으로 재탄생 시켰다. 그는 “사실 기본에 충실하면 어디나 적용할 수 있다”며 “누구나 좀 머물고 싶은 공간을 만드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고 전했다.

이 소장은 최근 지자체에서 시행하고 있는 지역 관광 활성화를 위한 야간경관 개발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낮에 관광지를 둘러보고 떠나는 관광객과 밤까지 머무는 관광객의 소비 규모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설명이다. 그는 “머무는 관광과 스치는 관광은 3배에서 5배의 비용이 차이 난다”며 “저녁 식사와 숙박, 쇼핑 등으로 이어지는 만큼 지역에서도 관광객을 밤까지 머물게 할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다만 야간관광을 활성화하기 위해 무조건 화려한 조명을 설치하는 방식에는 선을 그었다. 관광객 유치 경쟁이 심해질수록 조명이 강해지고, 자칫 주변 경관보다 조명 시설물 자체가 부각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는 “지방에 자문을 가보면 자꾸 무언가를 더 붙이려고 한다”며 “이것저것 많이 설치하다 보면 결국 경관이 아니라 조명등만 보이게 된다”고 지적했다.

지역의 자연환경을 관광 자원으로 활용하는 방안도 제시했다. 제주에서 진행한 조명 작업에서는 일정 시간이 되면 음악과 함께 조명이 어두워지도록 연출했다. 인공조명이 사라지자 평소 보이지 않던 밤하늘의 별이 드러났다는 설명이다. 이 소장은 “제가 만든 별이 아니라 원래 있던 별이 보이는 것”이라며 “그렇게 자연의 느낌을 살리면 비용과 노력을 최소화하고 효과는 극대화할 수 있다”고 밝혔다.

지역마다 고유한 경관을 살리면서 기존 시설을 활용하는 방식이 비용과 유지관리 측면에서도 유리하다고 봤다. 아울러 야간조명이 빛공해로 이어지지 않도록 밝기와 방향, 운영시간을 조절해 농작물과 생태계, 주민 생활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관련기사

이 소장이 앞으로 이루고 싶은 소망은 의외로 소박했다. 산골 마을의 어두운 길에 태양광 조명을 설치하는 일이다. 늦은 밤 마지막 버스에서 내린 어르신들이 정류장에서 집까지 안전하게 걸어갈 수 있도록 작은 불빛을 놓아주고 싶다고 했다. 이에 대해 “많은 예산이 들어가는 일이 아니다”며 “우리가 조금만 고민하면 다 같이 서로 행복한 공간을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그가 최종적으로 밝히고 싶은 곳은 거대한 관광 명소가 아니라 어두운 시골길을 걷는 누군가의 발밑이다. 서울의 밤을 설계해 온 그가 꿈꾸는 빛의 쓰임은 결국 사람의 일상을 밝히는 데 닿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