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 중 ‘깜빡깜빡’ 기분 탓 아니네…에스트로겐이 뇌 회로 바꿨다

임신 중 높은 에스트로겐, 기억 담당 해마에 영향…사람 대상 연구서도 단서

과학입력 :2026/09/27 06:46

임신 중 방에 들어갔다가 무엇을 하려 했는지 잊거나 물건을 어디에 뒀는지 기억나지 않는 경험을 하는 이유가 단순한 기분 탓만은 아닐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임신 중 크게 높아지는 에스트로겐이 기억을 담당하는 뇌 영역과 연결된 특정 신경회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미국 베일러의과대학과 루이지애나주립대 페닝턴 생의학연구센터, 중국 산둥대 등의 공동 연구진은 높은 수준의 에스트로겐이 기억력에 미치는 영향을 생쥐와 사람을 대상으로 분석했다. 연구 결과는 국제학술지 ‘사이언스 불러틴’에 게재됐다.

임신 중 나타나는 건망증이나 인지 변화를 두고 ‘프레그넌시 브레인’, ‘맘네시아’ 등의 표현이 쓰인다. 방에 들어간 뒤 왜 왔는지 잊거나 물건을 엉뚱한 곳에 두고, 대화 도중 무슨 이야기를 하려 했는지 놓치는 식이다.

임신 중 나타나는 일시적인 기억력 변화가 높은 에스트로겐 수치와 관련 있을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사진=클립아트코리아)

연구진에 따르면 임신부 약 80%가 이 같은 변화를 경험한다고 보고한다. 다만 이 수치는 객관적인 인지검사 결과가 아니라 임신부들의 자기보고에 주로 기반한 것이다.

연구진은 임신 중 나타나는 지속적인 고농도 에스트로겐 환경을 재현한 생쥐 모델을 이용해 뇌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살펴봤다.

그 결과 높은 수준의 에스트로겐에 노출된 생쥐에서는 일시적인 기억력 저하가 나타났다. 반면 기분과 관련된 행동이나 탐색 동기에는 뚜렷한 변화가 관찰되지 않았다. 연구진은 이를 전반적인 인지능력 저하라기보다 기억과 관련한 특정 변화로 해석했다.

연구진이 주목한 곳은 뇌의 ‘외측 시상하부’와 기억 형성에 중요한 ‘해마’를 연결하는 신경회로였다.

에스트로겐 수치가 높아지자 외측 시상하부에 있는 GABA성 뉴런의 활동이 증가했다. 이 뉴런들은 해마의 CA3 영역으로 신호를 보내는데, 활동이 지나치게 증가하면서 해마의 기능을 억제해 기억력 저하로 이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에스트로겐의 신호를 전달하는 ‘에스트로겐 수용체 알파(ERα)’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연구진이 생쥐의 시상하부 뉴런에서 에스트로겐 수용체를 유전적으로 제거하자 높은 에스트로겐이나 임신으로 나타났던 기억력 문제가 완화됐다.

특정 신경회로를 직접 조절하는 실험에서도 같은 결과가 나왔다. 시상하부에서 해마로 이어지는 신경회로를 억제하자 높은 에스트로겐에 따른 기억력 저하가 나타나지 않았다. 반대로 에스트로겐 수치를 높이지 않은 상태에서도 이 신경회로를 인위적으로 활성화하자 기억력이 떨어졌다.

연구진은 사람에게서도 관련성을 살펴봤다. 임신 단계가 다른 여성과 임신하지 않은 여성을 포함해 총 70명을 대상으로 장·단기 기억과 작업기억 등을 검사했다.

그 결과 임신 후기 여성에게서 특정 기억 과제의 수행 능력이 떨어지는 현상이 나타났으며, 혈중 에스트로겐 농도가 높을수록 일부 기억 검사 성적이 낮은 경향이 관찰됐다. 다른 영향을 줄 수 있는 요인을 보정한 뒤에도 이러한 연관성이 나타났다고 연구진은 설명했다.

그러나 생쥐 실험과 사람 연구의 결과를 동일하게 해석해서는 안 된다.

생쥐에서는 특정 신경회로를 직접 활성화하거나 억제해 에스트로겐과 기억력 저하 사이의 인과관계를 실험적으로 확인했다. 반면 임신부에게서는 뇌 신경회로를 직접 조작하거나 측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높은 에스트로겐과 기억력 변화 사이의 ‘연관성’을 확인한 수준이다.

연구를 이끈 옌린 허 페닝턴 생의학연구센터 교수는 “임신부에게서 이 특정 신경회로를 직접 조작하거나 측정하지는 않았다”며 사람 대상 연구 결과가 생쥐에서 발견한 가설을 뒷받침하지만 동일한 수준의 인과관계를 확립한 것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연구진은 임신 중 나타나는 기억 변화가 지능이나 전반적인 인지능력이 떨어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임신 후기에 두드러질 수 있고 출산 후까지 이어질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시간이 지나면서 사라지는 일시적이고 특정 기억 기능에 국한된 변화라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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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적인 수준의 에스트로겐은 오히려 인지 기능에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연구진은 낮은 수준에서 주기적으로 변하는 에스트로겐과 임신 중 장기간 높은 수준으로 유지되는 에스트로겐이 뇌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작용할 가능성에 주목했다.

이번 연구를 이끈 정 선 베일러의대 교수는 임신 중 나타나는 기억 변화에 대해 “임신이 단순히 사람을 덜 똑똑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며 “특정 인지 과제에 나타나는 보다 미묘하고 선택적인 영향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