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입지는 전력이 결정"…AI 시대 '전기국가' 전략 본격화

AI·반도체 메가프로젝트에 年 260TWh 신규 수요 전망…전력망 선투자·수요관리 병행 주문

IT 일반입력 :2026/08/20 14:22

인공지능(AI)과 반도체 산업의 급성장으로 전력 확보 능력이 기업과 산업의 입지를 결정하는 시대가 본격화하고 있다. 정부가 추진하는 AI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클러스터 등 대형 프로젝트만으로 현재 국내 발전량 절반에 육박하는 추가 전력수요가 발생할 것이란 전망이 나오면서 전원믹스와 전력망을 국가 산업 전략 차원에서 재설계해야 한다는 제언이 나왔다.

20일 오전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제12차 전력수급기본계획 수립을 위한 4차 공개토론회에서는 ‘전기국가’를 주제로 AI 시대 전력수요 증가와 이에 대응한 에너지 정책 방향이 논의됐다.

이날 발표에서는 전기를 단순한 에너지원이 아니라 산업·안보·기술 경쟁력을 결정하는 국가 전략 자산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전기국가는 무탄소 전력 생산과 전력망, 에너지 AI, 저장기술 등을 고도화하고 이를 토대로 산업·수송·건물 등 사회 전반의 전기화를 추진하는 개념이다.

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이 20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12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을 위한 정책토론회에 참석하여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기후부)

발제를 맡은 이종수 서울대학교 기술경영경제정책전공 교수는 "4차 산업혁명의 연료는 전기"라며 "AI 구동을 위한 대규모 전력 확보와 AI를 활용한 전력 효율화가 결합하는 것이 향후 국가 경쟁력의 핵심"이라고 진단했다.

AI·반도체 전력수요 급증…산업 입지 기준도 ‘전력 확보’로

전력 확보 여부가 향후 첨단산업 입지를 좌우할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두번째 발제를 맡은 박우영 에너지경제연구원 에너지전환정책연구본부장은 정부가 추진하는 AI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클러스터에서 총 38.4GW, 연간 약 260TWh 규모의 추가 전력수요가 발생할 것으로 추산했다.

AI 데이터센터는 2035년까지 18.4GW 규모로 확대되면서 연간 약 121TWh를 소비하고, 반도체 클러스터에서는 2041년까지 20GW, 약 140TWh 전력수요가 발생할 것으로 전망했다. 2025년 국내 총발전량이 596TWh인 점을 고려하면 메가프로젝트 추가 수요만 현재 발전량의 약 40~50%에 해당한다.

(사진=에너지경제연구원)

기존 전력수요와 다른 점은 규모뿐만 아니다. AI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팹은 24시간 높은 가동률을 유지하는 만큼 특정 시간대에 몰리는 첨두수요가 아니라 전력시스템의 기저수요 자체를 끌어올릴 가능성이 크다.

이에 따라 산업입지를 정한 뒤 전력망을 연결하던 기존 방식도 한계에 직면했다는 지적이다.

발표자료는 기존 산업정책이 '선(先) 산업입지 결정, 후(後) 전력망 확충' 방식이었다면 앞으로는 '선 전력공급여력, 후 산업입지 선정' 구조로 전환될 것으로 내다봤다. 단일 부지에 GW급 전력수요가 집중되면서 충분한 전력을 적기에 공급할 수 있는지가 공장과 데이터센터 입지의 선결 조건이 된다는 의미다.

이 교수도 "첨단산업의 입지 결정 요인이 결국 전력 확보 가능 여부로 이동했다"고 강조했다.

재생에너지 100GW로도 부족…전력망 선투자·전원믹스 재편 과제

급증하는 전력수요를 감당하려면 재생에너지 확대와 함께 다양한 무탄소 전원을 확보해야 한다는 제언도 나왔다.

에너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2030년까지 태양광 80GW와 풍력 20GW 등 재생에너지 설비 100GW를 구축하더라도 예상 연간 발전량은 약 150TWh다. 메가프로젝트에서 예상되는 신규 전력수요 260TWh에 미치지 못한다.

4차 공개토론회 발제를 맡은 이종수 서울대 교수(왼쪽)와 박영우 에너지경제연구원 연구본부장 (사진=기후에너지환경부 유튜브 캡처화면)

박 본부장은 재생에너지 확대는 필요조건이나 충분조건은 아니라고 평가했다. 재생에너지 보급 확대 자체는 필요하지만 AI·반도체 중심의 수요 증가를 감안하면 다른 무탄소 전원과 저장·유연성 자원을 함께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력 생산 시점과 소비 지역이 다른 ‘시공간 불일치’도 과제로 꼽혔다. AI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공장은 하루 24시간 일정하게 전력을 사용하는 반면 태양광과 풍력은 발전시간과 발전량이 일정하지 않다. 재생에너지 발전은 호남·제주 등에 집중돼 있지만 대규모 신규 수요는 용인 등 수도권에 몰려 있다는 점도 문제다.

실제 11차 전기본에 반영된 송·변전설비 54건 가운데 30건이 지연될 것으로 예상돼 전력망 적기 확충이 산업 경쟁력의 주요 변수로 부상하고 있다.

이에 따라 전력망을 수요 발생 이후 건설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선제적으로 투자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이 교수는 "전력망을 ‘안보 전략 자산’으로 규정하고 투자 판단 기준을 경제성에서 국가경쟁력으로, 수요 대응에서 선투자로 전환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전원믹스 역시 12차 전기본의 핵심 쟁점이 될 전망이다. 에너지경제연구원은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 100GW 조기 이행과 원전 계속운전, 에너지저장장치(ESS)·양수 확대 등을 추진하고, 2030~2035년에는 해상풍력 상업운전과 함께 신규 원전·소형모듈원자로(SMR) 추가 건설 여부를 결정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박 본부장은 "리드타임이 긴 설비일수록 빠른 의사결정이 필요하다"며 의사결정을 미룰수록 2035년 이후 활용할 수 있는 무탄소 전원의 선택지가 좁아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결국 AI 시대 전력정책은 단순히 발전소를 얼마나 더 건설할지를 넘어 산업 입지와 전력망, 전원 구성, 시장 제도를 함께 설계하는 문제로 확대되고 있다. 정부가 ‘전기국가’를 12차 전기본의 주요 방향으로 제시한 만큼 향후 전력 확보 속도와 방식이 AI·반도체 등 첨단산업 경쟁력을 좌우할 핵심 변수로 부상할 전망이다.

"더 짓는 것만이 해법 아냐"…전력망·수요관리 병행 주문

토론에서는 전력 공급 확대뿐 아니라 수요 관리와 에너지 전환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임재민 에너지전환포럼 사무처장은 "산업 수요가 늘어날 때 꼭 필요한 수요인지 먼저 고민해야 한다"며 "설비만 늘려 문제를 해결하려 하면 금방 한계에 봉착할 것"이라고 말했다.

패널들이 토론 중인 모습 (사진=기후에너지환경부 유튜브 캡처화면)

전력망 투자 방식에 대한 제안도 나왔다. 박태웅 녹서포럼 의장은 "전기국가는 단순히 전기를 많이 만드는 나라가 아니라 사회 전체를 소프트웨어와 인공지능이 작동할 수 있는 플랫폼으로 만드는 나라"라며 스마트그리드와 에너지 데이터 기반 구축 필요성을 강조했다. 또 "전력망을 국가 전략자산으로 보고 망 투자를 한전에서 분리하는 방안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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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전력수요 전망이 과도한 것 아니냐는 반론도 제기됐다. 청중 질의 시간에 성원기 강원대 명예교수는 "AI와 반도체 때문에 또 수요가 과다하게 계상되는 것 아니냐"고 지적했다. 이에 박우영 에너지경제연구원 본부장은 재생에너지 확대와 함께 ESS·양수 등 유연성 자원, 안정적인 무탄소 전원 확보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이날 오전 토론회에 참석한 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은 "반도체 칩이나 AI 데이터센터를 준비하는 과정은 마음먹으면 2~3년이면 할 수 있지만 전력을 준비하는 일은 훨씬 더 오래 걸리기에 전력을 단순히 산업의 보조 수단이 아니라 국가 전략 과제로 삼고 안보 자산화해야 한다"며 "계속되는 토론회를 통해 전문가와 국민들 의견을 수렴해 새로운 방식의 12차 전기본이 잘 만들어지도록 지원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