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리즈는 오래된 장소를 과거의 흔적으로만 보지 않고 오늘의 도시가 다시 읽어야 할 문화자산으로 바라보는 연재입니다. 시즌1이 도시와 유산을 전략과 경험, 콘텐츠의 관점에서 읽었다면, 시즌2는 세계유산과 오래된 장소를 도시의 기억, 감각, 표정의 언어로 다시 해석합니다. 사람은 유산의 이름보다 그 도시를 걸었던 감각을 더 오래 기억합니다. 이번 시즌은 인문 에세이 『우리는 왜 오래된 장소에 끌리는가』의 시선을 바탕으로, 제4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부산 벡스코, 2026년 7월 19~29일)와 민선 9기 지방정부 출범을 함께 바라보며 도시와 유산이 오늘의 삶 속에서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읽어냅니다. 시즌2는 2026년 6월 29일부터 7월 31일까지 주 1~2회씩 연재합니다. [편집자주]
제4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 열리는 부산 벡스코(BEXCO)에는 개최국 공식 전시관인 대한민국관이 운영되고 있다.
‘대한민국관’(K-Heritage House)에는 정부와 지방정부, 종교계와 민간 등 35개 기관이 참여해 45개 전시·체험 콘텐츠를 선보인다. 세계유산과 인류무형유산, 세계기록유산뿐 아니라 국제협력과 전통기술, 디지털콘텐츠와 생활문화까지 한자리에 모였다.
대한민국관은 우리 유산을 세계에 소개하는 공간이다. 동시에 대한민국이 유산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떤 태도로 지키며, 어떤 가치로 다음 세대와 나누려 하는지를 보여주는 자리다.
지난해부터 부산 세계유산위원회를 바라보며 붙들어온 질문도 여기에 있다.
우리는 세계유산을 보유한 나라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그 가치를 오늘의 언어로 경험하게 하고, 세계와 함께 이어가는 나라로 기억될 것인가.
대한민국관에서 중요한 것은 어느 부스가 더 크고 화려한가가 아니다. 서로 다른 전시와 사업 사이에서 대한민국이 세계유산을 대하는 하나의 방향을 읽어내는 일이다.
보유국에서 책임국으로
대한민국관에서 가장 먼저 읽히는 것은 우리 유산의 우수성만이 아니다. 세계유산을 국제사회와 함께 지켜야 한다는 책임이다.
‘대한민국과 유네스코’관은 대한민국이 유네스코에 가입한 이후 걸어온 시간을 보여준다. 전쟁 이후 교육과 문화의 복구를 지원받았던 대한민국은 이제 국가유산 ODA와 국제협력을 통해 다른 나라의 유산 보존과 역량 강화에 참여하는 나라로 성장했다.
국립문화유산연구원이 마련한 ‘국경을 넘어 유산으로 미래를 잇다’도 같은 흐름에 놓여 있다. 조사와 연구, 보존기술과 경험을 국제사회와 나누는 일은 대한민국이 세계유산 분야에서 맡아가고 있는 역할을 보여준다.
세계유산강국의 위상은 등재 건수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자국의 유산을 잘 지키는 데서 더 나아가 다른 나라의 유산과 기억을 함께 보호하고, 보존 경험과 역량을 나눌 때 그 위상은 책임으로 완성된다.
세계유산은 한 국가의 영토 안에 있지만 그 가치는 인류 전체가 함께 나누는 공동의 자산이다. 세계유산협약은 바로 그 공동의 책임을 약속한 제도다.
세계유산은 과거의 훈장이 아니라 인류가 함께 지키기로 한 미래의 약속이다.
대한민국관이 협약과 국제협력의 역사를 전면에 놓은 것은 개최국의 위상에 걸맞은 선택이다. 대한민국이 유산을 많이 보유한 나라에서 국제사회의 책임을 함께 나누는 나라로 나아가고 있음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유산은 장소와 사람을 통해 이어진다
한양의 수도성곽과 수원화성, 개최도시 부산을 다룬 부스는 유산을 고립된 기념물이 아니라 오늘의 도시 안에서 이어지는 시간으로 바라보게 한다.
한양의 수도성곽은 옛 도성을 둘러싼 벽에 머물지 않는다. 산과 길, 마을과 도심을 잇는 선이자 서울이 변화해온 시간을 품은 장소다. 수원화성 역시 성곽의 건축적 가치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성 안의 길과 시장, 주민의 생활과 축제가 겹치며 오늘의 수원을 만든다.
부산에는 피란수도와 항만, 전쟁과 이주, 산업화의 기억이 남아 있다. 세계유산위원회가 부산에서 열린다는 사실은 유산이 오래된 왕도나 고도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도시를 살아온 사람들의 이동과 생활, 기억과 흔적도 우리가 유산의 관점에서 새롭게 읽어야 할 시간이다.
유산은 장소에 남아 있을 때 보존되지만, 시민이 다시 걷고 머물며 경험할 때 비로소 도시의 현재가 된다.
한국의 갯벌과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은 자연유산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묻는다. 제주는 땅이 만들어진 긴 지질학적 시간을 품고 있고, 갯벌에는 생물다양성과 철새의 이동, 지역주민의 삶과 노동, 계절의 변화가 함께 쌓여 있다.
자연유산은 사람과 분리된 풍경만을 뜻하지 않는다. 자연의 질서 안에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왔고 앞으로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지도 함께 묻는다.
세계유산을 경험하게 한다는 말도 더 많은 방문객을 불러들이는 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장소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자연의 시간을 존중하고, 다음 세대도 그 가치를 만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보존과 관광, 주민의 삶과 지역발전이 함께 다뤄져야 하는 이유다.
무형유산은 유산의 중심에 다시 사람을 놓는다.
갓일과 나전장, 소목장, 궁시장과 같은 전통기술은 완성된 결과물만으로 전승되지 않는다. 재료를 알아보는 눈과 도구를 다루는 손, 몸에 밴 동작과 오랜 반복이 있어야 다음 세대로 넘어간다.
유산은 오래됐다는 이유만으로 살아남지 않는다. 누군가 배우고 익히며 다시 전할 때 이어진다.
국립무형유산원의 ‘무형유산 공연 아트마켓’은 무형유산을 보존과 전승의 영역에만 머물게 하지 않고 공연과 창작, 관객과의 만남으로 확장한다. 전승자와 창작자, 공연시장과 관객을 연결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다만 활용의 폭이 넓어질수록 그 유산이 태어난 공동체와 역사적 맥락에 대한 존중도 함께 깊어져야 한다.
전승 없는 활용은 뿌리가 약하고, 활용 없는 전승은 사회와 멀어질 수 있다.
설명은 유산을 이해하게 하지만, 감각은 유산을 기억하게 한다. 사람의 움직임과 호흡, 반복되는 손길을 마주할 때 유산은 과거의 흔적을 넘어 살아 있는 시간으로 다가온다.
오늘의 경험을 내일의 관계로
대한민국관에는 기록유산과 대중문화, 전통기술과 디지털콘텐츠가 한 공간에 놓였다.
세계기록유산과 데브시스터즈의 게임 IP ‘쿠키런’을 활용한 콘텐츠가 한 공간에서 만나는 장면은 유산이 오늘의 세대와 어떤 언어로 소통할 것인지 묻는다.
기록은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말한다. 게임과 캐릭터는 그 기록을 오늘의 세대와 연결하는 친숙한 입구가 될 수 있다.
친숙함은 유산으로 들어가는 문턱을 낮추지만, 그것만으로 이해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유산의 이미지와 외형에 머문다면 콘텐츠의 의미와 지속성도 제한될 수 있다. 장소의 역사와 사람의 기억, 유산이 지닌 맥락을 오늘의 언어로 충실하게 옮기는 일이 중요하다.
이머시브 전시 ‘헤리티지: 타임리스 타임’도 같은 질문을 이어간다.
몰입형 전시의 가치는 화면의 크기나 영상의 화려함에만 있지 않다. 오래된 장소와 시간의 의미를 오늘의 감각으로 얼마나 설득력 있게 전하느냐가 중요하다.
기술은 사라진 장소를 다시 보여주고, 접근하기 어려운 공간을 열어주며, 멈춰 있던 기록에 움직임과 소리를 더할 수 있다. 다만 기술의 인상만 남고 유산의 의미가 흐려진다면 경험의 중심이 바뀔 수 있다.
좋은 디지털콘텐츠는 관람객을 화면 안에 머물게 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실제 장소를 다시 찾고 싶게 하며, 기록 속 시간이 오늘의 삶과 어떻게 이어지는지 생각하게 해야 한다.
기술은 감각의 문법이다. 다만 그 문법이 말해야 할 주어는 언제나 유산이어야 한다.
오늘의 언어는 디지털에만 있지 않다.
근현대건축유산 특별전 ‘나의 유산: 살아온, 살아가는, 살아갈’은 가까운 과거를 오늘의 삶과 어떻게 연결할 것인지 묻는다. 사람들이 일하고 배우며 생활했던 건축물에는 한 시대의 삶과 기술, 도시의 변화가 담겨 있다.
중요한 것은 건축물을 과거의 모습으로 고정하는 일이 아니다. 장소의 기억을 살리면서 오늘의 쓰임을 찾는 일이다. 살아온 건축이 오늘을 살아가는 공간이 되고, 미래에도 쓰이는 장소로 이어져야 한다.
농림축산식품부와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의 K-푸드 홍보관은 유산을 일상의 감각으로 확장한다. 음식은 박물관에 보관된 유물은 아니지만 한 사회가 오랜 시간 축적해온 자연환경과 노동, 저장과 조리의 지혜를 담고 있다. 김치와 장, 발효음식에는 조리법뿐 아니라 계절과 공동체, 생활의 기억이 배어 있다.
세계인이 한국문화를 처음 만나는 입구가 반드시 궁궐이나 사찰일 필요는 없다. 한 그릇의 음식과 하나의 맛을 통해 한국인의 생활방식과 자연관을 만날 수도 있다.
이처럼 대한민국관은 국제협력에서 도시와 자연, 사람과 전승, 기술과 생활문화로 이어지는 국가유산의 넓은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정부와 지방정부, 공공기관과 민간이 각자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참여했고, 유산을 보존의 대상에만 두지 않고 교육과 관광, 콘텐츠와 산업, 국제협력의 영역으로 확장하고 있다는 점도 의미가 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이 성과를 전시장 밖으로 이어가는 일이다.
대한민국관에서 축적한 자료와 콘텐츠가 교육과 아카이브로 남고, 지역의 세계유산 현장과 도시에서 다시 활용돼야 한다. 전승자와 창작자, 지방정부와 기업, 시민사회가 이곳에서 맺은 관계도 구체적인 후속 협력으로 발전할 필요가 있다.
국제회의의 성공적인 운영은 중요한 성과다. 여기에 문화적 경험과 지속적인 관계가 더해질 때 회의는 오래 남는 기억이 된다.
세계인이 기억하는 것은 규모보다 장면이고, 시설보다 이야기이며, 정보보다 감각이다.
대한민국관은 개최국 대한민국이 세계를 향해 건네는 하나의 답변이다. 그 안에는 협약과 기록, 도시와 자연, 전승자의 손과 디지털 기술, 음식과 생활의 기억이 함께 있다.
우리는 세계유산을 보유한 나라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그 가치를 책임 있게 지키고, 오늘의 언어로 경험하게 하며, 세계와 함께 이어가는 나라로 기억될 것인가.
부산 세계유산위원회는 그 전환을 확인하는 무대다.
대한민국관에서 읽어야 할 것은 전시물의 수를 넘어선다. 유산의 시간을 오늘의 삶과 연결하고, 그 가치를 미래의 약속으로 이어가려는 대한민국의 태도다.
필자 이창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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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경영학박사(Ph.D.). 예술-기술 칼럼니스트이자 인문 논픽션 작가다. 오래된 장소를 오늘의 사람들이 다시 걷고 머물고 기억하게 만드는 일을 20년 넘게 현장에서 고민해왔다. 문화유산과 도시,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만나는 장면을 기록하며, 장소에 남은 시간의 결이 오늘의 도시에서 어떤 표정으로 되살아나는지를 질문해왔다. 현재 헤리티지랩(Heritage LAB) 소장으로 도시 장면 설계 프로젝트를 이어가고 있다. 저서로 미다스북스에서 펴낸 『K-헤리티지, 매력 도시 디자인』과 『우리는 왜 오래된 장소에 끌리는가』가 있다. 글로벌 IT 미디어 지디넷코리아에서 [도시와 유산을 읽는 법]을 연재하며, 장소의 시간과 도시의 표정을 오늘의 언어로 풀어내고 있다.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