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보인이 '성과 설명' 언어 대신, '관계 설계' 언어 써야 하는 이유

[홍보인의 물건㉔] 번역

전문가 칼럼입력 :2025/12/24 12:19

문지형 알스퀘어 대외협력실장

"Back in the day / 한 사람당 하나의 사랑이 있었대."

문지형 알스퀘어 대외협력실장

이찬혁의 노래 '멸종위기사랑'은 과거형으로 시작한다. 마치 오래전, 누구나 자연스럽게 단 하나의 사랑을 품고 살았던 것처럼. 그러나 이 문장은 추억을 꺼내는 게 아니다. 과거를 빌려 현재를 겨누는 언어다.

곧이어 등장하는 가사는 이 곡의 본심을 드러낸다.

"내일이면 인류가 잃어버릴 멸종위기사랑."

사랑은 더 이상 개인의 감정이 아니다. 관리하지 않으면 사라질지 모르는 희귀 자원이 된다. 이찬혁은 사랑이 부족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변질됐다고 단정하지 않는다. 사랑을 상태로 번역한다. 그래서 이 곡은 비난이 아니라 진단처럼 들린다.

1960년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난 거장 장 미셸 바스키야의 작품에서도 같은 원리가 작동한다. 거리의 언어와 기호를 캔버스로 끌어올린 그는 중요한 단어를 일부러 지운다. 칠해버리거나 긁어내고, 덮어버린다. 결과는 역설적이다. 보이지 않게 된 단어는 오히려 더 또렷해진다.

관람객은 묻게 된다. 왜 지웠을까, 무엇을 말하려 했을까. 바스키야는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생각하게 만든다. 삭제를 통해 메시지를 강화하는 방식. 이것은 미술 기법이기 이전에, 고급 커뮤니케이션 전략이다.

이찬혁의 노래와 바스키야의 그림은 서로 다른 영역에 있지만,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 직접 말하지 않는다. 감정을 선언하지 않는다. 대신 번역한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나는 확신한다. 우리의 물건은 보도자료도, 코멘트도, 숫자도 아니다. 홍보인의 물건은 '번역'이다.

"삭제를 통해 메시지를 강화하는 방식. 이것은 미술 기법이기 이전에, 고급 커뮤니케이션 전략이다."(이미지=클립아트코리아)

번역이 필요한 순간들

홍보인은 단순히 청산유수로 말하는 사람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말을 그대로 쓰지 않는 사람이다. 현장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말 대부분은 정제되지 않은 상태다. 감정이 섞인 질문, 불안이 실린 평가, 때로는 공격에 가까운 표현들이다. 이 말을 그대로 옮기는 순간 커뮤니케이션은 충돌한다.

기자회견장을 떠올려보자. CEO가 실적 부진에 대한 질문을 받는다.

"경영 판단이 잘못된 것 아니냐"는 날카로운 물음 앞에서 "아니오, 잘못된 질문입니다"라고 답하는 순간, 대화는 싸움이 된다.

홍보인의 역할은 이 언어를 다른 언어로 바꾸는 데 있다.

"시장 환경 변화에 대한 대응 속도를 높이는 과정에 있습니다"라는 답변으로 옮기는 순간, 공격은 진단이 되고 변명은 계획이 된다. 공격을 의도로, 불안을 상황으로, 비난을 구조로 옮기는 일. 이 변환이 일어날 때, 말은 비로소 전달된다.

시트콤형 미국드라마를 보면 알 수 있다. '프렌즈'의 챈들러나 '브루클린 나인나인'의 제이크는 즉시 반응하지 않는다. 2~3초 정도 멈춘 뒤, 전혀 다른 각도의 대사를 던진다.

모니카가 "이 옷 어때?"라고 물었을 때 챈들러는 "좋아"라고 즉답하지 않는다. 잠시 멈춘 뒤 "Could this BE any more...appropriate for the occasion(이 상황에 이보다 더 잘 어울릴 수가 있을까)?"이라고 되묻는다. 질문을 질문으로 되치는 것이다.

동료가 "요즘 스트레스 많아"라고 고민을 털어놓자 챈들러는 "I'm not great at the advice. Can I interest you in a sarcastic comment(충고는 내 전문 아냐. 사르카즘 한 방 어때)?"라고 답한다. 감정을 인정하는 대신, 자신의 대응 방식을 메뉴처럼 제시한다.

제이크도 마찬가지다. 상사가 "이번 사건 해결 못 하면 큰일이야"라고 압박하자 그는 "Title of your sex tape"이라는 러닝 개그로 긴장을 전환한다. 누군가의 말을 즉석에서 "그게 네 섹스테이프 제목이네!"라고 비꼬며 웃기는 이 표현은, 실제 의도와 반대로 표현하는 사르카즘(sarcasm)의 전형이다. 압박을 농담으로 번역하는 순간 대화의 주도권을 가져온다.

그들의 말은 빠르지 않은데도 지적으로 보이고, 가볍지 않은데도 세련돼 보인다. 이건 재치의 문제가 아니다. 상대의 말을 그대로 받지 않고, 한 번 번역한 뒤 다시 내놓는 기술이다.

주의할 점이 있다. 사르카즘은 적절히 사용하면 긴장을 풀고 관계를 부드럽게 만들지만, 과하면 독이 된다. 상대가 비아냥으로 받아들이거나, 진심을 담은 말조차 조롱으로 오해할 수 있다. 챈들러와 제이크가 사랑받는 이유는 그들의 사르카즘이 상대를 공격하는 게 아니라 상황을 재해석하는 데 쓰이기 때문이다.

홍보인도 마찬가지다. 즉답은 쉽지만 위험하고, 한 박자 늦춘 번역은 느리지만 안전하다. 그러나 그 번역이 비꼼으로 들리는 순간, 신뢰는 무너진다.

"압박을 농담으로 번역하는 순간 대화의 주도권을 가져올 수 있다."(이미지=시트콤 '프렌즈')

일상 속 번역의 기술

일상의 대화에서도 번역은 위력을 발휘한다. 함께 밥을 먹고 나온 상대가 묻는다. "나, 살 좀 찐 것 같지 않아?" 이 질문은 체중에 대한 질문이 아니다. 스스로에 대한 불안, 확인받고 싶은 감정의 표현이다. "아니야"는 거짓말처럼 들리고, "조금?"은 상처가 된다. 번역이 필요하다. "내 몸이 스펀지가 된 줄 알았잖아. 마치 습한 사우나 같았다니까." 몸을 평가하지 않으면서, 감정을 다독인다. 판단 대신 환경을 제시하는 순간 대화는 부드러워진다.

미디어 현장에서도  정교한 번역이 필요하다. 기자가 말한다. "오늘 이사님이 진행한 미디어 간담회, 너무 좋았어요."

이 말을 그대로 받아 "감사합니다"라고 답하는 것은 무난하지만, 관계를 확장시키지는 못한다.

그래서 이렇게 답한다. "완전 망했다고 생각했는데, 기자님이 문 열고 들어오는 순간 직감했죠. 아, 오늘 행사는 대박이구나."

이 말은 성과를 개인의 능력으로 귀속시키지 않는다. 대신 관계의 변수로 돌린다. 홍보인의 언어는 성과를 설명하는 언어가 아니라, 관계를 설계하는 언어여야 한다.

"홍보인의 언어는 성과를 설명하는 언어가 아니라, 관계를 설계하는 언어여야 한다."(제공=클립아트코리아)

번역의 진화

홍보인의 말하기는 계속 진화해왔다. 10년 전만 해도 보도자료는 회사가 말하고 싶은 것으로 가득했다. "업계 최초", "획기적인 기술력", "혁신적인 서비스 출시"처럼 공급자 중심의 언어였다. 그러나 기자는 이런 표현을 그대로 쓰지 않는다. 독자도 관심 없다.

지금은 다르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커피를 주문하면 회사 앞 카페에 도착할 때쯤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받을 수 있습니다"처럼 독자의 하루로 번역한다. "고객 대기 시간을 평균 3분에서 40초로 줄였습니다"처럼 숫자를 경험으로 풀어낸다. 3분이 뭐가 중요한가. 중요한 건 더 이상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다.

바스키야가 중요한 단어를 지워 관객의 시선을 붙잡았듯, 홍보인은 말을 줄여 독자의 해석을 끌어낸다. 설명이 과해질수록 설득력은 떨어진다. 여백이 생길수록 메시지는 오래 남는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는 기술 사양을 나열하지 않았다. "주머니에 1천곡을"이라는 한 문장으로 아이팟을 설명했다. 기능이 아니라 경험으로 번역한 것이다.

"여백이 생길수록 메시지는 오래 남는다."(이미지=픽사베이 아이팟)

번역의 윤리

그러나 윤리가 필요하다. 모든 번역이 정당한 것은 아니다. 거짓을 진실처럼 포장하는 것은 번역이 아니라 왜곡이다. 번역의 핵심은 본질을 바꾸지 않으면서 형태를 조정하는 데 있다.

좋은 번역과 나쁜 번역의 차이는 명확하다. 좋은 번역은 이해를 돕는다. 나쁜 번역은 본질을 흐린다. 홍보인이 "구조조정"을 "조직 최적화"로 바꾸는 것은 번역이 아니다. 단어만 바꾼 것이다. 반면 "시장 환경 변화에 맞춰 인력 구성을 재편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번역이다. 맥락을 제공하고, 방향을 제시한다.

번역은 선택의 기술이다. 무엇을 옮기고, 무엇을 남길지 결정하는 일이다. 이 선택이 메시지의 품격을 만든다. 어떤 단어를 남기고 어떤 맥락을 생략할 것인가. 이 판단이 신뢰를 만들거나 무너뜨린다.

정확한 번역이란 무엇인가. 상대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바꾸는 것이다. CEO의 비전을 직원의 언어로, 기업의 전략을 고객의 관점으로, 복잡한 기술을 일상의 비유로 옮기는 것. 이때 중요한 것은 원문의 본질을 지키는 일이다.

관련기사

"번역은 선택의 기술이다. 무엇을 옮기고, 무엇을 남길지 결정하는 일이다."(제공=클립아트코리아)

결국 홍보인의 물건은 단순하다. 번역은 말을 바꾸는 일이 아니라, 의미가 도착할 수 있는 형태로 옮기는 일이다. 감정이 상처가 되지 않도록, 질문이 공격으로 들리지 않도록, 성과가 오만으로 읽히지 않도록 언어를 재배치하는 작업.

이찬혁의 노래처럼, 바스키야의 그림처럼, 직접 말하지 않아도 전달되는 언어를 만드는 것. 그게 홍보인의 일이고, 지금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커뮤니케이션의 방식이다. 세상에는 말이 너무 많다. 그러나 제대로 번역된 언어는 여전히 부족하다. 번역이라는 물건을 손에 쥔 홍보인만이 이 시대의 소음을 뚫고 진짜 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문지형 알스퀘어 대외협력실장

프롭테크 기업 알스퀘어에서 PR과 사내커뮤니케이션, 대관업무를 맡고 있다. 중앙일보 iweekly와 데일리포커스에서 IT 전문기자로 활동하다가, 기업 홍보로 전직했다. 비상교육, SK플래닛, KT, 여기어때 등에서 미디어 커뮤니케이션과 브랜드마케팅, 조직문화를 설계했다. 중견/대기업 PR 최대 커뮤니티 '우끼리'와 스타트업 홍보 네트워크 '다다익선'을 운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