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스테이블코인 발행사 자격을 두고 논쟁이 뜨겁다. 은행만이 발행을 맡아야 한다는 주장과 핀테크 기업에도 기회를 열어야 한다는 주장이 맞선다. 전자는 금융 안정성을, 후자는 혁신과 포용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본질은 “누가 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기준을 충족해야 하는가”에 있다.
놀이기구 안전 규정을 생각해보자. 키가 1m 20cm 이상이어야 탑승할 수 있다는 조건은 차별이 아니라 안전 때문이다. 억지로 기준을 낮추면 사고 위험이 커진다. 더 작은 키의 아이도 태우려면 규정을 바꾸는 게 아니라 기구 자체를 재설계해야 한다. 스테이블코인 발행사 논란도 이와 같다. 은행과 비은행 구분보다 중요한 것은 신뢰를 감당할 수 있는 구조적 요건을 충족하는가 여부다.
국제적으로는 이미 자격 중심 설계가 자리 잡고 있다. 미국의 GENIUS Act는 발행사에 1:1 지급준비금, 월별 공시, 독립 감사 의무를 부과했다. 유럽의 MiCA 역시 준비금 관리, 자본 적정성, 내부 통제를 규정한다. 일본도 은행뿐 아니라 일정 요건을 충족한 송금업자에게 발행을 허용한다. 결국 글로벌 기준은 업종 구분이 아니라 자격 충족 여부다.

한국은 아직 출발선에 서 있다. 국회에서 디지털자산기본법이 논의 중이고, 금융위는 전자금융거래법 내 편입을 검토 중이다. 외환거래법 개정도 거론된다. 그러나 은행 중심이냐, 핀테크 개방이냐는 구도만 반복될 뿐, 발행사 자격 기준에 대한 구체적 논의는 부족하다. 제도가 본격적으로 시행되기 전에 신뢰 중심의 기준을 명확히 세우지 못한다면, 한국은 국제 경쟁에서 뒤처질 위험이 크다.
지금 필요한 것은 업종별 선 긋기가 아니라 명확한 자격 요건이다. 첫째, 준비금 관리와 공시가 확실해야 한다. 발행량과 동일한 가치를 보장하는 자산을 안전하게 예치하고 이를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둘째, 보안과 내부 통제가 필요하다. 사이버 보안, 이상거래 감시, 내부 리스크 관리 체계가 필수적이다. 셋째, 거버넌스와 책임 구조가 분명해야 한다. 발행사 내부의 이해충돌을 최소화하고 사고 발생 시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해야 한다. 넷째, 투명한 공시 체계가 확보되어야 한다. 이용자와 투자자가 언제든 발행 규모와 준비금 상태를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네 가지 요건은 국제적으로도 이미 핵심 기준으로 자리 잡았다. 결국 이를 충족하지 못한다면 은행이라도 발행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 반대로 핀테크 기업이라 하더라도 충족했다면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업종이 아니라 신뢰를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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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이블코인은 단순한 디지털 토큰이 아니다. 금융 신뢰를 코드로 구현하고, 국가경제의 기초 질서를 새롭게 짜는 인프라다. 따라서 발행사 자격은 느슨한 포용성도, 과도한 독점도 아닌 신뢰 중심의 기준으로 설계돼야 한다. 지금이 바로 제도 설계의 골든타임이다. 은행 중심 논의와 핀테크 개방 논쟁을 넘어, 구체적인 자격 요건을 법제화하고 제도화하는 데 속도를 내야 한다.
결국 질문은 “은행이 할 것인가, 핀테크가 할 것인가”가 아니다. “누가 신뢰를 감당할 수 있는가”다. 한국은 이제 업종 중심의 소모적 대립에서 벗어나, 자격 기준에 근거한 제도 설계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스테이블코인 산업의 지속가능성을 보장하고, 글로벌 경쟁 속에서 금융 신뢰의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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