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AI라는 거대한 기술적 변곡점이 어떻게 기업과 산업의 아키텍처를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는지 살펴봤다. SW 아키텍트가 바라봐야 할 세상은 기술 영역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지정학적 현실, 즉 세계 질서의 재편은 기술 선택과 아키텍처 방향에 그 어떤 기술 트렌드보다 더 강력하고 근본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거대한 변화의 소용돌이 앞에서, 우리는 먼저 대한민국 SW시장이 처한 기이하고 위태로운 현실부터 직시해야 한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대한민국의 SW 시장은 세계 10위권의 경제 규모에 걸맞지 않게 이상하고, 기괴하며, 기형적으로 작다. 그 근본 원인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지만 애써 외면해 온 구조적 문제, 바로 대기업 자회사 중심의 SI(system Integration) 산업 구조에 있다. 삼성SDS, LG CNS, SK AX(구 SK C&C)와 같은 대기업 계열 SI 회사들은 그룹 내부의 안정적인 IT 서비스 물량을 기반으로 성장했다.
이들의 핵심 비즈니스 모델은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는 SW ‘제품(Product)’을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예산과 기간 내에 그룹사의 요구사항에 맞춘 시스템을 구축하고 운영하는 ‘서비스(Service)’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마치 건설업처럼 공사단위로 외국 기술을 도입해서 흉내 내거나 유사하게 카피하는 카패 캣(Copy Cat)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미 다른 한국의 기술산업들은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성장했음에도 글로벌 시장에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데, 유독 SW만은 그렇지 않다. 전세계 SW시장에서 '제품' 비중이70%가 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고작 30%미만이다. 아직까지 제대로 된 글로벌 SW 기업 하나가 없다. 겨우 정부의 과도한 보호아래 소버린(Sovereign)을 외치며 한글과컴퓨터가 있고 몇몇 한국내부의 특화된 시장에 안주하는 SW회사들이 생겨났을 뿐이다.
이러한 구조는 지난 수십 년간 대한민국 SW 산업을 ‘서비스 위주’의 내수 시장에 안주하게 만들었다. 뛰어난 개발자들은 혁신적인 제품 개발보다는 안정적인 프로젝트 관리에 집중하게 되었고, 시장의 평가 기준 역시 기술적 독창성보다는 ‘인력 공급 능력(Man Month)’과 ‘원가 관리’가 되어버렸다. 그 결과, 우리는 세계적인 ERP, 데이터베이스, 클라우드 플랫폼 하나 없이 외국계 빅테크 기업들의 기술을 수입해 조립하고 커스터마이징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이는 마치 자동차 엔진이나 변속기를 만들 생각은 않고, 수입 부품으로 조립만 하며 내수 시장에 안주하는 것과 같다.
그 결과는 참담하다. 대한민국의 경제력은 세계를 호령하지만, 글로벌 SW 시장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점유율은 미미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점차 줄어들고 있다. 이는 우리만의 기술과 아키텍처 철학 없이 외부 기술에 의존해 온 당연한 귀결이다. 우리는 우리만의 생태계 안에서 독특하게 진화했지만, 세계 시장의 거친 파도와는 격리된 ‘갈라파고스’가 되어버린 것이다.
과거 미국 중심의 단일 패권(Pax Americana) 시대에는 이 ‘갈라파고스’ 모델이 그럭저럭 통용될 수 있었다. 미국 빅테크 기업들이 제시하는 기술이 곧 글로벌 표준(De facto Standard)이었고, 우리는 그 표준을 빠르게 따라가기만 하면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세상은 변했다. 트럼프 시대 이후 가속화된 미중 기술 패권 경쟁은 시작에 불과하다. 세계는 이제 미국, 중국, 유럽, 그리고 중동과 아프리카를 아우르는 MENA(Middle East and North Africa), 인도, 구 러시아권 등 여러 기술 및 경제 권역으로 나뉘는 ‘다극화(Multipolar)’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이 새로운 시대에 기술은 더 이상 순수한 혁신의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국가 안보의 방패이자, 경제 패권의 창이며, 문화적 영향력의 첨병이다.
그렇다면 질문은 명확해 진다. 기술이 무기가 되는 다극화 세계 속에서, 우리만의 핵심 SW 기술과 아키텍처 철학 없이 과연 생존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처럼 미국 빅테크의 기술을 가져다 쓰는 것만으로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을까? 이제는 전세계가 몇 개의 다극화 된 거대 팀단위로 자국의 오픈소스 진영과 새로운 그들만의 표준화된 기술패권을 준비하고 있다. SW는 거의 모든 현대의 디지털 기술의 최선전의 첨병에 해당하는 기술이다. SW아키텍처는 이들 첨병의 전투무기다.
다음 편에서는 이처럼 파편화되는 세계 속에서 소프트웨어 기술의 본질이 어떻게 변하고 있으며, 각 기술 패권 블록의 움직임이 SW 아키텍처에 어떤 구체적인 영향을 미치는지, 그리고 이 거대한 지정학적 변화 앞에서 SW 아키텍트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논의해 보겠다.
◆ 나희동 크리스컴퍼니 대표는...
-정보관리기술사 (54회), SW아키텍트 (CPSA), 수석감리원
-전남대학교 산업공학과,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컴퓨터공학 석사
-CMU SEEK 1기 MSE, UTD SW MBA 수료
-전/투이컨설팅 SW아키텍처 담당 이사, 마르미III 개발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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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싸이버로지텍 기술연구소 및 플랫폼사업본부 상무
-전/동양시스템즈 솔루션사업본부 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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