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가 주도적으로 연구개발(R&D) 사업을 시작한지 약 60년이 흘러 올해는 정부·민간의 R&D 규모가 100조원을 돌파했다. 이같은 투자 규모는 미국, 중국, 일본, 독일에 이어 5번째로 많다. 정부와 민간 R&D 투자 규모는 지난 2018년 86조원, 2019년 89조원이었다.
투자금뿐 아니라 인력 규모 등에서도 외형적 성장을 이뤘다. 1970년대 R&D 인력 규모를 보면 기업, 공공, 대학 각 부문이 약 4천명이었다. 2019년엔 기업 R&D 규모는 100배 증가한 39만명, 대학은 11만명, 공공은 4만명으로 증가했다.
양적 성장을 이룬 만큼 이제는 내실을 다져야 할 시기다. 문제는 100조원의 투자금을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 과학기술 전체 시스템이 최적화 됐느냐다. 과학기술계의 최종 목표는 R&D의 성과를 산업이 이어받고 이를 통해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다. 100조원 중 정부 예산은 27조4천억원으로 4분의 1정도다. 국민의 세금이 투입되는 만큼 예산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지난 60여년간 이어온 과학기술 정책만으로는 힘들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외형적 확장에만 집중한 나머지 과학기술 정책 방향성 설정시 중심이 돼야 할 철학이 부재하다는 점도 문제점으로 꼽힌다. 표면적으로만 봐도 1950년대 우리나라 첫 베이비부머 세대 상당수가 과학기술계 인재로 포진해 있으나, 요즘 세대 중에서는 이 바통을 이을 수 있는 젊은이들이 얼마나 될지 과학자들은 의문을 갖는다. 쉽게 말해 과학자를 꿈꾸는 아이들을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이에 전문가들은 점진적으로 과학기술 정책 체질을 변화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또한 그 중심엔 과학자들이 연구하기 좋은 환경을 조성하고, 그들 스스로 변화하고자 하는 노력 또한 수반돼야 한다고 진단했다.
갈길 먼 ‘사람 중심 R&D’...연구자 자율보장 시급
연초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과학기술과 관련한 2021년 업무 계획을 발표하며 ‘사람 중심 R&D’ 혁신으로 튼튼한 과학기술의 기초를 확립했다고 자평했다.
그러나 과학자들이 체감하기론 아직 부족하다는 평가다. 전문가들은 진정 과학자 중심의 R&D 환경을 만들기 위해선 창의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연구 지원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제언했다.
김지현 경북대 전자공학부 교수는 “차세대 연구자를 육성하기 위한 획기적인 지원 방안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며 “기존 연구과제 수행형식이 아닌 연구자의 능력만 검증을 하고 연구 목표 및 내용은 연구과제 수행과정에서 자율적으로 변경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연구과제 종료 후 자율적으로 진행했던 연구 성과를 평가하는 방식도 필요하다"며 “연구자 중심의 기초연구 활성화를 위한 지원금 확대가 절실하다”고 덧붙였다.
박상욱 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 교수도 “기초과학 연구비 증액, 학문분야별 지원체계 등이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는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한다”고 밝혔다.
실제로 과기정통부는 연구자 연구몰입 환경 조성을 위해 연구자 주도 기초연구 국정 과제를 지속 늘려왔다. 예산 규모로 보면 2017년 1조2천600억원에서 내년도엔 2조5천200억원으로 늘릴 계획이다. 또한 정부는 민간전문가가 사업관리 전권을 갖고 임무지향적 연구를 수행하는 혁신 도전형 R&D 사업도 올해 중 새로 기획한다.
관련한 시스템 정비를 위해 올초 국가연구개발혁신법이 본격 시행되면서 부처별로 산재된 규정(종전 286개)과 시스템(종전 59개)의 통합을 신속히 추진 중이다.
특히 최근 코로나19로 부각된 생명과학 분야는 장기적인 투자와 지원이 절실하다. 정부는 3대 K-방역인 신속진단키트, 치료제, 백신을 위한 우리나라 원천 기술력을 확보하기 위해 올 하반기 한국바이러스기초연구소를 설립한다.
박상욱 교수는 “생명과학 분야는 기초연구이면서 혁신과 산업과의 간극이 작은 분야로, 대학에서의 기초연구 역량 강화를 위한 장기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지현 교수는 “신약개발환경을 조성하고 장기간의 연구를 통해 성과를 지켜볼 필요가 있다”며 “한국바이러스기초연구소의 경우 한 지역에만 특화하여 설립하는 것 보다 두개 내지는 세 개 지역에 설립하여 유기적인 연계와 균형발전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연구자들의 자율적인 연구 환경 조성을 위해 재량근로제 확산도 고려해볼 만한 선택지다. 현재 25개 정부 출연 연구원 중 4곳에서 시행되고 있다. 재량근로제는 연구원들이 근무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시간에 연구에 집중할 수 있는 제도를 말한다.
김복철 대덕연구개발특구기관장협의회(연기협) 회장은 지난달 조승래 의원실 등 공동 주최한 ‘R&D 100조 시대 과학계 실태 진단과 활로 모색 토론회’에서 “연구소들은 연구자들의 근태관리와 같은 이유 때문에 재량근로제 도입을 꺼리는데, 과감히 도입해서 일단 연구자들의 자율권을 최대한 확보해주고 그 속에서 생기는 여러 문제점을 해결해나갈 필요가 있다”며 “4개 기관이 1년 반 정도 진행했으니 노하우가 생겼을 것이고, 같이 소통하면서 문제해결에 실마리로 잘 활용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공공 안하니 민간이 하자’는 결핍적 접근 방식 무의미
아울러 국가 R&D 자금 100조원 중 민간 투자금 규모가 75조원에 달하는만큼, 민간 분야에서 잘하는 분야는 전폭 지원할 것이 당부됐다. R&D 인력 규모만 보더라도 1970년대 기업 R&D 인력 4천명에서 2019년엔 100배 증가한 40만명으로 늘었다. 반면 공공 R&D 인력은 4천명에서 10배 증가한 4만명으로 증가했다. 대기업이 잘하는 이점을 공공부문 R&D 연구기관도 받아들여야 한며, 대기업이 안하는 분야라고 공공부문이 관여하지 않는 ‘결핍적 접근 방식’도 부적절하다는 평가가 제기된다.
이같은 장점이 돋보이는 분야로는 소재·부품·장비(소부장) 분야가 손꼽혔다.
박상욱 교수는 “반도체는 세계 선두권이니 민간 기업에 맡겨 놓으면 되고, 초격차 전략이 필요하다”면서 “한국의 특기인 과감한 연구개발 및 시설 투자가 주저되지 않도록 정책 환경이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반도체는 한국이 ‘못해서’ 일본과 분업하던 게 아니라는 점이 드러났으니, 일본과의 관계개선을 통해 분업구조를 회복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기술 국수주의는 시대착오적”이라고 비판했다.
국가 R&D 최종 목표, 사회적 문제 해결에 있어야
R&D 연구 투자가 사회적 가치로 환원되기 위해서는 기초연구뿐 아니라 R&D로 거둔 성과가 사회문제 해결에 적극 활용돼야 한다. 특히 최근 코로나19로 인해 사회 전반이 비대면으로 전환되면서 이 같은 추세를 따라가지 못하는 디지털 격차가 문제점으로 떠올랐다. 일명 '디지털 포용' 정책이 필요한 시점이다.
국무조정실이 지난 1월 발표한 지난해 정부업무평가 결과에 따르면, 정부가 공공부문 서비스를 디지털로 전환하면서 반대급부로 디지털 소외 계층을 아우르기 위한 공공서비스 공급 대책 마련이 시급해졌다.
이광석 서울과학기술대학교 IT정책전문대학원 교수는 “공적 영역에 디지털 키오스크 등 하이테크 중심의 기술 설치물을 놓아 고령자들의 디지털 장비 이용률이나 활용을 낮추거나 세대 격차를 발생하는 것은 큰 문제”라며 “좀 더 고령 세대의 기술감각에 맞춘 도시 기술 디자인이나 설계 방식을 고민해야 할 것이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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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온라인 몰입이 커져 사회적으로 온라인 체류 시간 증가 및 심리적으로 타인과의 관계 없는 고립감에서 오는 스트레스와 고독, 우울증이 강화되는 경향이 있다”면서 “넷플릭스나 유튜브 등 온라인에 머무는 시민들의 시간 관리 요령 등 정책적으로 가이드라인 제시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김성수 과기정통부 연구개발투자심의팀장은 “이전까지의 경제 발전 위주의 R&D 투자가 이제는 기후변화, 감염병, 건강화 환경, 저출산과 고령화를 위한 사회적 가치 부분으로 확대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