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SW운동의 일그러진 영웅 '리처드 스톨만'

[김익현의 미디어 읽기] 부적절한 처신과 시대에 뒤진 사상

데스크 칼럼입력 :2021/03/31 16:54    수정: 2021/04/02 11:13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 기자 페이지 구독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한 때 그는 ‘자유의 기수’였다. 소프트웨어시장에서 ‘자유(free)’를 외쳤다. 1985년 3월 ‘닥터 돕스 저널’에 발표했던 ‘그뉴(GNU) 선언’은 자유소프트웨어 헌장이었다. '공산당선언'이 영국 사회에 가한 것과 비슷한 충격을 몰고 왔다. 

그리고 몇 달 뒤 그는 ‘자유소프트웨어재단(FSF)’을 설립한다. 이후 자유소프트웨어재단은 수 많은 개발자들과 소프트웨어 애호가들의 '성지'가 됐다. AT&T, 마이크로소프트(MS)를 비롯한 거대 기업의 폭주를 비판하면서 자유의 가치를 드높였다. 

이쯤 되면 누군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리처드 스톨만. 한 때 자유소프트웨어 운동의 기수로 꼽히던 인물이다.

하버드대학 출신인 스톨만은 빌 게이츠와도 곧잘 비교됐다. 다만 하버드대학을 중퇴한 빌 게이츠와 달리 리처드 스톨만은 물리학 학사를 취득했다. 졸업 당시 우수상인 마그나 쿰 라우데를 받았다.

리처드 스톨만. [사진=미국 지디넷]

■ "스톨만은 마음만 먹으면 빌 게이츠도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둘의 행보는 많이 달랐다. 빌 게이츠는 1976년 1월 ‘컴퓨터 애호가들에게 보내는 공개 편지’를 통해 “소프트웨어는 공짜”란 인식을 강하게 비판했다. “소프트웨어를 훔치는 것은 훌륭한 소프트웨어가 개발되는 것을 막는 것이나 다름 없다”고 목청을 높였다.

반면 스톨만은 빌 게이츠와는 생각이 달랐다. 청년 시절 썼던 'GNU 선언문'은 카피레프트 운동 선언문이나 다름 없었다. 1989년 GNU GPL 소프트웨어 라이선스가 원조 역할을 한 카피레프트는 '자유롭게 가져다 쓰되, 도움을 받아서 개발한 소프트웨어는 똑 같이 공유한다'는 기본 철학을 담고 있다.

저작권(copyright)이 저작자 보호에 방점을 찍고 있는 것과 달리 '카피레프트'는 이용자 쪽에 중심축을 놓고 있는 점이 다르다. ‘카피라이트’를 주장했던 빌 게이츠가 윈도로 큰 돈을 버는 동안, 스톨만은 카피레프트 운동의 중심이 됐다.

MS 시절의 빌 게이츠(오른쪽)와 폴 앨런.

그의 이런 정신은 리눅스를 비롯한 수많은 오픈소스 소프트웨어의 사상적 터전이 됐다. 1991년 리눅스 커널을 공개하면서 저 유명한 '펭귄 혁명'의 시작을 알린 핀란드 청년 리누스 토발즈 역시 스톨만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다.

미국의 고품격 잡지 뉴요커는 2015년 'GNU 선언문' 30주년 특집 기사에서 “하려고 마음만 먹었다면 스티브 잡스, 래리 엘리슨, 빌 게이츠처럼 됐을 것”이라면서 스톨만을 높이 평가했다.

빌 게이츠가 될 수 있었지만, 자유인의 삶을 택했던 리처드 스톨만. 그는 한 때 자유소프트웨어 운동의 정신적 지주였다. 오픈소스 운동 역시 스톨만의 자유소프트웨어운동에 젖줄을 대고 있다.

하지만 요즘 스톨만 때문에 자유소프트웨어 진영이 시끄럽다. 자칫하면 스톨만 때문에 자유소프트웨어재단이 와해될 위기에 처했다.

■ 엡스타인 사태 때 불명예 퇴진…섣부른 복귀 시도하다 거센 역풍 

위기의 시작은 2019년 미국을 뒤흔든 엡스타인 사건이었다. 제프리 엡스타인은 미국에서 대규모 미성년자 성매매 혐의를 받아 구속된 인물. 그는 결국 감옥에서 사망했다.

그런데 스톨만은 한 이메일에서 "아동 성매매 혐의를 받는 용의자에게 폭행이란 용어를 함부로 사용하는 건 타당하지 않다”고 적으면서 논란거리를 제공했다. 사실상 엡스타인 옹호 발언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는 또 성인과 미성년자간 성관계를 문제로 보지 않는다고 발언한 적 있다. 특히 스톨만은 미성년자 성범죄를 저질렀다는 혐의를 받은 MIT 동료 교수를 옹호해 논란을 키웠다. 

스톨만이 옹호했던 인물은 2016년 사망한 MIT의 마빈 민스키(Marvin Minsky) 교수였다. 엡스타인 사건 피해자 중 한 명인 버지니아 주프레는 미성년이던 2001년 민스키와 강제로 성관계를 가졌다고 폭로했다.

그런데 스톨만이 동료 연구자들에게 “민스키는 잘못한 게 없다”는 취지의 주장을 펼친 정황을 담은 이메일이 공개되면서 논란에 휘말렸다. 이 이메일에서 스톨만은 '성폭행(sexual assault)'과 '강간(rape)'을 정의하면서 민스키를 옹호했다.

그러면서 "가장 설득력있는 시나리오는 피해자가 자신을 그(민스키)에게 자진해서 내준 것"이므로 '민스키와 강제로 성관계를 했다'는 주프레의 증언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엡스타인 사건이 워낙 충격적이었던 만큼, 스톨만의 이 발언은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오픈소스 및 자유소프트웨어 운동가들 사이에서 ‘스톨만 퇴출 운동’이 벌어졌다. 결국 스톨만은 그 해 9월 자신이 설립한 자유소프트웨어연맹 회장직에서 사임했다. MIT 인공지능연구소 객원과학자 등에서도 물러났다.

리처드 스톨만이 1985년 설립한 자유소프트웨어재단. 하지만 요즘 스톨만 때문에 위기에 처했다.

불명예스럽게 쫓겨났던 리처드 스톨만은 지난 주 자유소프트웨어재단 이사로 복귀하면서 또 다시 논란를 불러 일으켰다. 복귀 과정이 투명하지 못하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자유소프트웨어재단 준칙에 따르면 새로운 이사를 영입하기 위해선 이사 과반수가 찬성해야 한다. 그런데 자유소프트웨어재단 이사들이 어떤 방식으로 스톨만 복귀를 승인했는지 명확하게 공개되지 않고 있다. 성적인 문제로 논란을 일으킨 인물이 의심스러운 방식으로 이사 복귀를 단행한 셈이다. 이 처신은 자유소프트웨어재단에도 만만찮은 후폭풍을 몰고 왔다. 

하지만 스톨만의 시련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자유소프트웨어재단 내에서 스톨만의 부적절한 처신이 계속 공개됐다. 리프트의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인 폴 피셔는 “자유소프트웨어재단에서 일하는 동안 스톨만의 여성혐오, 성적 대상화, 학대 등을 목격했다”고 폭로했다.

미국 IT 전문매체 프로토콜에 따르면 수 천 명의 개발자들은 스톨만이 지도적인 위치를 다시 차지할 경우 재단과 함께 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

재정적인 타격도 불가피할 전망이다. 오픈소프트웨어 운동의 중요한 지원자인 IBM 레드햇은 오픈소프트웨어재단 지원을 끊겠다고 선언했다. 파이어폭스 브라우저를 만든 모질라 역시 스톨만 퇴진을 요구하는 공개서한을 보냈다.

■ 부적절한 처신 못지 않게 시대에 뒤진 SW 사상도 한계로 거론돼 

스톨만 복귀에 반발하는 첫번째 이유는 엡스타인 사건을 둘러싼 논란과 각종 성추문을 비롯한 부적절한 처신이다. 하지만 그가 공개 소프트웨어 운동 흐름을 제대로 따라잡지 못한 ‘흘러간 사람'이란 비판도 만만치 않다.

프로토콜에 따르면 마이크로소프트(MS)의 저명 엔지니어인 미겔 데 이카사는 트위터를 통해 “RMS(리처드 스톨만)은 (자유소프트웨어) 운동이 성장하는 동안 함께 성장하지 못했다. 오히려 프로젝트를 뒤쳐지게 만드는 브레이크(anchor)가 돼 버렸다”고 비판했다.

이카사는 그놈과 모노 프로젝트를 주도한 멕시코 출신 자유소프트웨어 프로그래머다.

스톨만의 여러 부적적한 행동은 자유소프트웨어재단의 명성에 피해를 안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자유소프트웨어 운동에 대한 스톨만의 낡은 사상도 걸림돌이 될 가능성이 많다. 어쩌면 장기적인 관점에선 이 부분이 더 치명적일 수도 있다. 

프로토콜 역시 이 부분을 지적하고 있다.

스톨만이 1980년대 중반 제기한 ‘자유소프트웨어’란 개념은 당시 개발자들에게 엄청난 감흥을 안겨줬다. 소스코드 공개를 통한 소프트웨어 발전이란 선순환을 만들어냈다. 이 사상은 MS, IBM 등 많은 기존 기업들도 일정 부분 수용하고 있다.

리눅스 창시자인 리누스 토발즈.

하지만 그 사이 기술이 발전하면서 세상이 변했다. 소프트웨어가 일상 필수품이 됐다. 이와 더불어 사람들의 생각도 달라졌다. 이제 사람들은 소프트웨어를 좀 더 통제할 수 있길 원한다. 특히 프라이버시에 대한 중요성이 대두되면서 소프트웨어에 대한 기본 개념이 많이 변화했다.

프로토콜은 “스톨만 사상의 근간이 됐던 GPL과 카피레프트는 현대 경제에서 소프트웨어가 하는 역할과 잘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어떤 소프트웨어를 수정했을 경우 반드시 같은 카피레프트로 공중에게 공개해야 한다는 것이 GPL의 기본 정신이다. 이게 현대 소프트웨어 작동 방식과는 충돌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대신 아파치 2.0을 비롯한 오픈소스 운동이 요즘 흐름과 좀 더 잘 어울린다고 프로토콜은 지적했다. 오픈소스 라이선스 정책 중 하나인 ‘아파치 2.0’에선 소프트웨어 변화를 공중에게 의무적으로 공개하도록 강요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스톨만은 이런 유연한 입장에 찬성하지 않는다. 아직도 초기의 선악구분적인 이분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프로토콜의 지적이다. 스톨만이 도덕적 엄격함에 집착하다보니 현대의 오픈소스 운동 흐름을 제대로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리처드 스톨만.

요즘 대다수 소프트웨어 이용자들은 운영체제나 상용 프로그램의 소스코드를 붙잡고 씨름하길 원치 않는다. 오히려 안정적으로 보안에 철저하냐는 점에 더 관심을 쏟는다. 그러다보니 스톨만 같은 초기 ‘자유소프트웨어 순수론자’들이 선뜻 받아들이기 힘든 제한과 한계를 요구하는 측면이 강하다.

한 때 자유소프트웨어 운동의 상징이던 리처드 스톨만. 하지만 그는 이젠 자유소프트웨어 운동의 ‘일그러진 영웅’으로 전락했다. 

일차적으론 ‘부적절한 행동과 발언’이 그 단초를 제공했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눈부시게 발전한 시대 흐름을 따라잡지 못한 것 역시 스톨만의 뼈아픈 한계로 지적되고 있다. 소프트웨어 초창기의 사상으로는 21세기 이용자들을 매료시키기 힘들기 때문이다.

한 때 그를 높이 평가했던 IT 기자로서, ‘일그러진 스톨만’을 바라보는 심정이 씁쓸하기 그지 없다.

(덧글)

닷컴 붐이 한창이던 2000년 리처드 스톨만은 한국을 방문한 적 있다. 공교롭게도 빌 게이츠도 같은 기간에 한국을 찾았다.

당시 스톨만과 빌 게이츠를 비교한 기사를 쓴 적 있다. 그 기사 말미에서 난 고급 호텔에 묵었던 빌 게이츠와 8평짜리 원룸을 선택한 스톨만을 비교하면서 이렇게 끝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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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에서 묵는 빌 게이츠와 홈스테이를 하게 될 스톨만의 색다른 모습은 현재 처한 환경과 묘한 조화를 이룬다. 그들이 한국에 와서 어떤 모습을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특급 호텔에서 묵게 될 빌 게이츠보다 8평짜리 원룸에서 민폐(?)를 끼치게 될 리처드 스톨만이 더 심정적 지지를 받지 않을까 궁금하다.” (주간조선, 2000년 6월 15일자)

21년이 지난 지금, 스톨만은 ‘추한 권력욕’ 때문에 안팎의 손가락질을 당하고 있다. 반면 빌 게이츠는 세계 최고 자선사업가로 변신했다. 인생 참, 알 수 없다.

김익현 미디어연구소장sini@zdne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