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험업계에 2020년은 그야말로 다사다난한 한 해였다. 연초부터 시작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대유행으로 대면 영업이 어려워졌고, 기준금리까지 사상 최저 수준으로 내려가면서 자금운용에 난항을 겪은 탓이다. 또 디지털 기술을 전면에 내세운 네이버와 카카오 등 빅테크 기업의 도전에 직면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업계는 양호한 실적을 바탕으로 성장세를 지켜내는 한편, 디지털과 인수합병(M&A), 제판분리(상품 제조와 판매 분리) 등 각자의 전략으로 전열을 가다듬어 내년의 새로운 흐름에 대비하고 있다.
'코로나19 반사이익'에 보험사 실적 양호
열악한 환경 속에도 보험업계가 안정적인 실적을 유지하도록 도운 것은 다름 아닌 코로나19의 확산 국면이었다. 대외활동이 뜸해지면서 손해율(보험료 수입 대비 보험금 지출 비중)이 개선되고, 대규모 자금 유입에 주식시장이 회복하면서 손해보험사와 생명보험사 모두 만족스런 성적표를 받아들었다는 평이다.
실제 금융감독원이 발표한 '보험회사 경영실적'에 따르면 보험업계는 올 3분기까지 누적 5조5천747억원의 당기순이익을 거두며 전년 동기 대비 6.1%의 성장을 일궈냈다. 손보사의 순이익은 10.2% 늘어난 2조4천232억원, 생보사는 3.2% 증가한 3조1천151억원이다.
회사별로는 DB손해보험이 작년보다 34.5% 늘어난 4천420억원의 순이익을 거뒀고, 현대해상은 3천398억원으로 38.9%, 메리츠화재는 3천236억원으로 52.1%, 삼성화재는 6천289억원으로 7.4% 각각 성장했다.
이어 한화생명은 56.3% 증가한 1천758억원, 미래에셋생명은 18.6% 상승한 1천19억원의 순이익을 기록했다. 상반기 고전했던 삼성생명도 1.9% 늘어난 9천768억원의 순이익을 남기며 반등에 성공했다.
이는 코로나19로 대면 영업이 제한된 와중에도 보험사가 수익성 높은 상품 중심의 영업 전략을 펼쳤고, 손해율 개선과 증시 회복이 이어진 데 따른 결과로 풀이된다.
일례로 주요 손보사의 11월 자동차보험 손해율(가마감)은 86.5~89.3%로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약 13%p 내려갔다. 여전히 적정 손해율(78~80%)엔 미치지 못하나, 예년보다 크게 떨어졌다는 데 업계는 의미를 두고 있다.
업황 악화에도 M&A 활발…푸르덴셜·하나손보 새 둥지
올해는 보험업계 내 M&A 열기도 뜨거웠다. 코로나19로 시장이 얼어붙은 가운데도 덩치를 키워 새로운 기회를 모색하려는 금융회사의 움직임이 두드러지면서다.
먼저 하나금융지주는 더케이손해보험을 인수해 하나손해보험(6월 출범)으로 탈바꿈시켰고, KB금융지주도 지난 8월 푸르덴셜생명을 13번째 자회사로 정식 편입했다. 이로써 하나금융은 손해보험업을 그룹 사업 포트폴리오에 추가했으며, KB금융은 기존 KB생명과의 시너지를 바탕으로 생보업계 내 영향력을 높일 수 있게 됐다.
교보생명은 2007년 프랑스 기업에 매각했던 AXA(악사)손보를 13년 만에 되찾으러 나서면서 눈길을 끌었다. 온라인 생보사 교보라이프플래닛과 협업할 디지털 손보사 설립을 추진하던 중 인수를 검토하게 됐다는 게 회사 측 전언이다. 지난 9월 예비입찰에 단독으로 뛰어든 교보생명은 현재 AXA그룹과 가격 등 매각 조건을 협의 중인데, 내년 초에는 인수 여부가 결정될 것으로 점쳐진다.
신한금융지주의 양대 생명보험사인 신한생명과 오렌지라이프도 내년 7월 ‘신한라이프’ 출범을 목표로 통합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 17일 그룹 CEO 인사를 거쳐 성대규 신한생명 사장이 초대 대표이사로 확정되고, 23일엔 합병 계약을 체결하는 등 차츰 외형을 갖춰나가는 모양새다. 합병 작업이 마무리되면 양사는 자산 70조원 규모의 업계 4위 생보사로 발돋움하게 된다.
'디지털' 중심으로 새 판…마이데이터 등 신사업 대비
보험업계의 조직개편 키워드는 ‘디지털’이었다. 코로나19를 거치며 자리 잡은 비대면 거래 트렌드와 마이데이터 등 신사업에 대응하고자 관련 역량을 강화하려는 각 보험사의 움직임이 이어졌다.
교보생명은 '디지털혁신지원실'을 'DT(디지털 전환) 지원실'로 확대해 회사 내 디지털 전환 작업을 주도하도록 했으며, '디지털신사업팀'과 '오픈이노베이션팀'엔 신사업 발굴이란 임무를 부여했다. 사용자 중심 플랫폼을 구상할 '플랫폼사업화추친TF'도 구축했다.
아울러 삼성생명은 '디지털사업부'와 '데이터전략팀'을 각각 확대·재편했으며, 삼성화재는 디지털 채널 활성화의 컨트롤 타워 역할을 맡을 '디지털본부'를 신설했다. 이들 조직을 중심으로 인공지능(AI) 등 신기술을 활용한 상품과 서비스를 확대하고 외부 제휴도 추진해 사업 영역을 넓힌다는 방침이다.
한화생명은 한 발 앞선 6월 디지털·프로젝트 중심으로 조직을 재편한 뒤, 다양한 사업 방안을 구상하고 있다. ▲기술전략실 ▲빅데이터실 ▲OI(오픈이노베이션)추진실 ▲MI(마켓 인텔리전스)실 등 부서를 전면에 내세워 인슈어테크와 빅데이터 역량 확보, 신사업 검증 등에 주력하는 중이다.
마이데이터 사업에 대응하려는 행보도 속속 감지됐다. 교보생명은 금융마이데이터파트를 새로 만들었으며, 메트라이프 역시 상반기부터 관련 TF를 가동한 데 이어 지난 22일 임시 주주총회에선 신용정보관리업을 정관상 사업목적에 추가하며 사업 태세를 갖췄다. 이들은 내년 2차 예비허가 신청을 목표로 사업 계획을 구체화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대형 보험사發 제판분리 트렌드 확산
연말엔 대형 보험사를 중심으로 상품의 제조와 판매 기능을 떼어내는 '제판분리' 트렌드가 빠르게 확산됐다.
한화생명은 이달 18일 임시 이사회에서 전속 판매채널을 물적분할해 판매 전문회사 '한화생명 금융서비스'(가칭)를 설립하기로 결정했다. 미래에셋생명도 이달 1일 제판분리를 공식화한 뒤, 내년 3월까지 전속 설계사 3천300여 명을 자회사형 GA '미래에셋금융서비스'에 이동시키기로 한 상태다.
보험업계가 제판분리를 추진하는 것은 영업 경쟁력을 높이기 위함이다. GA의 경우 생명보험부터 손해보험에 이르는 다양한 상품을 취급할 수 있는 만큼 환경 변화에 빠르게 대응할 수 있어서다. 영업 현장의 설계사도 소비자가 원하는 상품을 제시하고 높은 수당을 보장하는 GA를 선호하는 추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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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각 보험사는 전속 영업 조직을 자회사로 떼어내고 본사는 상품 개발과 자산운용에 집중함으로써 각각의 전문성을 살린다는 복안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근로자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것은 과제이나, 대형 보험사가 선제적으로 움직인 만큼 내년에도 이 같은 변화가 이어질 것으로 업계는 예상하고 있다. 이미 현대해상과 농협생명, 하나손해보험 등도 비슷한 방안을 검토하는 것으로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