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고’는 인공지능(AI) 연구자들에겐 ‘가뭄의 단비’ 같은 존재였다. AI 연구자들을 지배했던 ‘긴 겨울’을 끝내는 신호탄이었기 때문이다. 그 때 이후 AI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덩달아 투자도 크게 늘어났다.
하지만 여전히 창의적인 영역에선 AI가 인간을 대신하긴 힘들 것이란 게 일반적인 상식이었다. AI는 주어진 알고리즘 대로 움직이는 존재란 게 그 이유였다.
과연 그럴까? 바둑을 데이터로 바꿀 수 있다면, 문학작품 같은 인간의 창의적인 작품들도 마찬가지 작업이 가능한 건 아닐까?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발표됐다. 체코 과학아카데미의 페트르 플레차크는 머신러닝 기법을 활용해 ‘헨리 8세’를 셰익스피어와 동료 작가인 존 플레처가 공동 집필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데 성공해 화제가 되고 있다. (☞ 관련논문 바로 가기)
■ AI에 작품특성 학습→헨리8세 텍스트 분석 확대 적용
분석 대상이 된 ‘헨리 8세’는 셰익스피어의 후기 작품이다. 셰익스피어는 영화 같은 삶을 살았던 헨리 8세의 삶을 희곡으로 멋지게 형상화해냈다.
16세기 잉글랜드 튜더왕조 통치자였던 ‘헨리 8세’는 하녀인 앤 볼린과 결혼하기 위해 캐서린 왕비와 이혼한 것으로 유명하다. 당시 헨리 8세는 이혼을 합법화하기 위해 영국 국교를 가톨릭에서 성공회로 개종해 한바탕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세기의 로맨스 상대였던 앤 볼린과의 결혼도 순탄하진 못했다. 권력 다툼에 휘말리면서 앤도 처형당했다. 앤의 왕비 역할을 한 것은 정확하게 1000일 이었다. 이 얘기를 다룬 것이 ‘천 일의 앤’이다.
이런 얘기를 담고 있는 ‘헨리 8세’는 셰익스피어 사후엔 다른 이슈로 화제가 됐다. 1850년 문학 분석가인 존 스페딩은 작품에 사용된 문장의 특성 분석을 토대로 ‘헨리 8세’가 셰익스피어와 존 플레처의 공동 저작이라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후세 연구자들을 통해 정설로 굳어지게 됐다.
페트로 플레차크는 인공지능(AI)을 활용해 ‘헨리 8세’ 공동 저작설이 타당한지 분석했다. 이번 분석을 위해 플레차크는 AI 알고리즘에 ‘헨리 8세’와 같은 시대에 집필된 작품들을 학습시켰다. 학습에 동원된 작품은 ‘코리올레이너스’ ‘실벨린’ ‘겨울이야기’ ‘태풍’ 등이다.
마찬가지 방법으로 ‘발렌티안’ ‘토머스 씨’ 등 존 플레처의 작품 특성도 함께 학습시켰다. 학습을 끝낸 알고리즘은 본격적으로 ‘헨리 8세’ 분석 작업을 수행했다.
분석 결과는 상당히 흥미로웠다. 일단 스페딩이 처음 제기한 ‘헨리 8세’ 공동 저작설은 사실로 입증됐다. ‘헨리 8’세 전체 분량의 절반 가량은 플레처가 썼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기존 연구보다 한 발 더 나간 성과도 눈에 띈다. ‘헨리 8세’는 셰익스피어와 플레처가 각 막이나 장을 도맡아 썼다는 게 그 동안의 가설이었다.
하지만 AI 분석 결과 중간 중간 함께 저술한 부분도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를테면 3막 2장의 2081행 이후에는 두 작가가 함께 썼으며, 2200행부터는 셰익스피어가 혼자서 집필한 것으로 AI는 추론했다. 이후 4막 1장부터는 다시 저자가 바뀌는 것으로 분석됐다.
‘헨리 8세’는 셰익스피어와 존 플레처 외에 필립 매신저도 공동 저자일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도 있다. 하지만 AI는 이 가설에 대해선 “사실이 아니다”고 결론내렸다.
■ 인간과 AI의 공존, 한차원 높은 담론 필요
이번 연구는 AI가 가장 창의적인 영역으로 꼽히는 문학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하지만 단순히 그 정도 의미에 머무는 건 아니다. 창의성을 기준으로 인간과 AI의 영역을 구분하는 것이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일 수도 있다는 점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또 다른 고민거리를 던져준다. 이세돌 9단의 바둑계에서 은퇴한 중요한 이유 중 하나로 ‘알파고의 등장’을 꼽은 부분 역시 의미 심장하게 받아들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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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대부분의 창의적인 영역은 알고리즘으로 바꿀 수 있다. 그 동안은 컴퓨팅 능력과 AI 분석 기법 한계로 그 작업을 제대로 하지 못했을 따름이다. 하지만 머신러닝을 비롯한 다양한 분석 기법이 축적되면서 그 한계도 서서히 극복해나가고 있다. 셰익스피어 희곡 분석 작업은 그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그래서 ‘AI와 함께 살아가는 법’에 대한 좀 더 진지한 고민이 필요해 보인다. ‘창의적인 영역은 여전히 인간의 몫이 될 것’이란 위안은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