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북 암호화폐 '리브라'가 전 세계 화폐시장을 뒤흔들고 있다. 발행 계획 발표만으로도 전 세계 각국들이 규제 필요성을 외치고 있는 상황이다.
현 시점에선 리브라가 무사히 발행될 지 여부도 미지수다. 하지만 리브라는 그 동안 물밑에서 논의되던 '초국가기업 화폐'란 화두를 수면 위로 끌어올렸단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지디넷코리아는 초국가기업 화폐란 관점에서 페이스북 리브라가 몰고올 변화를 3회에 걸쳐 진단한다. [편집자주]
페이스북이 자체 암호화폐 '리브라' 발행 계획을 공개하면서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물론 이용자 25억명을 보유한 세계 최대 소셜 미디어가 자체 암호화폐를 발행한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파장이 예상된다.
하지만 페이스북의 암호화폐 발행에 전 세계가 주목하는 것은 단순히 그 차원을 넘어선다. 그 동안 물밑에서만 거론되던 '초국가기업(transnational corporation) 화폐'란 금기어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전통 화폐 경제 주체들 입장에선 봉인됐던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것이나 마찬가지다.
초국가기업의 대표 주자는 페이스북, 구글, 애플, 아마존 같은 초대형 기업들이다. 이들은 활동 반경이나 경제 규모 면에서 이미 개별 국가 수준을 넘어섰다. 이들은 세계지도 위에 보이지 않는 자신들 만의 영토를 그려 나가면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 어떤 강대국보다 방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초국가기업들이지만, 현실적인 한계는 어쩔 수 없었다. 가치교환이 일어나는 지점에선 항상 '국경'이란 한계에 직면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서비스 국가의 법정화폐로 지불결제를 해야 한다는 점은 규모의 경제를 극대화 하려는 초국가기업들에겐 적잖은 제약 요건이었다.
페이스북의 리브라 계획 발표 이후 미국을 비롯한 각국 정부가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이런 상황과 관련이 있다.
리브라가 '초국가기업 화폐 시대'를 여는 신호탄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더 많은 초국가기업이 '단일 통화'로 작동하는 '자치 경제 생태계'를 꿈꿀 가능성이 적지 않다. 수 십개 국가에서 수억명의 사용자를 보유한 다른 초국가기업들 역시 물밑에선 이미 페이스북과 비슷한 작업을 준비하고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런만큼 미국을 비롯한 주요 국가 입장에선 페이스북의 행보가 '전통 화폐 경제에 대한 반란'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는 상황이다.
페이스북 역시 이런 상황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을 것으로 해석된다. 이들 역시 '리브라'란 초국가기업 화폐를 발행하기 위해선 국가 권력과 적정 수준에서 타협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지난 달 열린 페이스북 리브라 관련 청문회에선 이런 정서가 강하게 배어 있었다. 당시 페이스북은 세계 금융 당국이 리브라 발행을 반대하고 있는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미국 국익에 호소하는 전략적 카드를 꺼내들었다.(☞관련기사) 노골적으로 미국 정부가 관리할 수 있는 미국 기업이 암호화폐 시대를 주도해야 미국의 안보와 국익을 보호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치고 나선 것이다.
향후 국가 권력이 초국가기업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글로벌 디지털 화폐 경제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는 상황이 연출될 수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초국가기업을 전면에 내세운 패권국의 디지털 화폐 전쟁이 벌어지면, 미리 대비하지 못한 국가는 디지털 식민지 신세가 될 수 있다.
페이스북이 무사히 리브라를 발행할 수 있을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하겠지만, 리브라가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은 분명해 보인다.
■초국가기업, 자체 암호화폐를 만들 수 밖에 없는 이유
페이스북 리브라는 디지털상에만 존재하긴 하지만, 원화나 달러처럼 독립적인 가치를 지니는 엄연한 화폐로 디자인됐다. 세계 금융 당국 입장에서 보면 '발칙한 행보'가 아닐 수 없다. 일개 기업이 주권 국가의 고유 권한인 발권력과 통화정책 결정권을 손에 쥐겠다고 나선 모양새이기 때문이다.
물론 페이스북도 사전에 이런 반대를 충분히 예상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이스북은 왜 리브라를 발행하기로 결정했을까?
전문가들은 페이스북 같은 인터넷 기반 초국가기업들에게 암호화폐는 더 없이 좋은 기회로 보였을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암호화폐는 초국가기업들이 국가 시스템 아래서 절감했던 '비효율'을 일시에 해소할 수 있는 열쇠가 될 수 있다.
블록체인 컨설팅 업체 디쿤의 장중혁 토큰이코노미스트(토큰경제전문가)는 "인터넷 기반 초국가기업들은 이미 국가시스템이 자기네 비즈니스모델(BM)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생각하는 단계까지 갔다"며 "인터넷 기반 초국가기업들은 국가단위로는 할 수 없는 초국가적 규모의 경제를 만들어 경쟁력의 원천으로 삼고 있는데 각 국가가 요구하는 시스템에 맞추려고 하니 자꾸 비효율이 발생하고 있다"고 현재 상황을 진단했다.
이런 기업들이 국가 시스템 아래서 느끼는 첫 번째 비효율은 '돈의 흐름'이다.
장 이코노미스트는 "암호화폐를 활용하면 인터넷 기업이 금융시스템을 거치지 않고 바로 지불결제 채널을 손에 넣을 수 있게 된다"며 "이렇게 되면 서비스 전달 채널과 가치 전달 채널이 일원화 되고 모든 가치의 흐름을 인터넷 기업이 움직일 수 있게 된다"고 설명했다.
인터넷 기반 초국가기업들이 해소하고 싶은 또 다른 비효율은 '사용자 데이터 수집 제한'이다.
장 이코노미스트는 "현재는 국가가 기업이 사용자 데이터를 집중시키지 못하게 제지하고 있는데 블록체인 기반 신원증명(DID)을 통하면 사실상 무제한 수집이 가능해진다"며 "개인들에게 데이터 수집 권리를 받아내면 개인과 기업 사이 사적 계약이 성립됐기 때문에 법적으로 문제 없이 개인 데이터를 끌어 모을 수 있게 된다"고 강조했다.
암호화폐 발행으로 사업 영역을 금융업까지 확장할 수 있게 된다는 점도 초국가 기업들이 암호화폐에 눈독을 들이는 이유다.
블록체인 전문회사 체인파트너스의 한중섭 리서치센터장은 "중국이 국가차원에서 밀어준 알리페이, 위챗페이를 제외하면 그동안 등장한 애플페이나 구글페이, 아마존페이 등은 성공하지 못했다"며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규제 이슈, 각 지역마다 다른 통화를 쓴다는 점, 현지 금융기관들의 견제도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진단했다.
그는 "암호화폐 등장으로 이들이 금융사업에 쉽게 진출할 수 있는 길을 트였다"며 "페이스북이 먼저 기회를 포착했고 이후 규제 문제가 어느정도 풀리고 시장이 열리면 아마존, 구글 등도 줄줄이 서비스 내놓을 거라고 본다"고 예상했다.
알리페이 운영사인 앤트파이낸셜이 종합금융 서비스를 제공하는 핀테크 기업으로 발전한 것처럼, 암호화폐 발행을 통해 금융업에 진출한 초국가기업들도 지급결제를 넘어 금융 플랫폼으로 진화할 것으로 보인다.
한 센터장은 "초기에는 QR코드로 결제하고, 친구들기리 돈을 보내고 송금하는 서비스로 시작하겠지만 데이터가 쌓이면 신용평가, 대출, 단기 투자상품도 내놓을 것이다. 결국 금융 플랫폼이 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 초국가기업 화폐 세상에 나오려면....결국 국가 권력과 결탁하는 수순 밟을 것
리브라 사례로 초국가기업이 암호화폐 발행 하려면, 결국 국가 권력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는 사실이 명확해졌다.
장중혁 토큰이코노미스트는 "리브라가 출시 여부는 기존 화폐 시스템 거버넌스, 특히 미국 달러의 이해관계와 타협할 수 있느냐에 달렸다"며 "리브라 론칭하려면 설계를 변경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란 해석을 내놨다.
그는 리브라가 채택할 수 있는 전략을 예로 들며 "기초자산을 달러 자산으로만 쌓아서 중앙은행이 발행하진 않았지만 마치 달러의 CBDC(중앙은행디지털화폐) 같은 포지션을 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페이스북은 지난 16일(현지시간) 미국 상원 은행위원회 청문회를 통해 페이스북이 미국 패권 강화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리브라를 만들 의향이 있다는 신호를 보내기도 했다.
페이스북 암호화폐 사업 자회사 칼리브라의 데이비드 마커스 최고경영자(CEO)는 청문회에 출석해 디지털 화폐 발행이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인 만큼 미국 기업이 주도권을 갖는 것이 국익에 도움된다는 논리를 펼쳤다.
마커스 CEO는 이날 "미국이 이 영역(암호화폐 기반 금융혁신)을 이끌지 않으면 다른 누군가가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효과적으로 미국의 외교 정책을 실행하거나 국가안보를 보호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며 리브라 발행의 당위성을 역설했다.
장 토큰이코노미스트는 "다른 기업도 결국은 암호화폐 발행은 국가가 허락해야 가능한 일이고 기술이나 돈 문제가 아니라 정치력에 의해 성패가 달린 문제라는 걸 알게 됐다"며 "리브라가 발행에 실패한다고 해도 이런 역할을 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초국가기업 화폐 시장, 패권 국가 간 화폐 전쟁 대리전 되나
각 국가들도 초국가기업 화폐에 대해 무조건 반대보다 전략적 대응에 나설 것으로 전망된다. 각국 법정화폐의 지위를 위협하지 않는 선에서 앞으로 전개될 글로벌 디지털 경제에서 자국의 영향력을 확보할 수 있다면, 초국가기업 화폐를 적극 이용할 것으로 보인다.
한중섭 센터장은 "디지털 경제가 앞으로 큰 축이 될 텐데 디지털 경제에서 돌아가는 화폐도 분명 필요하게 될 것"이다며 "미국 입장에서는 통제 가능한 페이스북이나 구글 같은 미국 기업이 그런 역할 해주면 고마울 것이고 중국 업체가 치고 나가는 것이 최악의 시나리오일 것이다"고 말했다.
미국, 중국 등 주요 통화국이 자국 기업들을 앞세워 디지털 경제 패권 싸움에 나서는 상황도 연출될 가능성이 높다. 한 센터장은 "디지털세계에서 화폐 경쟁이 있을 수 있다"며 "미국과 중국의 싸움이 재연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디지털 세계 화폐 경쟁이 심화된다면, 우리나라는 불리한 상황에 놓을 수 밖에 없어 보인다.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 있는 기업이 적고, 이마저도 정부 눈치를 보느라 암호화폐와 조금이라도 연관된 사업은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센터장은 "인터넷과 모바일에 이어 블록체인이라는 세 번째 빅웨이브가 왔는데 우리 기업들은 정부 눈치를 보느라 준비하고 있는 것도 숨기고 쉬쉬하고 있는 상황이다"고 지적했다. 또 "스타트업과 대기업, 정부가 합을 맞춰서 전력투구를 해도 모자른 상황인데 정부가 안 도와주니까 너무 답답하다"며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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