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는 생산성의 고도화를 지상명제로 삼는다. 그것의 핵심은 기술과 용도의 혁신이다. 이를 위해 과학기술에 관한 연구개발(R&D)에 막대한 자본을 투자하고 아이디어 발굴에 총력을 기울인다.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 멋진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상상을 현실로! 우리 인류는 너나없이 지금까지 그렇게 내달려왔다. 상상하는 것을 기필코 현실로 만드는 자가 결국은 승리자인 세상을 향해.
#대략 300살 정도 되는 자본주의는 그러나 끝없이 종말의 위기에 봉착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자본주의는 늘 어김없이 위기를 헤쳐 왔다. 이 과정에서 기술과 용도의 혁신도 중요했지만 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게 있다. 전쟁과 과소비. 자본이 지구적 위기에 봉착하면 반드시 대규모 전쟁이 일어났고, 상품이 안 팔리면 돈을 빌려줘서 소비를 지탱시켰다. 대부분의 인류를 빚쟁이로 만들며.
#인류가 만든 제국(帝國)은 필히 멸망했다. 아무리 위대한 철학도 경제체제도 정치도 군사력도 인간이 만든 한, 출발할 때 이미 한계를 내포했다. 제국이 반드시 멸망한 건 인간이 반드시 죽는 것과 한 치의 차이도 없었다. 제국이 망하기 훨씬 전부터 멸망 징후가 곳곳에서 흘러나오지만 그걸 모르는 자는 오직 제국의 지배자뿐이었다. 그들은 신(神)이고자 했으나 결코 자연을 이기지 못했다.
#소련 붕괴 이후 유일 제국(帝國)이었던 미국 주도의 세계 자본주의도 지금 위태위태하다. 세계 경제가 저성장 국면에 진입한 지 오래됐지만 트럼프 대통령 집권 앞뒤로 2~3년간 오직 미국 경제만 잘 나갔던 것은 美 제국이 체질을 완전히 개선했기 때문이 아니라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사력을 다해 태우는 불꽃일 수도 있다. 트럼프야 말로 미 제국의 본연적 가치를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 제국이 세계 각국에서 잔혹한 전쟁을 일으키면서도 세계 경제와 정치를 주도할 수 있었던 것은 달러라는 기축통화를 기반으로 세계화(혹은 신자유주의)의 기치 아래 자유무역을 극대화한 덕분이었다. 신자유주의는 미국 기업이 다수인 다국적 기업이 지구적으로 팽창하고 그와 함께 미국에게 선택된 개발도상국 경제가 동반성장하는 모형이다. 그래서 미국 주도 글로벌 개발 프로젝트다.
#미국은 특히 경제 원조나 투자가 진행되는 곳에는 대부분 군대를 동반 진출시켰다. 경제 지도자이면서 군사 지휘자이기도 했다. 한국은 이런 방식의 미국의 지도(혹은 점령) 하에 성장한 가장 바람직한 나라였다. 하지만 트럼프가 주도하고 있는 미 제국은 이제 그 길을 버리고 있는 듯하다. 극도의 보호주의 정책을 펼치면서 중국뿐만이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들과의 무역 분쟁을 일삼고 있다.
#1990년대 초 미국으로부터 서방 세계는 물론이고 옛 동구권까지 수출된 신자유주의 체제가 그 미국으로부터 거부되고 있다. 왜? 트럼프가 보기에 이 체제는 미국한테 ‘미친 구조’인 탓이다. 이 체제 속에서 미국은 막대한 무역적자를 벗어날 수 없다. 미국 경제가 아무리 막강해도 끝없이 손해 보며 세계 각국의 경제를 지탱할 수는 없다. 미국은 한도 끝도 없이 퍼낼 수 있는 ‘화수분’이 아니다.
#트럼프는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그는 세계 대통령이기 전에 돈에 밝은 사업가이기 때문이다. 오바마와 같은 여타의 미국 대통령들이 세계 대통령으로서의 역할을 하려 했다면 타고난 장사꾼인 트럼프는 그 허울을 벗어던져야 미국이 산다고 주장하며 대통령이 된 사람이다. 미국이 왜 착해야 하는가. 그의 질문은 이것이다. 깡패가 되는 게 미국에 더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곧 트럼프이다.
#시가 총액 1천조 원을 돌파하며 세계 1위로 기세등등했던 애플이 최근에만 400조 원을 날린 까닭은 이 회사의 혁신이 한계에 봉착한 측면도 없지 않지만 트럼프의 압박 탓도 크다. 과거 미국 대통령들은 지구적 거대 기업의 이익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다면 트럼프는 미국 내에서 고용하고 돈 버는 기업이 최고인 것이다. 그는 다른 대통령과 달리 지구적 거대 기업에 빚진 바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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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대통령들은 대개 지구적 거대 기업과 한 배를 탔었다. 지구적 거대 기업이 다소 미국에 이익을 덜 가져오더라도 세계에 신자유주의를 더 확산시킨다면 그것이 미국 유일 제국체제를 더 강화시킬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경제가 어려워지면? 비장의 무기가 있다. 어느 지역에서든 큰 전쟁을 촉발시키거나, 달러를 거의 무제한으로 찍어 뿌려대면 웬만한 위기는 수습할 수 있다는.
#트럼프는 정대반의 길로 간다. 고용이 부진한 자국내 지구적 거대 기업을 압박하고, 중국 등 각국과 무역 분쟁을 일삼으며, 세계 경찰도 포기하고 있다. 오래되고 확실하며 절대 질 것 같지 않던 신자유주의 체제가 미국으로부터 종말을 고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경제를 보며 안타까운 게 바로 이 점이다. 정부든 여당이든 야당이든 경제계든 온통 앵무새처럼 죽어가는 신자유주의만 외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