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유령’이 지금 대한민국을 떠돌고 있다. 김병준 자유한국당 비상대책위원장은 이중 하나의 유령을 ‘악마’라 표현했다. 문재인 정부 경제정책인 ‘J노믹스’의 세 개 축 가운데 하나인 소득주도성장을 겨냥한 말이다. 또 하나의 유령은 문재인 정부에서 비토 되고 있는 '토큰 경제'다. 정부는 이를 ‘도박’으로 여긴다. 유령은 아직 그림일 뿐이고 실체가 허약한 까닭에 악마와 도박으로 치부된다.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고전 ‘공산당선언’을 처음 출간한 건 1848년이다.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그 책 첫 줄은 이렇게 시작한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끝은 이렇게 맺는다. 그런데 그들은 왜 공산주의를 유령이라고 표현했을까. 극단으로 치닫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과학적으로 추적하고 그 해법으로 찾아내 지향하던 세계가 그것 아닌가.
#유령은 이름만 있고 실제가 없는 거다. 그렇다면 그들은 공산주의가 실재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까. 아니다. 만약 그렇게 생각했다면 마지막 문장은 불필요했다. 그들은 죽어서야 도달할 수 있는 천국을 추구했던 종교인이 아니다. 현실 세계를 연구했던 과학자다. 유령의 의미는 그래서 달리 해석되어야 한다.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시간이 흐르면 반드시 나타날 수밖에 없는 인간의 거대한 구상.’
#인간의 구상(構想), 특히 거대한 구상은, 그러나, 의도가 순수해도 과정과 결과가 모두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어쩌면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인간의 뜻이 클수록 그 결과가 참담한 경우는 인류 역사에서 부지기로 목격된다. 그 사례는 너무나 많아 나열할 필요도 없다. 큰 뜻이 되레 다른 인간을 대량으로 죽이기도 했다. 과거의 일만도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 위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노장(老莊)이 공맹(孔孟)을 조롱한 이유가 거기 있다. 공자와 맹자는 철학자였지만 정치가이기도 했다. 예(禮)와 인(仁)으로 왕도정치(王道政治)를 구현하려고 했다. 노장은 그런 생각이 모두 헛소리라 여겼다. 듣기에 그럴 듯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해결되는 건 없고 도리어 세상을 혼돈과 폭력으로 끌어갈 것으로 봤다. 노장 생각은 맞았다. 그 기나긴 예(禮)와 인(仁)으로도 세상은 끝내 난장판이다.
#하지만 꼭 노장은 옳고 공맹은 그른 게 아니다. 부처만 옳고 마르크스는 틀렸다고 말하기 어려운 것과 같다. 다만 마르크스와 공맹의 생각도 인간의 구상이고 노장과 부처도 인간의 구상일 뿐이라는 점을 말하고 싶다. 또 구상의 범주와 층위가 다르다는 걸 덧붙이고 싶다. 많은 구분이 가능하지만, 그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개인적 구도가 먼저냐 사회 구조의 혁신이 먼저냐에 대한 질문과 답이다.
#이 둘을 헷갈리는 순간 세상의 모든 논의는 길을 잃는다. J노믹스와 토큰경제는 마르크스나 공맹의 영역이지 노장이나 부처 혹은 예수의 영역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다. 그 점에서 김병준 위원장이 J노믹스를 ‘악마의 유혹’이란 비판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교수이고 그러므로 사회과학자일 그가 정치 경제 사회의 영역을 종교의 영역을 치환해버렸기 때문이다. 대중에겐 그게 편할 수 있다.
#정략적 입장을 이해 못할 바도 없다. 그게 잘 싸우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얕은 수다. 역사적 관점보다 당장의 승리를 노린 것이다. 경제가 이 지경이 된 데는 많은 이유가 있을텐데 대통령 하나 바꾸어서 불과 1년 만에 그렇게 됐다고 말하는 사람은 사회과학자가 아니다. 명백한 근거를 제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그 근거가 실제로 존재한다면 세상은 너무 쉽고 누구나 박사가 될 것이다.
#얼마나 쉬운가. 최저임금 상향이 문제니 그냥 없던 일로 하면 다 해결되는 것 아닌가.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대통령을 뽑은 게 문제니 그냥 탄핵하면 되는 게 아닌가. 그렇다면 대선 때 후보들 대부분 그런 공약을 했고 그중 그 공약을 가장 잘 지킬 것으로 생각해 뽑은 국민은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 모두 스스로 탄핵할까. 아니면 그 수준밖에 안 되니 모두 머리 깎고 절로 가 수도라도 할까.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발언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대통령과 청와대 그리고 정무직 관료들도 마찬가지다. 과연 J노믹스는 만병통치약이어서 수십 년 관행 때문에 만성질환에 시달리는 한국 경제를 불과 1년 만에 혹은 문 대통령 재임기간에 해결할 묘책인가. 인구감소와 일자리 부족과 빈부격차가 그렇게 뚝딱 해결될 일이던가. 몇 가지 정책으로 ‘부동산 불패 신화’를 잠재울 수 있단 건가.
#국정 농단에 분노해 든 촛불도 혁명이지만,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급속히 발전하는 과학기술이 미치는 영향도 혁명전야에 준하는 거다. 4차 산업혁명. 그 길은 지금 누구도 가보지 않았고, 그래서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표현한 대로 유령처럼 우리 사회를 배회하고 있다. 소득주도 혁신성장 공정경제의 3축은 이에 대한 효과적인 대비일 수 있다. 문제는 그 과정이 뒤틀릴 수 있고 오래 걸린다는 거다.
#우물에 숭늉이 있을 리 없다. 샘에서 물을 길어 구수한 숭늉을 만들기까지는 이해찬 대표의 주장처럼 적어도 20년이 걸릴 지도 모른다. 대통령과 청와대는 그걸 인정해야 한다. 당장의 성과에 매몰돼 이러저러한 논평에 휘둘리는 게 아니라 자신들은 대한민국을 새롭게 창조하기 위한 험난한 과정의 주춧돌일 뿐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젊은이가 짝 찾고 결혼해 아이를 낳는 세상은 돼야지 않겠나.
#그 길을 제발 쉽게 생각하지 말자. 누구도 뚝딱 해결할 수 없는 일이다. 겸해서 당정청에 부탁이 하나 있다. 그 길에 ‘토큰 경제’가 원군이 될 수 있다는 걸 생각해보시라. 본인이 보지 못한다고 다가올 미래가 오지 않는 건 아니다. 그 미래를 보는 사람은 많다. 도박과 사기라고 폄하해도 올 것은 기어코 온다. 그렇다면 그 눈을 빌려야 한다. ‘토큰 경제’는 지방자치에 비견될 ‘사이버 지방 자치’일 수도 있다. 독점과 집중으로 인한 ‘헬 조선’ 문제를 푸는 해법으로 제기되고 있는 아이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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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노믹스가 ‘고용도 없고 성장도 한계에 부닥친 한국 경제’에 대한 해법으로서의 ‘거대한 구상’이었다면, 토큰 경제는 아마존이나 구글의 사례에서 보듯 IT와 과학기술이 발전할수록 특정 기업과 산업에 쏠리는 독점 현상을 타개하기 위한, 그리고 그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한 기업 혁신가들의 ‘거대한 구상’이라는 걸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구상(構想)이 없다면 혁신도 없다는 걸 알았으면 한다.
#ICO를 거부하는 당정청 관계자는 네이버의 라인이 ICO를 피해 암호화폐를 만들어야 했던 이유를 깊이 들어봤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