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는 못 하고 투기만 판치는 나라

[이균성 칼럼] 헬조선 투기공화국

데스크 칼럼입력 :2018/08/29 10:29    수정: 2018/11/16 11:15

여기 환자 한 명이 있습니다. 얼굴은 누렇게 떴고 손발은 차갑습니다. 기침도 자주하고 밤에 잠도 잘 못잡니다. 허리가 결린다고도 하고 머리가 쑤신다고도 합니다. 가슴이 답답하다고 할 때도 있습니다. 병원에 여러 차례 들렀는데 의사들도 모두 합의할 만한 정확한 이유를 알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적당히 처방하고 약간의 약을 줄 뿐입니다. 그리고 한마디 합니다. “푹 쉬시고 운동 좀 하세요.”

골병이 그런 거 아닌가 싶습니다. 몸도 정신도 세파에 오래 시달려 속으로 썩었으되 원인이 하나가 아니어서 마땅한 처방이 없는 병 말입니다. 이 약 저 약 먹어보고 이 주사 저 주사 맞아 봐도 헛일입니다. 어쩔 때는 약 먹으면 되레 더 아픕니다. 그럴 땐 세상 의사 모두가 돌팔이 같아 보이기도 하지요. 체질을 바꾸는 것 말고는 대책이 없습니다. 정성스레 보양하고 운동하는 수밖에 없겠지요.

한국 경제가 그런 것 같습니다. 이 환자처럼 안 아픈 데가 없습니다. 경쟁력이 약해지는 기업이 늘고 있습니다. 일자리는 늘지 않습니다. 노동인구는 줄어드는데 일자리는 부족합니다. 빈부격차도 더 커지고 있습니다. 돈은 돌지 않고 자꾸 있는 곳으로만 몰립니다. 정부가 이런저런 대책을 내놓지만 비웃음만 살 지경입니다. 뭐라 비판하고 떠드는 사람은 많은데 그 또한 대책이라 할 수는 없고요.

3.3평방미터당 1억원 넘는 시세를 보인 서울 반포동 아크로리버파크 전경(사진=뉴스1)

가장 위험한 곳은 부동산 같아 보입니다. 기업이든 자영업자든 임금생활자든 다 죽겠다고 난리인데 서울과 그 인근 부동산만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습니다. 경제가 어렵고 경기는 식어 가는데 딱 한 곳만 불덩이처럼 뜨겁습니다. “빚내서 집사라”는 정부든 집값 잡으려고 사활을 건 정부든 가리지 않습니다. ‘부동산 불패’는 거의 신화나 전설의 수준입니다. 마침내 평당 1억 원 고지를 넘어섰다지요.

돈이라는 돈은 다 부동산으로만 몰리는 모양입니다. 집을 사려고 가계 대출은 계속되고 그 탓에 가계 부채는 눈덩이처럼 늘어납니다. 가계 여유 자금이 은행이라는 저수지에 모인 뒤 일자리를 만드는 기업으로 흘러가 부가가치를 창출해야 하는데 이 경제 선순환 고리가 깨진 것 같습니다. 돈은 넘쳐나지만 그 돈이 부가가치를 늘리는데 쓰이지 않습니다. 지금은 투자보다 투기가 현명해 보일 정도죠.

팔과 다리 근육은 노쇠한데 배만 툭 튀어나온 병약한 몸을 보는 것 같습니다. 경제가 어려운데 부동산 값만 오른다는 게 정상일 리는 없지요. 거품일 수 있고 그게 터질 때 심각한 혼란은 불가피하구요. 부동산 가격이 경제 규모에 맞지 않으면 대부분의 삶은 피곤할 수밖에 없습니다. 상대적 박탈감도 심각해지구요. 여기를 ‘헬조선’이라 자조하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부동산일 겁니다.

나라 전체로 볼 때 중요한 건 자산 가치의 이상 급등이 아니라 개개인의 소득을 늘리는 일입니다. 그걸 소득주도성장이라 하든 뭐라 하든 말이지요. 문제는 그 방법입니다. 다양한 이론이 있겠지만, 분명한 건 돈이 부동산이 아니라 일자리를 창출하는 곳으로 돌아야 합니다. 바로 기업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돈을 투자할 만한 기업이 적고 투자할 만한 곳은 외부 돈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망할 기업에 투자할 수는 없는 일이고 돈이 넘쳐나는 기업에 돈 쓰라고 요구할 수도 없는 거지요. 그 미스매치를 푸는 게 지금 우리 모두 고민해야 할 지점입니다. 정부는 혁신성장과 공정경제라는 화두로 이 문제에 접근합니다. 방법은 마땅해 보입니다. 돈이 흘러가야 할 산업과 기업을 찾는 게 혁신성장이고, 기득권의 횡포로 망가진 생태계를 잘 복원하는 게 공정경제의 정책적 취지일 테니까요.

문제는 이게 러시아혁명 못지않게 어려운 일이라는 겁니다. 그 혁명은 피해 받는 한 쪽을 규합해 착취하는 다른 쪽을 치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 혁명은 갈등하는 모든 존재가 한 테이블에 앉아 공생의 방법을 찾고 거기에 합의해야 하는 ‘4차산업혁명’입니다. 소득주도·혁신성장·공정경제는, 어쩌면 시효가 끝났을 뿐더러 행복하지도 않은 ‘정글 경제’에 대한, ‘한국식 4차산업혁명’ 방법론이지요.

당연히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이고 이제 막 첫발을 뗐을 뿐입니다. 불안하고 두려울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가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것 말고 지금까지는 ‘헬조선’을 극복할 다른 대안이 제시된 게 없는 상황에서요. ‘헬조선’은 우리에게 골병 든 몸의 체질을 개선하라는 혁명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핏대 올리며 총칼 들고 싸우는 과거의 정치혁명이 아니라 숙의하는 경제혁명을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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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하나만 들어볼까요. 택시노조가 카풀 금지법을 통과시키지 않으면 대규모 시위를 한다고 합니다. 택시노조 어려움을 모르는 바 아닙니다. 그러나 4차산업혁명 시대에 과연 카풀 사업을 막아야 할까요. 그것도 답은 아닌 게 분명하죠. 같이 살 길을 찾고 합의해야 합니다. 이런 갈등이 사회 곳곳에 널려 있습니다. 기술의 급격한 발전을 기존의 체제와 문화가 더는 수용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거죠.

그 돌파구를 찾아야 우리 경제사회 구조의 체질이 바뀔 수 있습니다. 그 길을 제시하고 소통과 합의를 통해 리드할 수 있는 인재가 절실합니다. 기술에 밝으면서 정치 경제 사회에도 능통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지금 정부에 아쉬운 게 그 점입니다. 소득주도와 공정경제까지 폭넓게 이해할 수 있는 혁신성장의 리더가 잘 안 보입니다. 그게 J노믹스가 공격당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포인트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