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를 떠나는 친구와 대화를 나누었다. 인턴으로 입사해서 정식 직원이 된지 1년이 되지 않은 친구였다. 대학원에 들어가서 러시아어 번역을 공부하기로 했단다. 비즈니스에 대해 제대로 배워나가고 있는 중인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떠나는 마당에 진솔한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한 이 친구는 데이터사이언스 팀에서 일하고 싶었다. 하지만 클라이언트를 상대하는 부서에 배치를 받았고, 잡다한 보고서와 SQL 구문을 작성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 보람을 느끼지 못했고, 자기가 기여하는 부분에 대해 공정한 평가를 받는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내가 물었다. "매일 아침 출근할 때, 자기가 그 날 할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어요?"
눈이 커다란 어린 아가씨는 고개를 저으면서 "No, not at all"이라고 대답했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내 부서 사람은 아니지만 미안한 마음이 크게 일었다.
개발자로서 살다보면 이직을 결심하는 순간이 있다. 나는 미국에서 지낸 18년 동안 6개의 회사를 경험했으니 평균 재직 기간이 3년이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데, 이직은 그 자체로 좋거나 나쁜 가치평가의 대상이 아니다. 필요하면 하고 필요없으면 안해도 좋다. 다만 개발자로서 이직을 고려할 때 기억해야 하는 윤리가 있다.
■바꾸려는 노력
이직의 80%는 자기가 다니는 회사에 마음에 들지 않는 무엇이 있을 때 생각하게 된다. 더 좋은 조건으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오는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이직의 동력은 대부분 부정적 인식에서 출발한다. 상사와의 관계가 나쁘거나, 제자리 걸음인 연봉과 직책이 불만이거나, 낡은 기술만 고집하는 프로젝트에서 벗어나고 싶거나, 회사의 미래가 어둡거나, 이런 부정적인 요소가 이직을 생각하게 만든다.
그럴 때 개발자는 스스로에게 던져야 하는 질문이 있다. 내가 지금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했는가. 만약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없다"라면, 이직 생각은 잠시 접어두는게 좋다. 자기가 서 있는 자리에서 현실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순서이기 때문이다. 노력을 다하지 않고 이직하는건 현실도피이며, 그건 습관이 된다. 처음 한 두 번은 회사를 잘 옮겨다니는 것처럼 보여도, 어느 순간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갈등과 고민의 종류가 다양하기 때문에 일일이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진심을 다해서 답을 구하면 의외로 쉽게 답이 찾아진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회사에서 자기 속내를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 한다. 그럴 필요가 없다. 속내를 감추는 커뮤니케이션은 오해와 불신을 키운다. 하지만 진심을 담은 커뮤니케이션은 문제를 해소한다. 서로 미워하고 사이가 나쁜 사람이라도, 내가 먼저 마음을 열고 진심을 드러내면 마음의 빗장이 눈녹듯 사라진다. 대화에 진심을 담는 것, 그게 능력이다.
데이터사이언스 팀에서 일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누구에게 말했냐고 물으니, 이 친구는 그런 적이 없다고 대답했다. 그럼 자기가 그 팀에서 일하고 싶어하는 걸 다른 사람이 어떻게 알 수 있겠냐고 묻자, 우물쭈물하던 아가씨는 자기가 대학에서 수학을 공부하지 않았느냐고 대답했다. 이미 늦었으니 어쩔 수 없지만, 나는 그 친구에게 데이터사이언스 팀에서 일하지 못한 것, 자기가 원하는 곳에서 일하지 못한 책임은 그녀 자신에게 있다고 말했다.
■긍정의 힘으로
노력을 기울였지만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다. 이직을 고려해야 한다. 집에서 이력서도 새로 꾸미고, 리크루터도 만나고 하며 이직 계획을 구체화 한다. 이 상황에 이르면 몸은 여전히 같은 직장을 다니지만 마음은 그 곳을 훨훨 떠나간다. 밉상이던 사람이 이상한 말을 해도 거슬리지 않고, 상사가 싫은 소리를 해도 마음이 무겁지 않다.
마음이 떠나면 생각이 가벼워지기 때문이다. 내가 이력서를 제출했거나 면접을 보는 회사가 지금 다니는 회사보다 훨씬 좋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콧노래가 나올 지경이다. 심리가 이런 상태에 접어들었을때 저지르기 쉬운 실수는 새로 옮겨갈 직장을 '부정의 힘'에 기대서 선택하는 것이다. 지금 다니는 회사와 비슷한 조건을 (혹은 조금 나은 조건을) 제시하는 회사가 나타나면, 물불 가리지 않고 제안을 받아들인다. 영화 곡성 식으로 말하자면 미끼를 덥썩 무는 것이다.
이 회사는 지금 회사와 달리 OOO이라는 문제가 없겠지.
이직을 결정하는 핵심 동력이 이런 식이면 곤란하다. 이건 또 다른 문제, 아마도 더 큰 문제를 향해 걸어가는 위험한 행동이다. 이직을 결심하는, 어떤 새로운 회사를 가기로 결정하는 동력은 반드시 "이 회사는 OOO이라는 장점이 있으니까"가 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OOO은 높은 연봉, 회사의 브랜드, 매력적인 프로젝트, 편리한 출퇴근, 마음에 쏙드는 팀원들, 그 무엇이라도 될 수 있다.
회사는 긍정의 힘에 근거해서 옮겨야 한다. 하루빨리 떠나고 싶은 마음에 사로잡혀서 잡 마켓(job market)에 나오자마자 처음으로 오퍼를 주는 회사를 선택하는 것은 금기다. 자기를 움직이는 긍정의 힘을 가진 회사를 만날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려야 한다. 그래야 후회를 되풀이하지 않는다.
■끝까지 최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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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직이 결정되면, 현재 다니는 회사의 프로젝트에 대해 불성실해지는 사람이 있다. 회사 사람들도 멋대로 대하기 시작한다. 최악이다. 그 사람들을 다시 만날지 모르니까 끝까지 최선을 다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건 프로페셔널리즘, 직업윤리에 관한 문제다. 이제 난 다른 곳으로 가니까 지금까지 내게 불편하게 굴었던 사람들에게 복수해야지. 이런 유치한 생각을 하는 사람은 프로가 아니다. 이런 유치함과 불성실함은 단 한 번으로도 습관이 된다. 그 사람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속성이 된다. 이런 사람은 어디에서도 책임감을 느끼지 못한다. 쓸모없는 개발자가 되는 것이다. 진짜 개발자는 어떤 상황, 어떤 장소, 어떤 시간에서도 최선을 다한다. 반상무인(盤上無人)이다. 과정 자체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자기가 있는 장소, 그 자리에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진심을 다해 기울일 것. 자기가 있는 곳이 싫어서가 아니라, 새로 갈 곳이 놓치기 힘든 장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직을 결심할 것.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 하던 일을 마무리할 것. 이렇게 세 가지는 개발자가 이직을 생각할 때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윤리다. 이직의 자격이다.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