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판 ‘잊힐 권리’ 졸속 처리 '논란'

“서비스 안 보고 법만 들여다 본 결과”

방송/통신입력 :2016/05/11 14:03    수정: 2016/05/11 14:33

정부가 사업자들과의 조율을 거쳐 한국판 ‘잊힐 권리’를 6월 시행한다고 공표했지만 ‘졸속 행정’이란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사업자들을 대상으로 한 정책 설명회에서 정부가 미처 생각지 못한 문제점이 드러나는가 하면, 해외 사업자 참여 실태도 부실해 우려돼온 역차별 논란의 불씨를 키웠기 때문이다.

방송통신위원회는 지난 10일 인터넷 사업자들을 대상으로 한국판 잊힐 권리로 불리는 ‘인터넷 자기게시물 접근배제요청권 가이드라인’(이하 접근배제 가이드라인) 정책 설명회를 열었다.

■‘시작은 유럽식, 결과는 한국식’에 비판

접근배제 가이드라인은 회원탈퇴 등으로 통제권이 상실된 본인 게시물에 한정해서만 검색을 차단할 수 있는 기능을 갖고 있다.

사망자의 게시물일 경우 미리 권한을 위임 받은 자가 검색 차단을 요구할 수 있는데 이 부분은 세계 최초로 도입하는 사례다.

유럽에서 촉발된 잊힐 권리는 제3자의 게시물을 검색 차단시키는 것이 목적이지만, 국내에서는 그 범위가 ‘본인이 올린 글’로 축소됐다. 그 정도라면 현재의 법제도 아래에서도 정보통신망법이나 저작권법, 언론중재법 등으로 대부분 해결이 가능하다는 게 전문가들 판단이다.

이에 업계는 방통위가 1년 반 넘게 논의하고 연구한 끝에 세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본인 글 차단’을 유럽식 잊힐 권리의 대안으로 내놨다는 비판을 쏟아내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예산을 들여 전담팀까지 꾸리고 1년 반 연구한 결과가 너무나 초라한 수준”이라면서 “대통령에게까지 보고는 했고, 뭐라도 결과물을 내놓아야 하다 보니 억지로 짜인 결과물 아니겠냐”고 의문을 제기했다.

■방통위-사업자 불협화음 여전

포털 로고 네이버 다음 네이트 구글

더 큰 문제는 방통위와 사업자 간의 계속되는 엇박자다.

방통위는 국내 사업자를 비롯해 해외 사업자와도 논의했고 이견을 좁혀 접근배제 가이드라인 시행에 뜻을 모았다는 입장이나, 사업자들은 여전히 6월 시행 자체에 무리가 따른다는 주장이다. 각 서비스별로 시스템을 갖추고 내부 정책을 세우는 데 물리적인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것.

카카오 관계자는 “최대한 6월 시행을 위해 노력하겠지만 무리가 있어 모든 부분을 전체 서비스에 바로 적용하기는 힘들 것 같다”면서 “결국 순차적으로 적용이 이뤄질 것 같다”고 말했다.

특히 해외 사업자의 참여도 현재까지 구글이나 페이스북 정도가 일부분 협조할 뜻을 내비쳤으나, 트위터는 아예 논의 대상에서 빠져 있던 것으로 확인돼 역차별 논란도 일고 있다.

또 구글의 경우 망자에 대한 대리인의 검색 차단 요청을 받아줄지, 구글이 서비스 하는 전체 서비스에 접근배제 가이드라인을 적용할지에 대해 명확히 답하지 않고 있다.

방통위 가이드라인을 존중하고 전체적으로 따른다면서도 세부 사안별로 시행 여부를 물으면 입을 닫고 있다.

그 동안 방통위는 국내에서 한국어 서비스를 진행 중인 상당수 해외 사업자와도 논의와 협의를 진행해 구글, 페이스북, 트위터의 참여가 당연시 돼 왔지만 실상은 달랐다.

한 인터넷 업체 관계자는 “트위터가 빠졌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며 “이번에도 국내 사업자들만 역차별 받게 되지 않을까 우려스럽다”고 토로했다.

■방통위, 정책 설명회 자리서도 ‘우왕좌왕’

정책 설명회에 참석한 방통위 최윤정 과장

방통위의 접근배제 가이드라인의 허점은 10일 열린 정책 설명회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방통위는 접근배제 신청을 통해 들어온 이용자 개인정보의 보관 기간을 사업자 판단에 맡겼다. 목적 달성(접근배제 조치) 후 이의 신청까지 고려해 사업자들이 알아서 폐기하라는 것.

지우고자 하는 게시물이 본인의 글임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세세한 개인정보가 제시될 수밖에 없다. 특히 망자의 경우 가족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가족관계증명서 등도 제출해야 한다. 그럼에도 방통위는 해당 정보에 대한 폐기를 사업자 자율에 맡기겠다는 입장이다.

나아가 사업자, 서비스 별 형평성 문제도 노출됐다.

방통위는 네이버 지식인에 대해 "질문자의 뜻을 존중해 접근배제 요청을 들어줘야 한다"면서도 쇼핑몰 상품평의 경우 "포인트 등 대가가 지급됐다면 게시자 요청을 들어줄 필요 없다"고 답했다. 그러자 네이버는 "지식인도 답변자에게 레벨업과 같은 대가가 주어진다"며 형평성 문제를 꼬집었다.

이에 방통위측은 “사실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부분”이라며 “두 경우가 동일한 사안으로 볼 수 있는지 좀 더 검토해보겠다”고 했다. 이는 방통위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가이드라인 맹점이 상당수 존재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방통위 “일단 고” vs 사업자 “일단 스톱”

개인정보보호 보관 기간, 시행 시점, 서비스별 적용 가능성 여부, 해외 사업자와의 역차별, 추후 행정지도 및 법제화 가능성 등 여러 가지 우려와 논란이 있음에도 방통위는 일단 6월 시행을 고집하고 있다.

반면 인터넷 업계는 굳이 유럽식 잊힐 권리와 무관한 접근배제 가이드라인을 시행해서 어떤 실효성을 거두려는지 모르겠다는 입장으로 맞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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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하라니 어쩔 수 없이 하지만 예측하기 힘든 리스크를 떠안아야 한다는 부담감이 생각보다 크다는 주장이다.

성균관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송명빈 겸임교수는 “정부가 각 서비스를 들여다보지 않고 법만 들여다 본 탓에 계속 문제점들이 드러나는 것”이라며 “가이드라인 자체는 인터넷 게시물에 대한 자기 통제권 강화 측면에서 바람직하고 좋은 시도지만, 시행 절차와 방법에 있어서는 부실한 면이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