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폭진공관 기능을 재발견한 청년
1912년 뉴욕 용커스 워버튼가 1032번지 다락방. 청년 암스트롱(Edwin Howard Armstrong, 1890~1954)은 겨울내내 자기가 '되먹임 회로'라고 이름붙인 장치를 개선하는 작업에 매달리고 있었다.
1912년 9월22일. 마침내 스물두살의 컬럼비아대 전기공학과생 암스트롱은 자신이 발견한 새로운 회로의 시험준비를 끝마쳤다. 청년은 안테나에 코일전선 두 개를 추가해 기능을 강화시켜 놓았다. 전류가 흐르고 오디온을 통해서 피드백되자 헤드폰에서 이전의 그 어떤 경우보다 크고 또렷한 모스부호 소리가 울려나왔다.
전력이 일정 수위 이상으로 되자 피드백 환상회로에서 이상한 쉿쉿 소리가 나왔다.
그래 이거야. 오디오(Audion) 금속판에서 라디오헤드폰으로 흘러가는 출력 전류를 거꾸로 피드백 시키면 필라멘트에서 금속판(플레이트)으로 가는 전류가 높아지지. 그러면 전류가 저절로 증폭되는 거야. 전파 송신까지 가능해.
그는 드 포리스트가 발명한 유리진공관 오디온(1906) 속 필라멘트와 금속판 사이에 흐르는 전류를 수백번이나 측정하면서 실험한 결과 이같은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오디온 발명자 리 드 포리스트가 검파와 증폭기능을 하는 오디온과 트라이오드(3극 증폭진공관)을 발표했지만 그는 작동원리를 잘 알지 못했다. 그는 그때까지 자신의 부품을 실질적으로 그 어디에도 적용시키지도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암스트롱은 포리스트의 오디온을 갖고 지속적으로 연구와 실험에 몰두했다. 그 결과 오디온,트라이오 진공관이 라디오수신기는 물론 스파크갭 전송기를 뛰어넘는 송신기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개발 초기의 포리스트 증폭기는 정말로 약한 라디오수신용 증폭기였지만 재생회로를 통해 이어폰없이 인간의 귀로 들을 수 있는 수준까지 증폭시킬 수 있음도 확인됐다.
리 드 포리스트의 오디온 진공관이 개발된 지 7년이나 됐다. 하지만 아무도 이것으로 뭔가 엄청난 것을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암스트롱이 발견한 것은 일부 증폭기 출력을 되먹임(feedback)함으로써 포리스트의 3극증폭진공관(트라이오드)의 증폭값이 엄청나게 커진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오디온 진공관이 자체 증폭은 물론 진공관 무선수신기기가 강력한 무선송신기도 된다는 사실까지 발견했다. 그는 이 장치로 미국에서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보내는 무선신호까지도 들을 수 있엇다. 그러나 그에게는 특허를 신청할 만한 돈이 없었다.
대학을 마치고 오너라. 그 때 도와줄 테니.
암스트롱의 아버지는 학업이 우선이라며 그의 발명을 보고도 학업부터 마칠 것을 요구했다. 결국 그는 되먹임 회로의 발명을 비밀로 할 수 밖에 없었다. 이듬 해 그는 컬럼비아대학 전기공학과를 졸업했다.
암스트롱은 약속대로 아버지로부터 돈을 빌렸고 그 해 10월 되먹임 수신회로 특허를 신청할 수 있었다. 12월에는 되먹임 송신기로 다른 특허도 신청했다.
세상에 되먹임회로를 소개할 준비를 마친 암스트롱은 오디온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자세하게 설명하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는 드 포리스트조차도 모르는 사실이었다. 무선기술자 연구소(IRE,현IEEE)와 미국무선클럽에서 설명회를 열었다.
그는 진공관과 전선을 상자속에 넣어 절대로 공개하지 않았으므로 아무도 회로장치를 베끼거나 복제할 수 없었다.
1913년 어느 날 저녁. 암스트롱의 설명회에 참석했던 호기심 강한 리 드 포리스트는 암스트롱이 보이지 않게 숨겨둔 장치를 실험해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포리스트는 그처럼 젊은 친구가 자신의 진공관을 자신보다도 더 잘 사용한다는 데 대해 격노했다.
그는 즉각 자신의 연구소로 가서 재생회로 기술을 시험해 봤다. 그리고는 재빨리 변형기술의 특허를 냈다. 1920년이 되자 암스트롱의 이 되먹임회로 기술에 대한 특허공세가 시작됐다.
■도둑맞은 영예
암스트롱의 발명이 알려지자 순식간에 미국전역의 아마추어들이 암스트롱의 되먹임 회로를 이용해 목소리와 음악을 방송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소규모 라디오방송국들이 우후죽순격으로 생겨나 자유롭게 방송을 내보냈다.
암스트롱이 수많은 무선통신기술을 개발하자 그의 앞에는 이를 이용하려는 사람들과 함께 수많은 경쟁자들이 나타났다. 발명가들은 되먹임회로를 개선해 완전히 새로운 장치로 만들어 특허를 받으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이보다 훨씬 그를 더 성가시고 힘들게 만든 것은 그를 가로막은 훼방꾼들이었다.
오디온과 트라이오드 증폭기를 발명한 발명가 리 드 포리스트도 그 가운데 한사람이었다.
1914년 3월 리 드 프로스트는 울트라오디온(Ultra Audion)이라고 이름붙인 장치에 대한 특허를 신청했다. 미국 특허청은 이 발명이 암스트롱의 발명품과 너무 흡사해 특허를 줄 수 없다고 판단했지만 드 포리스트는 포기하지 않았다. 수차례 발명품을 개선하고 다시 특허를 신청해 결국은 특허를 받아냈다.

1915년. 리 드 포리스트는 되먹임 회로를 개발한 사람은 자신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드 포리스트가 재생회로를 만들었다는 유일한 증거는 1912년 연구소의 노트였다.드 포리스트는 자신이 발명한 오디온 전화계전기와 울트라 오디온이 되먹임회로를 사용한 최초의 장치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정작 그는 자신이 개발한 오디온을 무선 송신기로도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도 몰랐던 데다 되먹임회로 개발후 7년 째인 1913년까지 이에 대해 한번도 언급하지 않고 있었다.
오디온 증폭회로에서 울리는 소리는 되먹임을 통해 회로를 전송하는데 따라 발생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 원리를 이해할 수 없었고 더 이상 연구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반면 바로 이 해에 청년 암스트롱은 포리스트의 오디온 진공관을 수백차례 실험한 결과 되먹임회로를 구성했고 특허를 받기에 이른 것이었다.
결국 드 포리스트와 암스트롱은 되먹임회로에 대한 특허권 놓고 특허소송에 들어갔다.
특허전은 무려 14년이나 계속됐다. 대법원까지만도 여러번이나 가야했기에 소송비용만도 만만치 않았다.
암스트롱과 포리스트의 특허소송은 포리스트 특허를 인수한 AT&T까지 가세하면서 판이 커졌다. 암스트롱은 20년대 초 친구 데이비드 사노프의 소개로 RCA에 제공하고 받은 특허 라이선스 비용 가운데 100만달러 이상의 비용을 들여야 했다.
리 드 포리스트로부터 특허를 매입한 AT&T의 변호사는 기술에 무지한 법원의 판사로부터 유리한 판결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그리고 이미 판결이 내려졌다는 이유를 들어 모든 반론에 방어막을 쳤다.

암스트롱은 “내 연구가 드 포리스트의 오디온 설계를 토대로 한 것은 맞다. 하지만 1912년 가을에 행한 여러번의 실험을 통해 최초의 실용성 있는 무선송신기를 만들게 되었다”고 반박했다.이들의 법정 소송은 암스트롱이 웨스팅하우스에게, 드 포리스트가 AT&T에 각각 자신의 특허를 판 1920년초에 절정에 달했다.
1922년부터 1934년 사이에 암스트롱은 뒤늦게 이 기술의 중요성을 깨달은 거인들의 특허분쟁 소용돌이에 휘말려 버렸다.
소송사건의 기술적인 측면을 이해하지 못한 연방법원은 처음엔 암스트롱의 손을, 다음 판결에서는 드 포리스트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나서 소송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특허소송은 무려 14년 간 지속됐다
1934년 5월 21일. 대법원으로 두 번이나 올라간 끝에 지리했던 소송의 최종 판결이 내려졌다.
리 드 포리스트에게 재생회로의 특허 소유권이 있다.
기술에 무지했던 대법원은 결국 드 포리스트의 손을 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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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리 드 포리스트는 합법적으로 진정한 라디오의 아버지라는 명예를 차지했다. 그것은 미국특허판결사상 가장 이상한 판결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그의 이 소송 패배는 다가 올 또다른 특허소송전의 비참함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