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구코너]전자문명의 불씨, 진공관②번개실험

일반입력 :2014/02/16 03:56    수정: 2014/02/16 11:55

이재구 기자

■프랭클린의 제안...피뢰침을 사용하다

1746년 미국 보스톤. 이 지역을 찾은 식민주의자 벤자민 프랭클린(1706~1790)은 스코틀랜드인 강사 아담 스펜서박사로부터 전기에 대한 강연을 들었다. 그는 강연 중 고전압계 정전기로부터 나오는 스파크와 빠지직하는 소리에 그 자리에서 매혹돼 버렸다. 프랭클린은 최적의 조건을 제시해 그의 모든 장비를 구입해 버렸다. 잉글랜드에 있는 피터 콜린스라는 친구는 그곳에서 행해진 전기실험에 관한 노트와 몇가지 장비를 추가로 보내주었다.

“번개와 정전기가 같은 물질로 이뤄져 있는 것이 아닐까?”

2년 후인 1748년 이미 인쇄업으로 재산을 모은 프랭클린의 최대 관심사는 번개의 속성을 알아내는 데 집중되고 있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번개는 미스터리한 것이었고 때로는 신이 내린 것으로 믿어졌다. 그러나 더 이상 진전은 없었다. 하지만 많은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은 증명되진 않았지만 번개가 전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유럽의 과학자들은 “유리막대마찰을 통해 발생하는 정전기는 족제비털을 끌어당기지만 수지막대를 통해 발생하는 전기는 공을 밀쳐 낸다. 이는 막대의 종류마다 발생시키는 전기의 형태가 다르기 때문이다”라며 전기의 성질에 대해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미국의 과학자 프랭클린은 “전깃불 스파크를 일으킬 때 그것을 여기에 모아 둘 수도 있고 저쪽으로 다시 튕겨 나가게 할 수도 있다. 스파크는 전기가 분단돼 있던 모든 전하들을 균등화시키는 방법이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1749년. 프랭클린은 필라델피아에서 번개가 구름에서 구름으로 , 구름에서 지구로 방출되는 전기방전이라는 그의 생각을 검증하기 위한 실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까지 전기 연구는 땅위에서 이뤄지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뭔가 폭풍구름으로부터 전깃불을 수집해 저장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것으로 보고 이를 알아내려고 골몰했다.

그는 자신의 책에서 구름으로부터 전하를 이끌어 내 전깃불을 저장할 수 있는 실험을 제시했다. 그것은 오늘날의 피뢰침같은 뾰족한 쇠막대기를 보초용 오두막 위에 세워 전기를 끌어 내는 아이디어였다.

“어떤 높은 망루나 첨탑 위에 한 사람과 전기스탠드 한 개가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큰 일종의 보초막같은 것을 설치한다. 스탠드 중간으로부터 쇠막대를 솟아오르게 해 문쪽에서 밖으로 내보내고 다시 위로 20~30피트정도 올리며, 끝은 뾰족하게 한다. 전기스탠드를 깨끗하고 건조한 상태로 유지하면 구름이 낮게 지나갈 때 막대는 구름으로부터 전깃불을 끌어내 사람에게 전달할 것이다. 그 위에 서 있는 사람은 감전돼 스파크를 받을 수도 있다.”

프랭클린은 사람들이 번갯불에 감전되고 타 버리지 않도록 전기를 밀랍으로 절연하는 방법도 서술하고 있다. 또 실험자를 절연된 박스로부터 내려오도록 할 것을 주문했다.

“사람들에게 어떤 위해가 있을까 걱정된다면(물론 나는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 사람을 보초막 바닥에 서게 하고 때때로 한쪽 끝을 밀랍으로 고정된 철사고리를 막대에 가까이 갖다 대도록 하면 된다. 그 사람은 밀랍 손잡이를 잡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막대에 전기가 통하더라도 스파크는 막대로부터 철사줄을 때릴 것이며 사람에게는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다.”

■프랑스과학자들, 프랭클린 아이디어 확인하다

1751년 프랑스의 아베 놀레(Abbe Nollet, 1700~1770)는 런던에서 출간된 프랭클린의 책을 보고 이를 비웃었다. 당대의 가장 유명한 과학자였던 그는 프랭클린의 ‘전기 실험과 관찰(Experiments and Observations on Electricity)’에 제시된 실험이 실행 불가능하다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왕 루이 15세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번개와 전기가 유사한 성질을 갖는다는 프랭클린의 생각을 확인해 보라고 지시했다.

1752년 5월 10일. 파리에서 18마일 떨어진 말리(Marly-la-Ville)의 한 정원. 토머스 프랑수아 달리바르(Thomas-François Dalibard, 1709~1778)는 절연된 테이블 위에 40피트 높이의 뾰족한 쇠막대를 세웠다. 때마침 폭풍구름이 한 차례 지나갔다.

한 사람이 조심스럽게 다가가 프랭클린이 서술한 대로 절연된 철사고리를 사용해 여기에서 스파크를 이끌어 냈다.

1752년 여름 내내 여러차례 실험이 반복돼 모두 성공하면서 프랑스 과학자들을 열광시켰다. 이들은 서로 더 나은 실험을 하려고 점차 막대기를 90피트까지 높여갔다.

도버해협건너편에 있던 영국의 과학자들도 스파크를 이끌어내려고 했지만 실패를 극복하지 못했다.이 해 영국의 여름은 특히 습기가 많아 건조한 공기로부터 스파크(정전기)를 이끌어 낼 수 없었다. 하지만 영국인들도 이 실험성과에 열광했다.

런던매거진은 “이름만 대면 금방알 수 있는 많은 유명한 사람들이 그 막대가 발생시킨 효과를 목격했다. 이를 통해 이제 번개의 효과와 전기가 동일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썼다.

유럽인들은 프랭클린에게 환호했다. 전기가 구름에서 발생할 수 있고 커다란 유리금속용기 라이든 병(Lyden Jar)에 저장될 수 있으며 공기중에서 도출된 전기가 육지에서와 똑같은 식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입증해 주었기 때이었다.

하지만 정작 이 아이디어를 제안했던 프랭클린은 아직 이를 실험에 옮기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한단계 더 나아간 저 유명한 연날리기 실험으로 이어진다.

■연날리기로 번개가 전기임을 증명하다

1752년 6월 15일 필라델피아시. 프랭클린은 크라이스트처치 첨탑 꼭대기에 금속막대를 세워 실험할 기회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 유럽 전기학자들이 자신이 제안한 피뢰침으로 실험에 성공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는 실험시 전기 전하를 끌어올 수 있을 정도로 막대가 높이 올라가야 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첨탑 건축은 느리게 진행됐고 프랭클린의 인내심도 한계에 다다랐다. 실험을 위해 어느 정도 높이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프랭클린은 보초막에 설치될 뾰족한 쇠막대를 공중에 띄우기 위해 연을 사용해 보기로 했다.

프랭클린은 두 개의 삼나무 막대를 교차시켜 단단히 묶은 다음 그 위에 큰 실크 손수건을 펼쳐 고정시켜 연을 만들었다. 위쪽 끝에 날카로운 쇠철사를 매달았다. 그는 자신 쪽으로 늘어져 내려온 연줄 끝 쪽에는 구리열쇠와 연줄을 잡아 당길수 있는 절연 실크 리본을 달았다. 그리고 아들을 데리고 실험장소로 나가 내릴지 모를 비를 피할 만한 오두막으로 갔다. 연이 떠올랐지만 천둥구름이 다가오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벤자민의 친구인 영국인 과학자 프리스틀리(1733~1804)는 ‘전기의 역사와 현재 상황(The History and Present Status of Electricity,1767)’에서 당시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한차례의 꽤 괜찮은 구름이 아무런 효과도 미치지 않고 지나갔다. 결국 자신이 만든 장치에 실망하기 시작할 바로 그 무렵이었다. 그는 약간 풀어헤쳐진 삼끈의 보푸라기들이 일어나 마치 동일한 도체 위에 매달려 있는 것처럼 서로 반발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이 바람직한 현상에 고무돼 즉각 자기손가락을 열쇠 속으로 집어 넣어 보았다. 그리고 그는 매우 분명한 전기 스파크를 감지했다.”

프랭클린은 스파크를 일으키는 구리열쇠에 보존된 전기를 계속해서 라이든 병 속에 수집했다. 이로써 프랭클린은 번개가 전기라는 것을 증명했다.

프랭클린은 연 날리는 실험에서 감전사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예외적이었다.

프랭클린의 실험이 있었던 이듬해 1753년 7월 26일 러시아 성페테르부르크.

러시아의 물리학자 G W 리치먼은 천둥과 번개가 치자 전기 세기를 측정할 수 있도록 준비한 측정계가 있는 곳으로 서둘러 달려갔다.

그는 전기를 유도하기 위해 걸어 놓은 금속이 만나는 지점에서 고개를 숙였다. 그 때 하얀빛을 띤 주먹만한 시퍼런 불덩이가 금속막대를 타고 내려와 그의 머리를 내려쳤다. 그는 그 자리에서 숨졌다. 이마에는 피가 흘러내린 자국이 있었고 몸에도 여러 곳 불에 거슬린 흔적이 남았다. 리치먼은 새로운 전기시대를 여는 과정에서 희생된 최초의 순교자가 됐다.

■번개를 피하는 피뢰침을 확산시키다

프랭클린의 전기연구는 번개현상의 속성을 알아낸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1752년 그는 필라델피아 하이 스트리트 141번지에 있는 자신의 집에 피뢰침을 설치했다.

쇠 피뢰침은 지붕 꼭대기에 붙어 위로 9피트나 올라가 있었으며 기괴한 모양을 하면서 집아래로 구불구불 흘러내렸다. 프랭클린은 집에서 만든 종을 따라 서툰 솜씨로 철사를 이리저리 엮어 피뢰침을 설치했다.

철사에 6인치 정도의 간격으로 틈새를 파넣어 양쪽 끝에 종을 달았다. 종과 종사이에는 청동으로 된 조그만 공이 달렸다. 피뢰침 위로 지나가는 전하를 띤 구름들이 공을 건드릴 때 공이 종들 사이에서 춤추듯 움직이도록 했다. 이로 인해 번개가 칠 때엔 종소리라 울려 퍼지게 했다.

피뢰침 설치 후 번개가 치던 어느 날 밤 잠에서 깬 프랭클린은 자신의 집에서 일어난 번개가 구리선과 종을 지나 땅밑으로 흡수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현상에 대해 이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어느 날 계단에서 난 커다란 빠지직 소리에 잠이 깼지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종들은 울리는 대신에 때때로 손가락만한 굵기의 연속적인 백색 광선 모양으로...불길이 지나가듯이 반발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계단은 떨어진 핀을 보고 주울 수 있을 정도로 마치 햇빛이 비치는 것처럼 밝았다.”

그는 이 새로운 실험을 통해 피뢰침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번개로부터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지켜줄 것이라는 그의 생각을 증명했다.

이듬 해인 1753년. 프랭클린은 펜실베이니아 가제트지 10월 19일자에 자신의 피뢰침 실험의 원리와 목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구름에서 나오는 전깃불이 충돌할 만큼 가까워지기 전에 구름으로부터 전깃불을 조용히 끌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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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피뢰침 설치 주장에 꿈쩍도 않던 유럽대륙의 모든 빌딩에 삽시간에 피뢰침이 솟아올랐다.

그로부터 100여년이 지난 후. 구름속에 과도한 방전이 발생할 때 나타나는 번개현상을 실험실 속 작은 유리관속으로 끌어들여 그 속성을 알아내고자 하는 과학자들이 등장한다.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