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밍, 진공관시대 불씨를 지피다
1904년 10월 영국 런던. 교류 무선신호를 직류로 바꿔주는 방법을 찾던 존 앰브로즈 플레밍(John Ambrose Fleming, 1849~1945)유니버시티칼리지 교수에게 갑자기 매우 행복한 생각이 떠 올랐다.
“그거야. 에디슨전구를 라디오 수신용 부품으로 적용하면 되겠어.”
4년 전인 1900년. 그는 무선통신의 아버지 마르코니(Guglielmo Marconi,1874~1937)로부터 어떻게든 기존 라디오수신기 성능을 개선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고민하던 중이었다. 1899년부터 마르코니무선전신(Marconi Wireless Telegraph Company)의 컨설턴트로 일하던 그에게 떨어진 과제는 쉽지 않은 것이었다.
당시 가장 일반적인 라디오 수신기는 크리스탈 검파기(cryatal detecter)였다. 고양이수염으로 불리는 가는 금속 선을 반도체물질 갈레나(Galena)위에 수직으로 닿게 만든 점접촉 방식의 기기였다. 문제는 수신상태가 항상 불안정하다는 점이었다. 이 기기로 계속해서 깨지지 않는 맑은 소리를 듣기란 쉽지 않았다.
게다가 여러사람이 각자 단말기에 헤드폰을 끼워 들어야 할 만큼 소리도 작았다. 기기를 작동시키는 유일한 에너지가 안테나였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장거리에서 오는 신호를 라디오로 들으려면 안테나도 더 큰 것을 써야 했다. 크리스탈검파기 성능개선 문제로 고민하던 플레밍은 문득 과거 뉴욕 에디슨전기(Edison Electric Light Company)본사에 들렀던 때를 떠올렸다. 1882년부터 1885년까지 에디슨전기 런던 자회사에서 컨설턴트로 일했던 그였다. 플레밍은 에디슨전구 안에서 교류전류가 직류로 바뀌어 흐르는(정류) 현상을 목격했었다. 당시로선 불가능하다고 여겨진 현상이었다. 그는 이 전구의 원리를 그대로 적용한 유리 진공관을 만들어 볼 생각을 했다.
그는 즉각 자신의 조수인 다이크(G. B. Dyke)를 불렀다.
“이 아이디어를 테스트 할 준비를 하게.”
예상대로라면 그가 만든 작은 전구모양의 투명유리 진공관은 교류신호를 직류신호로 바꿔주는 정류기능을 할 것이었다. 이는 고양이 수염 수신기의 단점들을 단숨에 극복할 부품과 라디오수신기의 등장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실험결과는 예상대로였다.
그해 11월. 런던 사람들은 가우어 거리를 뛰어 특허청으로 달려가는 플레밍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아이디어에 대해 열 밸브(Thermonic Valve)라는 이름을 붙여 특허를 출원했다. 그리고 마르코니에게 이 발견을 알리는 편지를 썼다.
“아무에게도 이 아이디어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매우 유용할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이 발명이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하지 않고 이 특허를 자신에게 컨설팅을 맡겨 준 마르코니에게 넘겼다.
플레밍은 1905년 영국왕립학회에 제출한 논문을 통해 “이 이상적이고 완벽한 전기 신호발생(발진)용 아이디어는 뜨거운 카본 필라멘트와 아주 차가운 금속 아노드을 완벽한 (유리)진공관 속에 넣음으로써 이뤄졌다”고 발표했다.
이로써 잡음,찌그러짐, 끊어짐 등이 없는 라디오수신기 등장의 첫 번째 토대가 만들어졌다.
■리 드 포리스트, 라디오 신호 증폭에 성공하다
그 이듬 해인 1906년. 미국의 발명가 리 드 포리스트(Lee De Forest,1873~1961)는 플레밍 진공관의 양극과 음극 사이에 금속판 그리드(grid)를 넣은 3극 진공관을 만들어 보았다.
드 포리스트는 필라멘트를 둘러싸는 얇은 금속판 실린더를 만든 다음 이를 유리관에 넣어 높은 진공상태로 만들었다. 필라멘트와 금속실린더는 전류회로에 연결된 채로였다. 배터리로 전류를 통하게 하자 전류는 한 방향으로만 흘렀다. 전자는 캐소드, 그리드, 플레이트의 순서로 흘렀다.
오디온은 때로는 엄청나게 잘 작동했지만 어떤 때는 거의 작동하지 않았다. 디 포리스트는 물론 많은 연구진들이 진공관의 부분적 진공상태를 안정화시키기 위해 신뢰성 높이기에 혈안이 돼 있었다.
오디온에 이어 만들어진 3극진공관 트라이오드(triode)는 변환된 라디오신호를 원래대로 재현(복조)해 낼 수 없었다. 하지만 디 포리스트는 곧 대체방법을 찾아 신호를 왜곡시키지 않고 증폭 시킬 수 있었다.
이 발명품은 발명 6년 만에야 제대로 성능을 검증받아 진공관 라디오수신기 대중화의 결정적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1912년 8월. 미 캘리포니아 팰러앨토시 에머슨가 페더럴 텔레그래프(Federal Telegraph Company) 전자연구소(Elelctronics Research Laboratory). .
테이블에 깔린 종이 위에 집파리가 살금살금 걸어가는 것을 진지하게 바라보는 세명의 엔지니어가 있었다.
“성공이다”
그들의 귀에는 파리의 바르르 떨리는 걸음 소리가 군화의 행진소리만큼이나 크게 들렸다.
동그란 원통형 유리진공관으로 파리의 걸음을 120배나 증폭시켜 신호를 크게 듣는 실험에 성공하는 순간이었다.
이 날 오디온의 실험을 지켜 본 주인공은 평생에 걸쳐 300개 이상의 발명특허를 받은 리 드 포리스트와 그의 조수 찰스 V. 로그우드와 허버트 밴 에튼이었다.
이 날의 파리 발자국 소리는 결국 플레밍의 진공관과 함께 오늘 날의 라디오,텔레비전,컴퓨터,녹음기가 있게 한 전자문명의 위대한 첫걸음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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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진공관 증폭기는 1947년 12월 이를 대체할 반도체가 발명된 이후 1970년대까지도 전축(Audio Amplifier)과 TV용 부품으로 널리 사용됐다. 펀치카드를 대체하고 전자식으로 움직이는 디지털 저장장치, 그리고 진공관 전자 컴퓨터의 등장을 가능케 했다.
진공관이란 불씨로 20세기를 전자문명으로 이끈 플레밍과 포리스트는 프로메테우스였다. 하지만 이들의 진공관 발명에는 그들보다도 훨씬 더 이전에 왕성한 도전적 실험정신을 보여주었던 많은 과학자들의 노력이 숨어있었다. 자연 속에서 번개실험을 시작한 벤자민 프랭클린에서 가이슬러, 크룩스,톰슨, 뢴트겐, 에디슨 에 이르기까지 많은 실험적 과학자,엔지니어들의 실험정신이 그것이다.
*본 칼럼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